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창사연기설화와 불교 설화의 전승 양상 지명전설은 지명이 있는 한 어느 곳이든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전설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한 유래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지명 유래와 달리 사찰과
연관된 전설들은 내용이 제법 풍부하다. 이야기로서 구비문학성을 획득하고 있다.
현장에서 이야기판을 벌여가며 재미있게 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풍기의 대표적인
사찰이라 할 수 있는 희방사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창사연기 설화를 지니고 있다.
안동과 구미에서도 희방사 창사연기 설화가 수집된 바 있으며, 현지조사 때
풍기읍 성내리에서도 그 연기설화가 수집되었다. 지역성을 뛰어넘어 널리
전승되는 사찰연기 설화라 하겠다. 현지에서 수집된 자료를 요약해 본다.
신라때 두운도사라는 양반이 경주 불국사에서 지금 희방사 자리에 와가주고 움막을 지어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밤에 범이 찾아와서 목을 쓱! 내밀길래 들여다 보니 목에 비녀가 걸려 있어서, 호랑이 목구멍에 손을 집어 넣어 비녀를 빼주었다. 무사히 돌아간 호랑이가 열흘 뒤에 십 칠팔 세 되는 처녀를 업고 와서 움막 안에 들여다 밀어두고 갔다. 호랑이는 보은의 뜻으로 색시감을 데려온 셈이다. 도사는 백비탕을 끓여먹이며 놀라 까무라친 처녀를 정신차리게 하고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경주 유정승의 딸인데 밤에 변소에 갔다가 호랑이한테 물려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한 처녀를 데리고 경주 유정승댁을 찾아갔더니, 마침 무당을 불러 딸이 호식해 갔다고 굿을 하는 참이었다. 전후사정을 들은 처녀의 부모들은 딸을 살려준 은공으로 도사가 수도하던 곳에 절을 지어주었는데 그 절이 희방사였다.
안동과 구미 지역에서 수집된 자료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다른 고장에서는 주인공이 총각이라든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여 막연한데, 여기서는 두운도사라고 하여 구원자의 정체가 드러나 있으며, 처녀의 집도 다른 고장에서는 경주에 있다고만 되어 있는데, 풍기에서 수집된 설화에서는 유정승이라고 그 처녀의 집 신분과 성씨를 분명하게 밝혀 두고 있다. 유정승의 집에서는 호랑이가 물어갔다고 하여 무당을 불러 굿을 한다는 사실도 풍기에서 수집된 설화에서만 나타난다. 게다가 완성된 희방사의 정황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희방사에 들어가니 옛날 그 참말로 누가 법당도 참 멋지게 일곱 칸을 떡 지어놓고 또 산신각이라든가 요사채라든가 그걸 버젓하게 지어놨단 말이야.”
이 대목을 보면, 다른 고장에서는 “그래 먼 데서 절을 지 �어.” 또는 “그래 진(지은) 절이래.” 하고
단순하게 마무리된다. 희방사를 말만 듣고 그 전설의 기이함만을 기억하고 있는 다른 고장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로 전승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증거물과 가까운 지역에서 증거물을 목격하며 전승하는
이야기가 한층 내용이 생생하고 묘사가 실감나서 전설적 성격이 한층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그러한 가능성은 「영주영풍향토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때는 신라 선덕왕 12년(643) 소백산 연화봉 남쪽 기슭 깊숙한 골짜기에 한 젊은 도승이 초막을 얽고 혼자서 수도하고 있었다.
태백산 심원암(深遠庵)에서 옮겨온 두운 스님이다.” 고 하며 마치 역사를 기록하듯 그 때와 장소 및
주체를 분명히 밝혀 두었다. ‘희방사 연기설화’라는 제목으로 서술한 부분이지만, 향토지를
집필하기 위해 세밀한 자료조사를 근거로 서술한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도 현지에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구체성은 유정승의 이름과 직책이 “서라벌의 계림호장(鷄林戶長)
유석(兪碩)”으로 명명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희방사 전설을 들려준 권오봉 할아버지는
전설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물도
제시한다. “그 희방사 폭포 있는 데 거길 올라
가문 그 비석이 있는데, 내가 얘기하던대로
고래(그렇게) 새겨 있어.”라고 하며, 자신의
구연이 사실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비석은
“작년인강 제작년인강 이 비석을
엇따(어디다가) 처리를 했는지 요새는
안보이더만도....”하고 말끝을 흐렸다.
실제 상황이야 어떠했든 비문까지 들이대며
전설이 사실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처럼
현지에서 구전되는 희방사 창사연기전설은
전설적 증거력도 한층 높을뿐 아니라, 유다리 전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비가 많이
와서 장마가 지면 희방사에서 초와 소지 종이를 사러갈 수 없다고 하자, 유정승이 넓고 길쭉한 바위
세 개를 운반해 와서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 돌다리를 유정승이 놓았다고 해서
유다리라고 하는데, 부인이 소에 가서 큰 바위를 이고 왔다고 하여 전후 맥락이 다소 어긋지긴 하되,
희방사 관련 설화로서 함께 묶어서 다룰 만하다.
앞의 향토지에서는 유호장이 “서라벌에서도 일등 가는 공장(工匠)을 뽑아, 스님의 움막자리에 아담한 절을 이룩했으며, 통행의 편리를 위해 산문 밖 큰 시내에 무쇠기둥을 세워 다리를 놓았고 풍기 고을 서문박 냇물에도 돌을 다듬어 다리를 놓았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구전설화에는 한결같이 절의 창사 유래만 있고 절이름의 유래는 없는데, 여기서는 “기쁨을 얻은 자리라 하여 절이름을 희방사(喜方寺)라 하고, 산문밖 무쇠다리는 없어진지 오랬으나, 그 마을 이름이 지금도 무쇠다리, 행정동명으로는 수철동(水鐵洞)이며, 풍기 서문밖 돌다리는 지금도 유(兪)다리로 불리고 있다” 하였다. 이렇게 희방사 이름 유래 및 이와 관련된 이름의 유래를 정확하게 조사할 수 있었던 것은 「희방사유지(喜方寺遺志)」가 전하였던 까닭이다.
희방사 창사연기 설화는 다른 절의 경우와
달리 절을 지은 주체가 불교적 인물과 다소
거리가 멀다. 풍기 이웃 고장의 유명한
사찰들, 이를테면 영주 부석사나 소백산
비로사, 안동 봉정사 등은 으례 의상대사가
절을 지었다고 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서는 불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두운
도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만
「영주영풍향토지「에서는 두운대사(杜雲大師)
라 밝혀두고 있다. 그 도 부처님의 법력과
무관하게 호랑이 입에 손을 넣어 비녀를 빼준
도사의 담력이 강조된다. 다른 고장의 이야기
에서는 막연하게 어떤 총각이나 사람이 등장한다. 물론 절을 지은 것도 수도하던 주인공이 아니라,
자기 딸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유정승이 지어준 것이다. 어느 정도 불심있는 개인의
의지가 절을 짓게 한 것처럼 이야기된다. 사찰측 기록인 「희방사유지「와 달리 이야기를 전승하는
이들의 생각은 불교적 신앙심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탓이 아닌가 한다.
설화의 전승의도는 이야기꾼의 진술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권오봉 할아버지는 이야기 서두에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자신의 구연의도를 밝힌다. “인간 구제를 하면 덕이 안 돌아오고 짐승
구제를 하면 덕이 돌아온다고 그랬어.” 하면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인공의 불심을 주목
하기보다 동물을 구제했을 때 반드시 그 보답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방편으로 이 이야기를
구연한 것이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남의 은덕을 모른다는 비판을 통해서 배은망덕하기 쉬운
인간적인 삶의 한계에 일정한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사찰이름의 뜻에 관해서도 무관심하다.
그러나 사찰에서 전하는 「희방사유지「에는 두운대사의 불심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부석사와
용천사의 유래까지 기록해 두었는데, 한결같이 지극한 불심의 감통(感通)을 전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풍기의 한 암소가 부석사를 지을 때 불경을 실어나른 공덕으로 각간(角干) 집의 종으로 태어나, 지성으로 염불하여 육신으로 등공(騰空)하였다”고 할 뿐 아니라, 「삼국유사」에 전하는 욱면비(郁面婢) 설화까지 끌어들여 풍기 지역의 사찰연기설화로 기록하고 있다. 욱면비 설화는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와 관련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희방사유지「에서는 풍기 용천사 연기설화 구실을 하고 있다. 풍기 고을의 귀미각간(貴彌角干)은 일행들과 정사를 지어두고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기원하며 만일 기도에 들어갔는데, 집에서 종 노릇하는 욱면이라는 여종도 따라서 염불을 하였다. 귀미각간은 종의 신분에 불공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 온종일 해도 못다할 만큼의 벼를 찧도록 시켰다. 뜻밖에 두세 번 절구질에 두 섬의 벼가 다 찧어져, 다시 불당의 뜰 가운데서 두 손을 말뚝에 묶고 염불을 지성으로 하였다. 문득 공중에서 계시가 있어 욱면을 당에 오르게 하여 당에서 염불을 계속했는데, 하루는 욱면이 천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 신 한짝은 죽령 월말산(月末山)에 떨어뜨리고 한짝은 신장산(申藏山)에 떨어뜨려 각각
보리사를 지었는데, 귀미각간은 자기 집에서 도인이 났다 하여 천왕사(天王寺)라는 절을 짓고,
이 절을 뒤에 용천사(龍泉寺)라 했다. 지금 풍기 용천동에 있었다.
「희방사유지」에서는 이 두 설화를 기록해 두고서 희방사의 유적이 “이 두 가지뿐이 아닐지로대, 오랜 세월에 다 불타버려 자세한 자취를 상고할 길이 없으므로 「순흥구지(順興舊誌)」와 구전으로
흘러오는 이야기를 모아 추린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부석사와 용천사도 본디 희방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찰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사찰에서 전승되는 설화는 두 가지 경향성을 지닌다. 하나는
관련이 있을 만한 설화를 끌어들여 해당 사찰의 연기설화로 끌어다붙여 사찰의 종교적 의미를
강화하는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미천한 종도 지성으로 염불을 하고 수레를 끄는 소도 불공의
공덕이 있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서, 사찰측에서 전하는 설화답게 불법의 종교적 이치를
한층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경향이다.
부석사 창건설화는 풍기 여러 마을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다.
의상조사를 사모한 선묘룡에 얽힌 설화가 선묘각 및
부석(浮石)을 증거물삼아 부석사 창사연기전설로 이야기
되고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공부하러 갔을 때, 의상을
사모하던 선묘가 세간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의상과
헤어지게 되자, 용이 되어 의상이 탄 배를 따라 신라에
와서 의상을 도왔다는 내용이다. 선묘는 특히 부석사를
짓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의상이 지금의 부석사
자리에 큰 절을 짓고자 했는데, 도둑들이 절터를 점거하고
있으므로 절을 지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선묘가 도둑들이
겁을 집어먹도록 그들의 머리 위 하늘에 바위를 날아다니게
하여 쫓아버렸다. 도둑떼들이 달아나자 의상은 무사히
절을 지었는데, 돌이 하늘을 떠다녔다고 하여 절이름을
부석사라 하였다. 부석사 뒤에는 아직도 그 때 하늘을
떠다녔던 부석이 있고, 법당 밑에는 용이 화석으로 화해
있으며, 의상조사는 선묘룡의 뜻을 기리고자 선묘각을
지어두었다는 이야기이다.
부석사 창사연기 설화는 선묘룡이 지었다는 부석사 본전 외에도 세 가지 증거물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전승력과 증거력을 함께 확보하고 있다. 우선 선묘룡을
기리는 뜻에서 선묘각이 별도로 지어져 있을 뿐 아니라,
법당 밑에 선묘룡을 형상화 한 용의 조각이 있으며, 선묘룡이
도둑을 쫓기 위해 하늘을 날아다녔던 부석이 있다. 법당 밑의 조각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부석과
선묘각은 선묘룡의 신이한 존재를 상징하는 자연물과 인위적 구조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다소
떨어져 있는 부석사 전설이 가까이 있는 희방사 전설 못지 않게 풍기지역에서 널리 전승되는 까닭은
부석사 안에 전설과 관련된 증거물들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 아닌가 한다. 희방사에 가서는
사찰 외에 전설을 떠올릴 수 없으나, 부석사에 가서는 부석과 선묘각을 보게 됨으로써 부석과
선묘룡에 얽힌 전설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부석사라는 절 이름 자체가 창사 연기설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도 전승력을 확보한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다.
창사연기설화 외에도 불교설화들이 다수 전한다. 세간에서 전하는 불교 설화들은 사찰의 승려들이 전하는 설화들처럼 불교의 이치를 정교하게 꾸며내지 않고 있다. 다만 부처님은 영험이 있다든가, 중을 학대하면 벌을 받는다든가 하는 내용으로서, 종교설화 일반이 가지는 신이성을 드러내는 데 머문다. 이를테면 중을 학대하여 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로는 장자못 전설이 대표적이다. 풍기를 포함한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못 전설로 이야기된다. 스님이 시주한 며느리를 두고 뒤로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니 집터가 함몰되어 못이 생겼으며 며느리는 돌이 되었다는 내용은 장자못 전설의 전형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때 대사는 부처가 됐고 애기 업고 따라간 여자는 보살이 되었다는 대목에서 다소 변이를 보인다. 스님까지 부처가 됐다는 것이다. 이야기꾼은 “연못에 날이 청정하며는 대사 중이 부처님으로 보이고 보살이 아기 업고 가는 게 빈데이(보인다).” 하며 실제 사실임을 강조한다. 구두쇠 시아버지와 달리 시주를 한 착한 며느리조차 실수로 돌미륵이 되고 마는 장자못 전설의 비극성을 극복한 이야기이다. 스님을 부처로, 시주한 며느리를 보살로 만든 것은 사람이 불도를 닦으면 성불한다는 불심을 반영한 것으로서 다른 고장 이야기에 비하여 한층 불교적으로 변이되었다고 하겠다. 또다른 장자못 전설형 이야기도 지역성을 드러내고 있다.
중을 학대한 부자 아무개가 고승의 말을 듣고 바위를
깨뜨렸는데, 바위 속에서 피가 쏟아지며 학이 날아간
뒤로 집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장 못 전설과 증거물
에서 크게 변이를 보인다. 구체적인 증거물이 황지못
이나 장자못과 같은 연못이 아니라, 깨어진 바위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일 따름이나, 이 차이는 곧 세계관적
차이와 연결되어 있다. 학이 깃들어 있는 바위를
깨뜨림으로써 징벌을 받는데, 징벌의 계기는 고승이
마련해 주었지만 순전히 불교적 세계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바위는 학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피를 흘릴 정도로 살아 있는 존재로서 부자의
흥망성쇠에 구체적으로 힘을 미치고 있었던 신성한
생명체이다. 고승은 다만 바위의 이러한 생명력을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바위와 같은 자연의 생명성이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있다. 장자못 전설의 유형에
속하되, 앞의 황지못 전설에서는 스님과 며느리가 각각 부처와 보살이 됨으로써 한층 불교적 세계관을
강화한 이야기라면, 바위를 깨뜨린 뒤에 망하게 되었다는 뒤의 전설은 자연의 생명성을 신성스럽게
여기는 이야기이다. 같은 이야기가 풍기지역의 자연.지리적 토대와 불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두 갈래의
방향으로 변이를 일으키며 전승되고 있는 셈이다.
중을 학대한 결과 고승의 신통력으로 끔찍한 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불교의 신이성을 드러내지만, 보살이나 부처가 도와주어서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다른 방향에서 불교의 신이성을 드러낸다.
<오세암> 전설의 경우가 한 보기이다. 강원도 월정사 어느 암자에 수도하던 스님이 다섯 살짜리
상좌 아이를 두고 시주를 나갔다가 눈이 많이 와서 돌아가지 못하고 이듬해 봄에서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상좌 아이가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날마다 관세음보살이 와서
젖을 주었으므로 굶주리지 않고 살아났다고 해서 오세암(五歲庵)이라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부처의 영험성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강신배 할아버지는 평안남도에서 이주해온 까닭에 그쪽 지역에서 전하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칠불암> 전설이다. 중국 병사들이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데, 어린 아이 일곱 명이 다리를
동동 걷고서 찰방찰방 건너다니는 것을 보고서, 물이 옅은 줄 알고 건너다가 모두 빠져죽었다.
어린 아이들이 간 곳이 없자, 부처님의 행적이라 믿고 ‘칠불(七佛)의 은혜’를 생각하며 절을
세웠는데, 이 절이 칠불암이다. 강신배 할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남도 안주에 그런 전설이 있다고 있다.
암자 또는 사찰 외에도 돌부처에 얽힌 전설도 보인다. <귀 하나 없는 돌부처> 전설이다. 중들이 모인 자리에 귀가 한쪽 없는 중이 있어 화제가 되었는데, 자기를 만나려면 어느 빨래터로 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물 속에 귀가 하나 없는 돌부처가 있어서 건져다가 모셨다는 전설이다. 오세암 전설에서는 불심이 깊은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보살이 나타나서 도와준다는 내용으로서 불심을 강조한다면, 칠불암 전설에서는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부처가 나타나 나라를 구해준다는 호국불교의 기능을 드러내고 있으며, 귀하나 없는 돌부처 전설에서는 돌로 만든 생명없는 물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돌부처가 살아있는 생명 이상으로 영혼을 지니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편적인 전설들이지만, 불교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을 나타내 주는 설화들이라 하겠다.
이처럼 풍기지역에는 희방사를 비롯한 사찰이 많고 불교의 전통이 깊은 곳이므로, 다른 고장의 불교설화들도 이 고장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북에서 이주해온 분들의 경우는
강신배 할아버지처럼 이북에서 전승되는 불교설화들까지 전승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불교의
종교적 신이성을 드러내되, 장자못설화처럼 중의 학대를 통해 그것이 부정적으로 입증되는 경우는
증거물이 못이나 바위처럼 자연물 전설로 전승되는데, 오세암이나 칠불암 전설처럼 부처나 보살의
신이한 행적을 통해 그것이 긍정적으로 입증되는 경우는 사찰이나 암자, 부처와 같이 불교유적 및
관련 문화재를 중심으로 전설이 형성 전승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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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소촌의 마당
글쓴이 : 소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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