“사욕에 가려지지 않는 마음이 곧 ‘天理’”
불교로 읽는 古典- ③왕양명의 ‘전습록’ 上
▲ 왕양명(1472~1528)의 고향 저장성 여요에 있는 왕양명의 흉상. 그는 형식화된 주자학을 비판하고 새로이 양명학을 창시했다. |
〈전습록〉은 ‘양명학’의 교전(敎典)이다. 양명학은 “우주가 바로 내 마음, 내 마음이 곧 우주”라고 하여 유가에서 유심론을 제창한 송대(宋代)의 상산학(陸象山의 학, 象山은 호. 이름은 陸九淵 1139-1192)을 이어서, 명대(明代)에 유가 심학(心學)을 완성시킨 왕양명(王陽明, 陽明은 호. ‘양명학’은 그의 호를 따서 붙여진 학명. 이름은 守仁 1472-1528)의 철학사상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넓은 의미로는 양명 후학들의 사상까지를 포괄하지만, ‘양명학’ 하면 대체로 왕양명 자신의 철학사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왕양명의 철학사상을 오롯이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전습록인 것이다.
전습록과 양명학
〈전습록〉은 왕양명의 어록, 제자 및 당대의 학자들과 학문을 논한 편지글 들을 모아 집대성한 책이다. 모두 상 중 하 3권으로 상권은 1518년(양명 47세)에 문인 설간(薛侃)이 서애(徐愛) 육징(陸澄)과 설간 자신이 기록한 선생(왕양명)의 어록을 모아 판각한 것이고, 중권은 역시 문인 남대길(南大吉)이 1524(양명 53세)년에 초간 전습록을 상책으로 하고, 왕양명이 학문을 논한 편지 글 8편을 모아 하책으로 하여 절강 소흥(紹興)에서 각간한 것이다.
그리고 1556년 문인 전덕홍(錢德洪)이 하권을 포함 상 중 하 3편을 한데 묶어 펴내니, 이것은 왕양명 사후 26년의 일로서 〈전습록〉의 총 완성본이 된다.
상권(132조)은 왕양명 40세 전후의 어록이 많고, 중권의 학문을 논한 편지 글들(8편)과 하권의 어록(142조)은 50세 이후 만년에 설한 내용들이 중심이다. 왕양명은 57세에 객향(客鄕)에서 공무수행중 병으로 사망하니 50세 이후는 그에게 있어 만년에 해당 한다. 전습록은 왕양명이 평생토록 설한 철학사상을 빠짐없이 담고 있으며, 그 후학들 사상 형성의 근간이 되기 때문에 양명학 연구의 기본서 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왕양명의 사상이 불교의 선학(禪學)과 같다하여 조선시대에 크게 배척을 당했다. 그 결과 이 책은 활발한 유통이 불가 했으며 언해 또한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양명학 연구자는 하곡 정제두 등 몇 사람에 불과 하다. 따라서 전습록이 한글로 번역되어 간행된 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다. 주자학의 융성과는 달리 양명학은 불모지에 있었다. 〈전습록〉이란 책이름 자체가 아직도 우리들에게 낯 설은 것은 모두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 〈전습록(傳習錄)〉은 논어 학이(學而)편 증자(曾子)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증자는 말하길 하루에 세 가지를 살피는 데 그 중 한 가지가 “전해 받은 것을 충분히 익히지 않았는지(傳不習乎)?” 하는 것이다. 이 전불습(傳不習)에서 ‘불(不)자’를 빼고 “전하고 익힌다”는 전습(傳習)을 따 거기다 ‘錄(기록)’을 붙여 책 제목으로 만든 것이다. 제목에 ‘학문 연구’의 의미가 깊다.
心卽理-마음이 곧 天理다
만물일체관 역시 불교처럼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일심(一心)의 소현(所現)이라고 하는데서 얻어지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심즉리’는 양명학의 핵심이다. ‘심즉리’란 용어를 유가에서 먼저 쓴 학자는 전술한 육상산이다.
상산은 “사(四)단은 곧 마음 이고, 천지가 나에게 준 바도 곧 마음 이다. 사람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理) 역시 갖추고 있으니 ‘마음이 곧 이(心卽理)’ 이다”라고 하였다(상산전집 與李宰二書).
그러나 왕양명의 ‘심즉리’는 용어와 내용은 상산과 다르지 않더라도, 상산학을 연구하여 이어서 그것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찍부터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大學)를 화두로 삼고 있다가 귀양살이 간 귀주 용장(龍場)에서 어느 봄 날밤 명상 끝에 홀연히 “일체 성인의 도가 나의 성(吾性)가운데 자족하니 사물에서 이를 구함은 잘못이다”라고 깨우친데서 비롯 된다. 주자에서 격물은 나 밖의 사물에서 이를 찾는 것이다.
주자의 ‘성즉리(性卽理)’는 사사물물에 각각의 이가 내재 한다는 이론인데, 격물은 바로 그 사물의 이를 찾는 궁리(窮理)다. 왕양명이 ‘일체 성인의 도가 내 마음에 자족한다’고 깨우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의 마음이 이(心卽理)’라는 뜻이다. 이가 내 마음인데 이를 내안에서 찾아야지 왜 밖의 사물에서 찾는다는 말인가. 그래서 뒷날 왕양명은 제자인 서애에게 “마음이 곧 이다(心卽理也). 사욕의 가림 없는 이 마음이 곧 천리(天理)다”라고 가르친다. 이래서 왕양명에 있어 격물(格物)은 궁리가 아니라, 인욕의 제거(去人欲)로 해석 된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분기점은 바로 이 격물설의 다름에 있고, 양명학이 선학과 같다(似禪)는 평을 듣는 것도 우선은 ‘심즉리’설에 기인한다. 그리고 주자학에서의 ‘성즉리’는 성리학, 왕양명에서의 ‘심즉리’는 심학이라는 각각의 명칭을 갖는 소이연이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주자학이나 양명학에서 다 같이 핵심개념을 이루고 있는 이(理)는 어디서부터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천착할 필요가 있다. 그 까닭은 정주, 육왕으로 대표되는 신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화엄학과 신유학
화엄에서는 이가 마음(心)과 동일하여 사(事)를 이루는(衣理成事-淸凉澄觀) 형이상의 존재로서 사(現象世界)의 체(體)가 되고, 성리학에서는 이가 곧 태극으로 역시 형이상의 도로서 기(氣) 속에 내재해, 만물의 본성이 된다. 그리고 양명학에서 이는 화엄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동일하여 만물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를 마음 안의 존재로 규정한다.
화엄에서 이는 마음이고 사의 체다. 성리에서 이는 태극으로서 성이며, 양명에서 이는 마음이고 역시 만사를 이루는 근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심(心) 또는 성(性)으로서 이 세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형이상의 존재가 된다.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이와 심’은 화엄과 양명에서 존재 그 자체 즉 실재(reality)로서 ‘심즉리’이다. 성리에서는 ‘이와 성’이 실재로서 ‘바로 ’성즉리’다.
이상 불학(佛學)과 신유학에서의 이의 성격과 그 의(義)를 살펴보았다. 세 가지 학문이 모두 이를 빼놓고는 성립이 불가능 할 만큼 이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중국사상사에서 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철학의 중심이 되었는가? 불학에서 인가, 유학에서 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불교 화엄학의 성립부터라 할 수 있다.
유교 대표 학설 양명학의 교전
불교 禪과 비슷해 조선 배척
화엄·성리·양명학, ‘理 사상’ 다뤄
‘心卽理’, 화엄 이사법계관에 뿌리
원래 이(理)자는 옥(玉)자와 리(里)자로 결합된 형성자(形聲字)이다. 玉은 글자의 형방으로 뜻을 표하고 里는 성방으로 음을 나타낸다. 이의 주요 의미는 옥을 기초로하여 형성되고 있다. 옥으로 다듬어지기 전의 옥석은 자연적인 문리(紋理)를 가지고 있다. 紋은 무늬이고, 理는 결을 뜻한다. 공장(工匠)이 옥을 만들려면, 그는 무늬와 결을 따라서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와 같이 理는 중국 고대에서 옥석의 紋理를 지칭함과 동시에 또 문리에 순응하여 옥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紋理 와 治玉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리는 물리(物理), 치옥은 사리(事理)라는 의미로 발전하며, 사회 문화적 확대에 따라 점차 다의적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역전(易傳)에서는 천하지리, 성명지리(性命之理), 의리, 물지리(物之理)로, 도가에서는 물리(物理), 생리(生理), 인리(人理)로, 맹자에서는 의리(義理), 순자에서는 예리(禮理) 등으로 그 의미가 고양되고 있다 애초 옥의 무늬를 뜻했던 이가 역사가 흐르면서 매우 추상성을 함의한 어휘로 발전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나 도가 쪽 어디에서도 이가 마음이나 성과 결합하여 ‘존재의 이’로 전화하지는 못했다. 이가 ‘철학적 실재’의 개념으로 되기까지는 당(唐)대의 화엄학을 기다려야 했다.
두순·지엄·법장·징관·종밀 등 당대 화엄종사들은 화엄경을 탐구, 그것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관점은 같지 않았지만 불교라는 종교이면의 비밀 경험들을 체득하고, 그런 연후에 그것들을 철학지혜, 즉 이성의 문자(rationnal language)로서 경속에 담긴 불교 진리들을 철리(哲理)로 다시 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우리가 화엄학을 ‘화엄철학’이라고 부르는 소이도 이런데 있다. 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이론들이 이사법계(理事法界)론 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법계론 이전에 먼저 화엄경문에서 심이 갖는 의(義)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사법계는 오직 일심(一心)의 연변(演變)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그림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림을 그린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心如工畵師) 모든 세간을 그려내는데, 오온이 다 마음 따라 생기어 법을 만들지 않음이 없다. 심과 불이 이와 같고, 불과 중생이 또한 그러하다. 마땅히 심과 불이 이러한 줄 알면 체와 성이 모두 무진함을 알 수 있다. 심행(心行)이 세간(世間)을 두루 짓는 줄 아는 이 있다면, 이 사람 佛을 보아 참다운 성을 알게 된다. 만일 누가 삼세(三世)의 일체불(一切佛)을 요지(了知)코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임을 보아야 할 것이다”(80화엄 야마천궁품).
화엄경문의 그 유명한 ‘일체유심조’ 법문이다. 그림 그리는 화가가 그 그림이 자기 마음의 소산인 줄을 모르고 있듯이, 우리 중생들도 나의 일체 심행이 세간을 두루 짓고 있는데 그것이 마음인 줄을 모른다. 일체가 ‘유심조’임을 아직 깨우치지 못해서다.
이와 같은 일체유심조의 일심(一心)은 화엄종사 들에 의해 사법계로 설해진다. 즉 심은 만유를 융통하여 사종법계를 이룬다. 청량징관은 “법계의 상(相)은 요약하면 오직 셋이나, 그러나 모두 사종을 갖추고 있음으로 1은 사법계(事法界)요, 2는 이법계(理法界)요, 3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요, 4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다”라고 한다(화엄법계현경). 그리고 이와 같은 징관의 사법계(四法界)를 규봉종밀은 더욱 상세 하면서도 간요하게 해석을 내리고 있다.
1. 사법계니 界는 分의 義인 바, 일일차별의 分齊가 있기 때문이다.
2. 이법계니 여기서 界는 性의 義인 바, 事法이 무진하나 同一性인 까닭이다.
3. 이사무애법계니 性과 分의 義인 바, 성분은 무애한 까닭이다.
4. 사사무애법계니 일체 分齊의 事法이 一一如性으로 융통하여 중중으로 끝이 없는 까닭이다(주 화엄법계관문).
일반인이 평소에 화엄 사(四)법계관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위 종밀선사의 주석을 보면 아주 쉽게 알 수가 있다. 같은 계(界)자라도 사와 이에서 뜻이 정반대다. 사법계에서는 나뉨(分)인 바. 이것은 사법계가 우리들 안전에 현전(現前)하는 사사물물로 각기 차별상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다음 이법계에서 계(界)는 성(性)인바, 일일차별의 사사물물이 중중무진이라도 그 안의 성(性)은 동일하다는 뜻이다. 주자학의 ‘성즉리’는 바로 이 이법계(理法界)의 ‘이성(理性)’과 같다. 주자에서 ‘태극은 이’이고, 만물은 각기 태극을 그 안에 가지고 있으니(萬物各具一太極) 곧 사사물물에 동일성의 理(태극)가 똑 같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극인 이 이를 사람에 있어서는 성(性)이라 하고 사물에 있어서는 이(理)라고 부르는 차이 뿐이다.
왕양명에 있어서도 화엄의 4종법계 모두가 일심의 소현이고 특히 만물에서 체성(體性)을 갖는 이법계가 바로 심인 바, ‘마음이 이(心卽理)’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게 도출되는 이론이다. 이렇게 보면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나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는 모두 화엄의 이사법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할 것이다.
옥의 무늬(紋理)로 시작한 ‘리(理)’가 드디어 당대의 화엄학에 이르러 마음과 결합, 철학적인 형이상의 ‘실재’ 로 개념이 크게 승화되고 있다. 불학이 유학보다 마음(心)의 형이상적 바탕이 그 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하며 깨달음을 얻어라”… 왕양명이 던지는 화두
불교로 읽는 古典 -④왕양명의 ‘전습록’ 下
마음과 사물은 둘이 아닌 하나
주자와 다르고 불교와는 ‘同軌’
양명학의 완성은 良知 다스리기
성찰극치, 절사 등이 주요 절목
생활 속 자기완성을 중요시 해
朱王에서 理의 성격
우리는 전호에서 양명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명제 ‘심즉리(心卽理)’가 무엇이며 그 연원은 어디에 있는 가를 살펴 보았다. 이 과정에서 자연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까지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명의 ‘심즉리’는 주자의 ‘성즉리’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심즉리’ ‘성즉리’는 다 같이 화엄학의 이사법계설(理事法界說)에 근원하고 있음도 파악 할 수 있었다.
주자의 ‘성즉리’는 마음을 심(心) 성(性) 정(情)으로 삼분하여, ‘성’을 ‘이’라고 규정하고 심에 대한 우월성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이 성은 도덕적으로 볼 때 인·의·예·지(仁義禮智)로서 순선(純善)이다. 심과 정은 성과는 달리 이기(理氣)의 합이므로 이것은 선도 있고 악도 있다. 이는 태극으로서 순선이지만 기는 유선유악(有善有惡)이기 때문에 이기의 합(合)일 때, 당연히 선악이 혼재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가 화엄 이법계를 딴 것이라면, 이기론에서 만물의 질료라 할 수 있는 기(氣)는 사법계를 모방한 것이다. 기는 이와는 달리 청탁(淸濁)이 있어, 이로하여 선악이 있게 마련이다. 청기는 선할 수 있지만 탁기는 그 정도에 따라 현우(賢愚), 선악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선악, 현우를 갖는 존재이다.
불교에서 일체 중생은 모두가 부처님 성품(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생은 본래 청정한 존재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고 우매하며, 선악이 심신에 혼재하는 것은 무시이래로 쌓여 온 습(習), 즉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서다. 기독교에서는 원죄(原罪)가 인간을 만들고, 불교에서는 무명이 중생을 만들며, 유교에서는 기가 인간을 만든다.
아담과 이브라는 최초의 인간이 원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벌거벗고 천사로 살고 있을 것이고, 근본무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욕락을 모르는 채 부처로 살아 갈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을 만드는 기(氣)에 맑(淸)고 탁(濁)하고 조악(粗惡)한 것이 없었다면 인류는 모두가 70세 이후의 공자처럼 성인(聖人)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무명, 원죄, 기가 있기에 우리는 지금 인간으로 사는 게 아닌가!
주자학의 이기론에서 이는 형상이 없고, 운동도 없으며, 아무런 조작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언제나 기 가운데 있으면서 사물의 본성(物理 또는 事理)을 이루고 사람에 있어서는 하늘에서 품수(稟受)한 천리(태극), 곧 성(性)으로 설명된다.
또한 이는 주자학에서 ‘존재의 이’, ‘도덕의 이’로 개념화 된다. 존재의 이란 이른바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로서 마땅히 그렇게 되는 바의 까닭, 곧 모든 것의 원인, 특히 현상세계를 존재케 하는 제일 원인자와 유사한 것이다. 태극이 동(動)하면 양(陽)이 생하고 또 태극이 정(靜)하면 음(陰)이 생한다(주렴계 태극도설)고 할 때, 여기서 동과 정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理)이다. 효제충신도 마찬 가지다. 우리는 왜 효제충신 해야 하는가? 거기엔 그만한 이(理)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덕이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이다. ‘소당연지칙’이란 마땅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법칙, 또는 규칙이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도덕적 의무가 이것이다. 칸트의 용어를 빈다면 ‘정연명법(定言命法)’과 같은 것이다. 유교에서 강상의 윤리가 되었던 삼강(三綱), 오륜(五倫)이 이에 해당하고 종교의 계율도 이러한 범주에 들 것이다.
‘이(理)’의 ‘고(故)’와 ‘칙(則)’은 성리학의 두 수레바퀴와 같다. 그리고 주자학에서 사리 물리와 더불어 고와 칙은 마음 안의 존재이기 보다는 ‘외재물(外在物)이다. 이것이 성즉리의 구조다.
그러나 왕양명의 성즉리(心卽理)는 이상 주자학에서 갖는 이의 의를 그대로 가지면서 마음 안의 존재가 된다. 천리, 사리, 물리, 소이연지고, 소당연지칙과 같은 이의 모든 것이 마음과 일여(一如)하다. 그래서 왕양명은 “마음 밖에 이가 없고 마음 밖에 사가 없다(心外無理 心外無事)”〈전습록〉고 하는 것이다.
마음 - 萬事出
왕양명에서 ‘物(事)’이란 마음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전습록〉에서 이러한 도리를 가장 간요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목을 들라면 다음의 말일 것이다.
“텅 비어 영명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가 갖추어져 있음으로 만가지 일이 이로부터 나온 다. 마음 밖에 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밖에 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虛靈不昧 衆理具而萬事出 心外無理 心外無事.
-전습록 서애록)
왕양명의 이 말은 원래 〈대학〉의 명덕(明德)을 해의한 주자의 “밝은 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바다. 텅비어 영명하고 어둡지 않아 모든 이를 갖추었음으로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 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자는 맹자 ‘진심장구 상’에서도 “마음은 사람의 신명으로 모든 이를 갖추었음으로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心者 人之神明 所以具衆理 而應萬事者也)”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대학〉의 ‘명덕’ 해의에서 ‘허령불매’는 심덕을 지칭 하는 말임이 분명하다. 즉 ‘명덕’은 곧 ‘심덕’ 이다.
왕양명은 주자의 ‘허령불매’는 그대로 쓰고 그것에 대한 작용적 측면을 풀이한 후구 ‘구중리 응만사’에서 ‘구(具)’ 한 자를 도치 시키고, ‘응(應)’ 한 자를 ‘출(出)’로 바꾸어 ‘만사(萬事)’의 뒤에 놓음으로써 주자의 ‘심’과는 상이한 개념을 도출 하고 있다.
즉 ‘구중리(具衆理)’를 ‘중리구(衆理具)’로, ‘응만사(應萬事)’를 ‘만사출(萬事出)’로 만들어 ‘심’에 대한 왕양명 자신의 신설을 내놓고 있다. 주자의 ‘구중리’와 ‘응만사’는 마음에 모든 이를 갖추고 있어 나 밖의 사물들과 감응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갖춘 이와 나 밖의 사물의 이가 서로 합일하여 감응 한다는 뜻이다. 마음은 주관이고 사물은 객관, 대상물로서 ’심‘과 ’물‘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이에 반하여 왕양명의 ‘중리구’ ‘만사출’은 주자와 달리 이일(理一)이나 분수(分殊)의 입장이 아닌, 오직 이일의 입장으로서 이는 심인 까닭에 인간에게 본구하는 것으로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왕양명의 ‘심즉리’는 ‘심리합일’이기도 하며 ‘심물합일’이기도 하다.
‘만사출’은 일체의 사사물물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과 사물은 상호 대립되는 이원적 존재가 아니라 일원적으로 확립되는 존재다. ‘심’과 ‘물’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주자와 다르고 불교와 동궤(同軌)이다.
육조 혜능은 “세상 사람들이 본래 성품이 청정해서 모든 것이 자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미혹과 망령을 없애고 안팍을 밝게 사무치면 자성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니 견성한 사람도 이와 같다”(육조단경)고 말하고, 황벽선사는 “이 법이 곧 마음이니, 마음 밖에 법이 따로 없다”고 하고, “일체 모든 것은 오직 한 마음 뿐이다”, “일체 모든 것은 다 마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 지는 것이다”(전심법요)라고 하였다.
왕양명의 ‘허령불매 만사출’의 심은 혜능의 ‘자성청정심’, 황벽의 ‘일체 유일심’과 그 의미나 개념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불학의 마음이나 왕양명의 심은 이처럼 인간과 우주의 근원이란 점에서 전호에서 언급한 대로 형이상학적 실재(reality)라 말 할 수 있다.
良知와 致良知
왕양명의 ‘심학’은 ‘치양지(致良知)’로 완성된다. 이로써 ‘양명학’은 불학의 틀에서 벗어나 공맹, 특히 맹자학(孟子學)으로 돌아 간다. 양명학의 완성과정을 대체로 ‘교(敎)의 삼변(三變)’이라 한다. 용장 오도(悟道)의 심즉리(37세), 귀양서원의 지행합일(38세), 치양지의 제창(49세)이 그것이다. 심즉리는 지금까지 설명한 대로다. 그리고 그의 지행합일은 주자학의 선지후행론에 대한 반격이다.
당시 명대 사회는 주자학이 관학화되어 과거학으로 전락하여 이른바, 성학(聖學)이라고 하는 유학을 출세학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자가 비판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되고 만 것이다. 자신을 완성하고 성인(聖人)이 되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이 공맹의 가르침인데 왕양명에 비친 당시 명나라의 학문은 관직에 나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하였다. 특히 선비, 즉 독서층의 젊은이 들은 “먼저 알아야 행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론 만을 맹신 하여 알기 위해 배운다는 명목으로 평생 죽을 때까지 일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이론이 바로 지행합일(知行合一) 이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둘이 아닌 하나다. 효를 말 할 때, 효행에 대한 절목만을 알고 직접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이것은 효를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앎(知)과 실천(行)은 둘이 아니다. 진정으로 실천해야 아는 것이다. 이래서 양명학은 실천주의 철학, 행동주의 철학으로 평을 받는다.
전술한 대로 양명학의 학문종지는 ‘치양지(致良知)’에 있다. 즉 ‘양지’를 이루는데 있다. 그렇다면 양지란 무엇인가? 양지란 말은 ‘양심’이란 용어와 함께 맹자가 최초로 쓴 말이다.
맹자는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을 그 양능이라 하고,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을 그 양지라 한다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人之所不慮知者 其良知也 - 孟子 盡心 上)”고 말하였다. 맹자의 이 말에서 본 다면 양지는 양능으로 인간이 타고나는 선천지(先天知)이다. ‘생각하지 않고도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직관적이고 직각적인 선천적 인식능력을 말한다. 왕양명은 이 “양지‘를 마음의 체로 하여 그 개념을 생성의 원리, 도덕성의 근거, 실천의 주체로 한층 고양시키고 양지의 완성을 곧 인간의 완성으로 보았다.
왕양명은 ‘양지’를 말함에 유교·불교·도교의 핵심 개념들을 다 포섭시키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천리, 시비지심, 진성측달(眞誠惻), 실리. 성(誠), 미발지중(이상 유), 昭明靈覺處 , 明師, 明鏡, 本來面目, 恒照者, 照心(이상 불), 太虛無形, 流行氣(이상 도) 등으로 요약 할 수 있다.
그리고 맹자에서 ‘양지’는 단순한 선천적 인식 능력이었는데, 왕양명에 와서 ‘양지’는 유 불 도 ‘三敎 합일’의 정점에 서게 된다. 왕영명은 삼교합일을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전습록 곳곳에서 자신의 ‘양지 심학’이 이들 삼교를 다 아우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양지는 심체로서 활동하는 능동자다. 곧 만물을 생출(生出)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物)이란 의지소재(意之所在)로서의 물이다. 양지에서 발하는 의가 어버이를 섬기는 효에 가 있다면 효가 물이고, 백성의 다스림에 가 있다면 그 다스림이 물이다. 그런데 의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 그러므로 의가 성스럽지 못하면 물 또한 성스럽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치양지의 필요성이 있다.
원래 양지는 불교의 진여심과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인욕의 가리움이 있어서 그 본래면목을 제대로 발양하기 어려울 수가 있다. 치이양지는 이 인욕의 가리움을 벗겨 내는 방법이다. 그리고 성찰극치(省察克治), 절사(絶四), 집의(集義)는 왕양명 치양지의 중요한 절목들이다.
자신을 반성하여 극기하는 것은 성찰극치요,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는 공자가 강조한 절사(絶四)로서 ‘毋’는 ‘無’와 같다.
사의가 없는 것이 무의고, 꼭 무엇을 해야 하겠다는 집착이 없는 것이 무필이며, 집체된 고집이 없는 것이 무고이고, 사기가 없는 것이 무아다. 의, 필, 고, 아의 네 가지 착에서 벗어나 는 것이 곧 공자의 절사다.
그리고 집의는 맹자의 수양론으로 호연지기를 배양하는 것이다. 주자는 이것을 선을 쌓는 적선이라고도 해석했다. 모두가 치양지의 중요한 방법들이다. 왕양명은 이러한 방법 외에도 ‘사상마련(事上磨鍊)’을 제창했다.
일하는 분상에서 심신을 연마하라는 것이다. 수양이 꼭 정좌나 독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사람이 활동하고 노동하고 일하는 그 가운데서 체험적으로 연마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양명의 이 사상마련은 아주 획기적인 것으로 농 공 상인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선비(士)가 아닌 농, 공, 상인들이 많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상 마련이야 말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철학의 표본이다. 이것이 지행합일이며, 바로 치양지다. 일 속에서 양지를 이루어라. 이 말은 자기의 주체를 잃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왕양명이 던지는 또 하나의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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