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소지왕의 영주나들이

강나루터 2016. 12. 14. 17:24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소지왕의 영주나들이
배용호(전 영주교육장, 소백산자락길 위원장)
[597호] 2016년 12월 12일 (월) 17:31:29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잡히고 말지요” [夫龍爲魚服 爲漁者所制] 고타군(古타郡: 안동)에 사는 한 노파가 잠행을 나선 소지왕(炤智王:재위 AD479~500)에게 던진 통쾌한 충고이다. 무려 1500년 전 신라 중엽의 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소지왕은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부모를 잘 섬겼을 뿐만 아니라 겸손과 공손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켜 모든 사람들이 감복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소지왕이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던 변방 순행을 위해 날이군(捺已郡: 영주)에 거동하였는데 이 고을 유력자인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자신의 딸, 벽화에게 비단옷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는 명주로 덮어 그에게 바쳤다.

 

소지왕은 파로가 음식을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열어보니 열여섯 살난 어린 소녀여서 괴이하게 여기고는 돌려보냈다. 그러나 왕궁에 돌아와서는 절세미인이었던 벽화 생각을 가누지 못해 이후 두세 차례 몰래 영주까지 미행을 나와 벽화를 침석에 들게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영주를 가기 위해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지금 백성들이 국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라고 물었더니, 노파가 이르기를 ‘많은 사람들은 성인(聖人)으로 여기지만, 제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의 어느 여자와 상관하러 미행한다고 하니, 무릇 용이 물고기의 옷을 입으면 어부에게 잡히고 마는 법이지요. 이렇듯 왕이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니 어찌 성인이라 하겠습니까?’ 왕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럽게 여겨 재위 22년 가을에 이미 자신의 아이를 가진 벽화를 몰래 왕궁으로 데려가 아들을 낳았다 한다.

 

왕실이나 평민들의 애정생활이 비교적 자유롭던 당시 신라사회이기에 국왕의 외도를 탓하기보다는 귀한 사람이 가볍게 돌아다님에 대한 충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승지위(萬乘之位: 전쟁에 전차 1만대를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지위)에 있는 소지왕이 늙은 시골 할멈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지역 토착세력인 파로와 벽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벽화낭자(碧花娘子)는 단번에 소지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의 경국지색으로 인물이 출중하여 어린 나이에도 신라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소지왕이 죽자, 벽화는 후일 법흥왕이 될 원종을 섬겼다. 결국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법흥왕의 총애를 받던 비량이라는 신하의 부인이 된다. 신라의 여인들은 이처럼 여러 남자를 거치며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신라사회에선 여자가 아이를 낳아도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즉 모계중심 사회였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영주는 죽령로의 길목에 위치하는 군사요충지였다. 당시 죽령로는 오늘날의 경주-영천-의성-안동-영주-죽령-단양-제천-원주-춘천에 해당하는데, 험하지만 신라와 고구려간 최단 교통로이다. 영주는 소지왕이 행차했던 AD500년경에는 신라 영토가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고구려 군사가 주둔했던 곳이었다.

 

소지왕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곳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곳이 신라의 통치 범위로 귀속되었음을 확인시키고자 영주에 행차했던 것 같다. 당시 신라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 채 각 지역의 토착지배세력을 이용한 간접 지배통치를 하였는데, 벽화의 아버지인 파로는 바로 이곳 영주의 토착지배세력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또「소지왕 11년 가을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고 겨울에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의 과현은 보름골(상망동)에서 지누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인 이 과현을 넘어왔다는 이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영주는 신라의 강역이었지만, 순흥은 백제의 강역이어서 마구령의 부석 쪽으로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과현 아랫마을 이름을 예나 지금이나 망동(望洞)이라 부르는 것은, 적의 동정을 살피는 망을 보는 동리라는 뜻이며 그 서쪽 마을 이름을 술골(戌谷 숙골)이라함은 곧 군사들의 주둔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소지왕은 영주까지는 겨우 손에 넣었지만 고구려 세력을 소백산맥 너머로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중에 군 이름에 구성(龜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영주의 중심부는 서천이 굽이쳐 흐르는 구산(龜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벽화의 집도 이 부근 어디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최초의 영주지(1625년)에 의하면 고을 이름이 「삼국시대 때 날이군(捺已郡)-내이군(奈已郡)-내령군(奈靈郡), 고려 때 강주군(康州郡)-순안군(順安郡)-지영주사(知榮州事)-구성(龜城), 조선 때 영천군(榮川郡)이 됐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