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스크랩] 풍기지역 구비문학의 전승 양상과 지역적 성격 3

강나루터 2017. 4. 18. 04:58
4. 창사연기설화와 불교 설화의 전승 양상

지명전설은 지명이 있는 한 어느 곳이든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전설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한 유래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지명 유래와 달리 사찰과
연관된 전설들은 내용이 제법 풍부하다. 이야기로서 구비문학성을 획득하고 있다.
 현장에서 이야기판을 벌여가며 재미있게 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풍기의 대표적인
 사찰이라 할 수 있는 희방사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창사연기 설화를 지니고 있다.
안동과 구미에서도 희방사 창사연기 설화가 수집된 바 있으며, 현지조사 때
풍기읍 성내리에서도 그 연기설화가 수집되었다. 지역성을 뛰어넘어 널리
전승되는 사찰연기 설화라 하겠다. 현지에서 수집된 자료를 요약해 본다.

▲ 희방사 창건설화의 두운조사 영정
신라때 두운도사라는 양반이 경주 불국사에서 지금 희방사 자리에 와가주고 움막을 지어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밤에 범이 찾아와서 목을 쓱! 내밀길래 들여다 보니 목에 비녀가 걸려 있어서, 호랑이 목구멍에 손을 집어 넣어 비녀를 빼주었다. 무사히 돌아간 호랑이가 열흘 뒤에 십 칠팔 세 되는 처녀를 업고 와서 움막 안에 들여다 밀어두고 갔다. 호랑이는 보은의 뜻으로 색시감을 데려온 셈이다. 도사는 백비탕을 끓여먹이며 놀라 까무라친 처녀를 정신차리게 하고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경주 유정승의 딸인데 밤에 변소에 갔다가 호랑이한테 물려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한 처녀를 데리고 경주 유정승댁을 찾아갔더니, 마침 무당을 불러 딸이 호식해 갔다고 굿을 하는 참이었다. 전후사정을 들은 처녀의 부모들은 딸을 살려준 은공으로 도사가 수도하던 곳에 절을 지어주었는데 그 절이 희방사였다.

안동과 구미 지역에서 수집된 자료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다른 고장에서는 주인공이 총각이라든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여 막연한데, 여기서는 두운도사라고 하여 구원자의 정체가 드러나 있으며, 처녀의 집도 다른 고장에서는 경주에 있다고만 되어 있는데, 풍기에서 수집된 설화에서는 유정승이라고 그 처녀의 집 신분과 성씨를 분명하게 밝혀 두고 있다. 유정승의 집에서는 호랑이가 물어갔다고 하여 무당을 불러 굿을 한다는 사실도 풍기에서 수집된 설화에서만 나타난다. 게다가 완성된 희방사의 정황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희방사에 들어가니 옛날 그 참말로 누가 법당도
참 멋지게 일곱 칸을 떡 지어놓고 또 산신각이라든가 요사채라든가 그걸 버젓하게 지어놨단 말이야.”
 이 대목을 보면, 다른 고장에서는 “그래 먼 데서 절을 지 �어.” 또는 “그래 진(지은) 절이래.” 하고
단순하게 마무리된다. 희방사를 말만 듣고 그 전설의 기이함만을 기억하고 있는 다른 고장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로 전승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증거물과 가까운 지역에서 증거물을 목격하며 전승하는
이야기가 한층 내용이 생생하고 묘사가 실감나서 전설적 성격이 한층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그러한 가능성은 「영주영풍향토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때는 신라 선덕왕 12년(643)
소백산 연화봉 남쪽 기슭 깊숙한 골짜기에 한 젊은 도승이 초막을 얽고 혼자서 수도하고 있었다.
태백산 심원암(深遠庵)에서 옮겨온 두운 스님이다.” 고 하며 마치 역사를 기록하듯 그 때와 장소 및
주체를 분명히 밝혀 두었다. ‘희방사 연기설화’라는 제목으로 서술한 부분이지만, 향토지를
집필하기 위해 세밀한 자료조사를 근거로 서술한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도 현지에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구체성은 유정승의 이름과 직책이 “서라벌의 계림호장(鷄林戶長)
 유석(兪碩)”으로 명명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희 방 사
희방사 전설을 들려준 권오봉 할아버지는
전설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물도
 제시한다. “그 희방사 폭포 있는 데 거길 올라
가문 그 비석이 있는데, 내가 얘기하던대로
고래(그렇게) 새겨 있어.”라고 하며, 자신의
구연이 사실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비석은
“작년인강 제작년인강 이 비석을
엇따(어디다가) 처리를 했는지 요새는
안보이더만도....”하고 말끝을 흐렸다.
실제 상황이야 어떠했든 비문까지 들이대며
 전설이 사실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처럼
현지에서 구전되는 희방사 창사연기전설은
전설적 증거력도 한층 높을뿐 아니라, 유다리 전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비가 많이
와서 장마가 지면 희방사에서 초와 소지 종이를 사러갈 수 없다고 하자, 유정승이 넓고 길쭉한 바위
세 개를 운반해 와서 다리를 놓아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 돌다리를 유정승이 놓았다고 해서
유다리라고 하는데, 부인이 소에 가서 큰 바위를 이고 왔다고 하여 전후 맥락이 다소 어긋지긴 하되,
희방사 관련 설화로서 함께 묶어서 다룰 만하다.

▲ 복원된 유다리
앞의 향토지에서는 유호장이 “서라벌에서도 일등 가는 공장(工匠)을 뽑아, 스님의 움막자리에 아담한 절을 이룩했으며, 통행의 편리를 위해 산문 밖 큰 시내에 무쇠기둥을 세워 다리를 놓았고 풍기 고을 서문박 냇물에도 돌을 다듬어 다리를 놓았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구전설화에는 한결같이 절의 창사 유래만 있고 절이름의 유래는 없는데, 여기서는 “기쁨을 얻은 자리라 하여 절이름을 희방사(喜方寺)라 하고, 산문밖 무쇠다리는 없어진지 오랬으나, 그 마을 이름이 지금도 무쇠다리, 행정동명으로는 수철동(水鐵洞)이며, 풍기 서문밖 돌다리는 지금도 유(兪)다리로 불리고 있다” 하였다. 이렇게 희방사 이름 유래 및 이와 관련된 이름의 유래를 정확하게 조사할 수 있었던 것은 「희방사유지(喜方寺遺志)」가 전하였던 까닭이다.

▲ 희 방 사
희방사 창사연기 설화는 다른 절의 경우와
 달리 절을 지은 주체가 불교적 인물과 다소
거리가 멀다. 풍기 이웃 고장의 유명한
사찰들, 이를테면 영주 부석사나 소백산
비로사, 안동 봉정사 등은 으례 의상대사가
 절을 지었다고 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서는 불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두운
도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만
「영주영풍향토지「에서는 두운대사(杜雲大師)
라 밝혀두고 있다. 그 도 부처님의 법력과
 무관하게 호랑이 입에 손을 넣어 비녀를 빼준
도사의 담력이 강조된다. 다른 고장의 이야기
에서는 막연하게 어떤 총각이나 사람이 등장한다. 물론 절을 지은 것도 수도하던 주인공이 아니라,
자기 딸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유정승이 지어준 것이다. 어느 정도 불심있는 개인의
의지가 절을 짓게 한 것처럼 이야기된다. 사찰측 기록인 「희방사유지「와 달리 이야기를 전승하는
 이들의 생각은 불교적 신앙심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탓이 아닌가 한다.

설화의 전승의도는 이야기꾼의 진술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권오봉 할아버지는 이야기 서두에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자신의 구연의도를 밝힌다. “인간 구제를 하면 덕이 안 돌아오고 짐승
 구제를 하면 덕이 돌아온다고 그랬어.” 하면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인공의 불심을 주목
하기보다 동물을 구제했을 때 반드시 그 보답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방편으로 이 이야기를
구연한 것이다. 인간은 짐승보다도 남의 은덕을 모른다는 비판을 통해서 배은망덕하기 쉬운
인간적인 삶의 한계에 일정한 교훈을 주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사찰이름의 뜻에 관해서도 무관심하다.
 그러나 사찰에서 전하는 「희방사유지「에는 두운대사의 불심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부석사와
용천사의 유래까지 기록해 두었는데, 한결같이 지극한 불심의 감통(感通)을 전하고자 하였다.

▲부 석 사
이를테면 “풍기의 한 암소가 부석사를 지을 때 불경을 실어나른 공덕으로 각간(角干) 집의 종으로 태어나, 지성으로 염불하여 육신으로 등공(騰空)하였다”고 할 뿐 아니라, 「삼국유사」에 전하는 욱면비(郁面婢) 설화까지 끌어들여 풍기 지역의 사찰연기설화로 기록하고 있다. 욱면비 설화는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와 관련되어 기록되어 있는데, 「희방사유지「에서는 풍기 용천사 연기설화 구실을 하고 있다. 풍기 고을의 귀미각간(貴彌角干)은 일행들과 정사를 지어두고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기원하며 만일 기도에 들어갔는데, 집에서 종 노릇하는 욱면이라는 여종도 따라서 염불을 하였다. 귀미각간은 종의 신분에 불공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 온종일 해도 못다할 만큼의 벼를 찧도록 시켰다. 뜻밖에 두세 번 절구질에 두 섬의 벼가 다 찧어져, 다시 불당의 뜰 가운데서 두 손을 말뚝에 묶고 염불을 지성으로 하였다. 문득 공중에서 계시가 있어 욱면을 당에 오르게 하여 당에서 염불을 계속했는데, 하루는 욱면이 천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 신 한짝은 죽령 월말산(月末山)에 떨어뜨리고 한짝은 신장산(申藏山)에 떨어뜨려 각각
보리사를 지었는데, 귀미각간은 자기 집에서 도인이 났다 하여 천왕사(天王寺)라는 절을 짓고,
이 절을 뒤에 용천사(龍泉寺)라 했다. 지금 풍기 용천동에 있었다.

「희방사유지」에서는 이 두 설화를 기록해 두고서 희방사의 유적이 “이 두 가지뿐이 아닐지로대,
오랜 세월에 다 불타버려 자세한 자취를 상고할 길이 없으므로 「순흥구지(順興舊誌)」와 구전으로
흘러오는 이야기를 모아 추린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부석사와 용천사도 본디 희방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찰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사찰에서 전승되는 설화는 두 가지 경향성을 지닌다. 하나는
관련이 있을 만한 설화를 끌어들여 해당 사찰의 연기설화로 끌어다붙여 사찰의 종교적 의미를
강화하는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미천한 종도 지성으로 염불을 하고 수레를 끄는 소도 불공의
공덕이 있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서, 사찰측에서 전하는 설화답게 불법의 종교적 이치를
한층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경향이다.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부석사 창건설화는 풍기 여러 마을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다.
 의상조사를 사모한 선묘룡에 얽힌 설화가 선묘각 및
부석(浮石)을 증거물삼아 부석사 창사연기전설로 이야기
되고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공부하러 갔을 때, 의상을
사모하던 선묘가 세간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의상과
 헤어지게 되자, 용이 되어 의상이 탄 배를 따라 신라에
와서 의상을 도왔다는 내용이다. 선묘는 특히 부석사를
짓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의상이 지금의 부석사
자리에 큰 절을 짓고자 했는데, 도둑들이 절터를 점거하고
있으므로 절을 지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선묘가 도둑들이
겁을 집어먹도록 그들의 머리 위 하늘에 바위를 날아다니게
 하여 쫓아버렸다. 도둑떼들이 달아나자 의상은 무사히
절을 지었는데, 돌이 하늘을 떠다녔다고 하여 절이름을
부석사라 하였다. 부석사 뒤에는 아직도 그 때 하늘을
떠다녔던 부석이 있고, 법당 밑에는 용이 화석으로 화해
있으며, 의상조사는 선묘룡의 뜻을 기리고자 선묘각을
 지어두었다는 이야기이다.

부석사 창사연기 설화는 선묘룡이 지었다는 부석사 본전
외에도 세 가지 증거물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전승력과 증거력을 함께 확보하고 있다. 우선 선묘룡을
기리는 뜻에서 선묘각이 별도로 지어져 있을 뿐 아니라,
법당 밑에 선묘룡을 형상화 한 용의 조각이 있으며, 선묘룡이
 도둑을 쫓기 위해 하늘을 날아다녔던 부석이 있다. 법당 밑의 조각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부석과
선묘각은 선묘룡의 신이한 존재를 상징하는 자연물과 인위적 구조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다소
떨어져 있는 부석사 전설이 가까이 있는 희방사 전설 못지 않게 풍기지역에서 널리 전승되는 까닭은
 부석사 안에 전설과 관련된 증거물들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 아닌가 한다. 희방사에 가서는
사찰 외에 전설을 떠올릴 수 없으나, 부석사에 가서는 부석과 선묘각을 보게 됨으로써 부석과
선묘룡에 얽힌 전설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부석사라는 절 이름 자체가 창사 연기설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것도 전승력을 확보한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다.

▲ 의상조사 영정
창사연기설화 외에도 불교설화들이 다수 전한다. 세간에서 전하는 불교 설화들은 사찰의 승려들이 전하는 설화들처럼 불교의 이치를 정교하게 꾸며내지 않고 있다. 다만 부처님은 영험이 있다든가, 중을 학대하면 벌을 받는다든가 하는 내용으로서, 종교설화 일반이 가지는 신이성을 드러내는 데 머문다. 이를테면 중을 학대하여 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로는 장자못 전설이 대표적이다. 풍기를 포함한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는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황지못 전설로 이야기된다. 스님이 시주한 며느리를 두고 뒤로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니 집터가 함몰되어 못이 생겼으며 며느리는 돌이 되었다는 내용은 장자못 전설의 전형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때 대사는 부처가 됐고 애기 업고 따라간 여자는 보살이 되었다는 대목에서 다소 변이를 보인다. 스님까지 부처가 됐다는 것이다. 이야기꾼은 “연못에 날이 청정하며는 대사 중이 부처님으로 보이고 보살이 아기 업고 가는 게 빈데이(보인다).” 하며 실제 사실임을 강조한다. 구두쇠 시아버지와 달리 시주를 한 착한 며느리조차 실수로 돌미륵이 되고 마는 장자못 전설의 비극성을 극복한 이야기이다. 스님을 부처로, 시주한 며느리를 보살로 만든 것은 사람이 불도를 닦으면 성불한다는 불심을 반영한 것으로서 다른 고장 이야기에 비하여 한층 불교적으로 변이되었다고
하겠다. 또다른 장자못 전설형 이야기도 지역성을 드러내고 있다.

중을 학대한 부자 아무개가 고승의 말을 듣고 바위를
 깨뜨렸는데, 바위 속에서 피가 쏟아지며 학이 날아간
 뒤로 집이 망했다는 이야기는 장 못 전설과 증거물
에서 크게 변이를 보인다. 구체적인 증거물이 황지못
이나 장자못과 같은 연못이 아니라, 깨어진 바위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일 따름이나, 이 차이는 곧 세계관적
차이와 연결되어 있다. 학이 깃들어 있는 바위를
깨뜨림으로써 징벌을 받는데, 징벌의 계기는 고승이
마련해 주었지만 순전히 불교적 세계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바위는 학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피를 흘릴 정도로 살아 있는 존재로서 부자의
흥망성쇠에 구체적으로 힘을 미치고 있었던 신성한
생명체이다. 고승은 다만 바위의 이러한 생명력을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바위와 같은 자연의 생명성이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갈무리하고 있다. 장자못 전설의 유형에
속하되, 앞의 황지못 전설에서는 스님과 며느리가 각각 부처와 보살이 됨으로써 한층 불교적 세계관을
 강화한 이야기라면, 바위를 깨뜨린 뒤에 망하게 되었다는 뒤의 전설은 자연의 생명성을 신성스럽게
여기는 이야기이다. 같은 이야기가 풍기지역의 자연.지리적 토대와 불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두 갈래의
 방향으로 변이를 일으키며 전승되고 있는 셈이다.

중을 학대한 결과 고승의 신통력으로 끔찍한 징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불교의 신이성을 드러내지만,
보살이나 부처가 도와주어서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다른 방향에서 불교의 신이성을 드러낸다.
<오세암> 전설의 경우가 한 보기이다. 강원도 월정사 어느 암자에 수도하던 스님이 다섯 살짜리
상좌 아이를 두고 시주를 나갔다가 눈이 많이 와서 돌아가지 못하고 이듬해 봄에서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상좌 아이가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날마다 관세음보살이 와서
젖을 주었으므로 굶주리지 않고 살아났다고 해서 오세암(五歲庵)이라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부처의 영험성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강신배 할아버지는 평안남도에서 이주해온 까닭에 그쪽 지역에서 전하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칠불암> 전설이다. 중국 병사들이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데, 어린 아이 일곱 명이 다리를
 동동 걷고서 찰방찰방 건너다니는 것을 보고서, 물이 옅은 줄 알고 건너다가 모두 빠져죽었다.
 어린 아이들이 간 곳이 없자, 부처님의 행적이라 믿고 ‘칠불(七佛)의 은혜’를 생각하며 절을
세웠는데, 이 절이 칠불암이다. 강신배 할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남도 안주에 그런 전설이 있다고 있다.

암자 또는 사찰 외에도 돌부처에 얽힌 전설도 보인다. <귀 하나 없는 돌부처> 전설이다. 중들이 모인 자리에 귀가 한쪽 없는 중이 있어 화제가 되었는데, 자기를 만나려면 어느 빨래터로 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물 속에 귀가 하나 없는 돌부처가 있어서 건져다가 모셨다는 전설이다. 오세암 전설에서는 불심이 깊은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보살이 나타나서 도와준다는 내용으로서 불심을 강조한다면, 칠불암 전설에서는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부처가 나타나 나라를 구해준다는 호국불교의 기능을 드러내고 있으며, 귀하나 없는 돌부처 전설에서는 돌로 만든 생명없는 물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돌부처가 살아있는 생명 이상으로 영혼을 지니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편적인 전설들이지만, 불교에 대한 다양한 인식들을 나타내 주는 설화들이라 하겠다.

이처럼 풍기지역에는 희방사를 비롯한 사찰이 많고 불교의 전통이 깊은 곳이므로, 다른 고장의
불교설화들도 이 고장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북에서 이주해온 분들의 경우는
 강신배 할아버지처럼 이북에서 전승되는 불교설화들까지 전승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불교의
 종교적 신이성을 드러내되, 장자못설화처럼 중의 학대를 통해 그것이 부정적으로 입증되는 경우는
 증거물이 못이나 바위처럼 자연물 전설로 전승되는데, 오세암이나 칠불암 전설처럼 부처나 보살의
 신이한 행적을 통해 그것이 긍정적으로 입증되는 경우는 사찰이나 암자, 부처와 같이 불교유적 및
 관련 문화재를 중심으로 전설이 형성 전승된다는 사실이다.

5. 호랑이 출현의 현실성과 그 전설적 초월성

소백산 일대에 호랑이 출몰이 잦았던 까닭에 호랑이를 직접 목격한 당사자의 경험적 증언 외에도 호랑이를 겪은 이야기는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호랑이 설화는 소백산과 같은 큰 산을 끼고 사는 사람들의 또다른 경험이 빚어낸 문화적 생산물이다. 설화 속에 나타난 호랑이에 관한 인식은 다양하다. 그만큼 호랑이의 출몰을 폭 넓게 경험하고 살아온 까닭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인식은 호랑이가 단순하게 사람을 해치는 맹수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맹수로서 호랑이는 항상 두렵기만 하다. 사람들의 혼을 빼놓는다. 이인배 어른이 삼촌을 따라 달밭골에 더덕을 캐러 갔다가 호랑이를 보고 혼이 난 경험을
생생하게 이야기 했다. 특히 조사자들 일행과 함께 이야기판에 끼어 있었던 이종서군은 그의
아들이므로 아들에게 호랑이를 본 목격담을 들려주고자 했다. 삼촌하고 절골(달밭골)에 더덕
캐러 갔다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호랑이를 보았는데 눈앞이 노래졌다고 하면서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갑자기 하늘이고 땅이고 전부 노래지는
거여. ‘내 눈이 이상하나’ 하고 닦아가지고
 봐도 그렇고, 하늘의 해를 쳐다보이께
일식할 때 해를 보면 돈짝 같은게 색깔이
연해지면서 안개 낀 거 �에. 바위고 뭐고
 새까만게 아이고 전부 노래. 이상하다
이거여. 눈을 아무리 닦아도 노래.
그래가지고 소리를 지를라 그러이께 말이
 안나와. 입이 안떨어지는 거여. 근데 너
작은 할아버지가 ‘야야 가자!’ 이거여. 그래서 ‘이상하다고. 앞이 안보이고 노랗고 이상하다’ 그러이
 ‘아이 그럴 때가 있으이께 가자.’ 이거여. 이래가주고 더덕이고 뭐고 다 내버려 버리고 내려오다가
도솔봉 능선을 딱 올라서이께 여기 전구동이 보이잖애. 보이니께 기분이 동지섣달에 대개 추울 때
한데서 얼다가 방에 딱 들어오면 몸이 훈훈하게 그러지 왜. 그런 뜨신 바람이 확 느껴지면서 몸이
확 풀리는거여. 그래 중간에 한참도 못쉬고 계속 집까지 왔는 거여. 이야기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아서는 호랑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하늘이 노랗고 땅이 노래졌다는 것이다.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보이므로 눈을 비벼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호랑이 앞에서 제대로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셈이다. 다음에는 말을 잃어 버렸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몸에 한기를 느껴서 오싹했다는 것이다. 마치 동지섣달의 추위를 느꼈다는 것이다. 마을이
 눈에 들어오자 마침내 온 몸이 확 풀렸다고 하는 걸 보면 무서움으로 온 몸이 얼어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시력과 언어 능력을 상실하고 계절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가장 중요한
 신체적 기능과 정신적 판단력을 두루 상실할 정도로 얼이 빠져버린 셈이다. 호랑이의 공포가
가히 어느 정도였던가 짐작할 만하다.

한결같이 호랑이에 관한 공포가 여러 모로 배어 있다. 배동한 할아버지도 호랑이를 직접
목격했다며 실화를 들려 주었다. 봄에 고사리를 뜯어 장에 갖다 팔고서 장보기를 하여 짊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이 일년에 한둘 다닐까 말까 한 재를 넘어오다가 바위 밑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 호랑이였다. 호랑이의 눈에서 나오는 푸른 불빛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나중에 깨어보니 무사했다고 한다. 이 분의 진술로 봐서는 호랑이를 목격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호랑이에 대한 공포심에 지레 겁을 먹고 쓰러졌다가 깨어난 것이 아닌가 한다. 만일 호랑이가
틀림없는데도 해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해칠 수 있는데도 해치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호랑이든 아니든
공포감으로 정신을 잃게 한 것은 호랑이임에 틀림없다.

호랑이를 경험한 실화 가운데에는 여성들의
경우도 있다. 백신 2리의 박이래 할머니는
집에서 자다가 호랑이를 만났다고 한다.
집에 남자들은 다 어디 가고 친정 올케하고
 자는데, 문 밖에 쿵쿵쿵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올케한테 산짐승이 왔다는 말도
 못하고 숨도 못쉬고 아침까지 밤을
새었다고 한다. 아침에 밖에 나가 보니
호랑이 발자욱이 있고 털이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호래이 터래기래. 큰 호래이가
문앞에 와서 쿵쿵 두드리고 또 부엌에
들어가서 이래 나뭇단에 누워 잠자기도
하고, 옛날엔 그래 호래이가 많었다구.
” 했다. 방안에 있어도 옆에 누워 있는 올캐에게 말 한마디 못할 정도로 가위 눌려 있었다. 숨도
제대로 못쉬었다고 하니 짐작이 간다. 몇 사람을 대상으로 한 현지조사 가운데 세 사람이 직접
호랑이를 본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과거에 소백산 일대에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음이 틀림없다.
자연히 간접 경험한 이야기도 풍부할 수밖에 없다.

직접 경험한 사람의 증언은 아니지만 실화라고 하는 호랑이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많다.
금계 1리의 윤영기 할아버지는 힘센 장사 원건달이 이야기를 했다. 노름꾼들이 원건달의
눈을 피해서 숯굴에 들어앉아 숨어서 놀음을 하고 있었다. 원건달이라는 장사가 노름꾼들이
어디서 노름을 하는가 하고 밤중에 산중을 헤매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얼른 몸을 날려 피하자,
호랑이는 숯굴 입구에 가마니를 쳐두고 노름을 하고 있는 숯굴을 덮쳤다. 노름꾼들이 혼비
백산해서 달아나고 호랑이도 가 버린 뒤에 원건달은 숯굴로 들어가서 노름돈을 몽땅 가져와서
 떼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담력이 센 사람들은 호랑이를 겁내지 않을 뿐더러 호랑이를 피할
역량도 지녔다고 이야기한다. 스스로 겪은 사정을 이야기하는 경험담과는 달리 호랑이를
겁내지 않고 오히려 호랑이 덕에 이익을 취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직접 경험의 한계가
 
간접 경험에서 확대되는 것이다.

금계 2리의 이정수 할머니는 우금 황씨 문중 제실에 호랑이가 내려와서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황씨 문중에서 산기슭에 지어 놓은 재실에 올라가 조상 제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범이 나타나서 제사도 못지내고 그냥 내려왔다는 것이다. 뭔가 부정이 타서 산신령이 나타났다고 했다. 이들은 호랑이를 한갓 무서운 산짐승으로 보는 데서 만족하지 않는다. 산신령과 같은 신이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범이 나타날 때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범이 나타나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는 사실은 제사 준비과정에서 무엇인가 부정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령한 존재로 범이 부각되면서, 인간의 의지는 범의 위력 앞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호랑이는 마치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염라대왕처럼 군림하게 된다. 금계 1리의 윤영기 할아버지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잘 드러내 준다. 일정때 어느 사람이
제천에서 트럭을 운전하고 박달재를 넘어 충주를 가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를 지나치고
고개를 넘어오는데, 웬 청년이 박달재를 향해 걸어 올라왔다. 걱정이 되어서 행방을 물으니
박달재를 넘어 제천을 간다고 하였다. 박달재에 호랑이가 있으므로 오늘 자기 차를 타고 충주에
가서 자고 내일 제천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였으나, ‘웬 호랑이’ 하면서 막무가내였다. 다음날
아침에 제천을 돌아가면서 박달재 그 자리에 가보니 청년이 호식을 당하고 신만 남아 있었다.
“호라이 밥이 될라고 한번 덮어 씌이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청년이 기어코 고개를 넘다가
 호랑이 밥이 되고 만 것은 운명적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때 호랑이 신령이 그 청년에게 덮어
씌었다고도 할 수 있고, 타고 날 때부터 그런 운명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번연히 알고도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호랑이 초월성을 입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날 때부터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을 두고 흔히 ‘호식할 팔자’
라고들 한다. 호식할 팔자를 타고 난
사람은 호랑이 밥이 될 수밖에 없다.
운명에 정해져 있다. 이를테면 밤에 똥이
 마렵다고 변소에 갔다 와서는 마루에
쭈구리고 앉아서 처마의 서까래를
치세고 내리세고 있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방 안에서
 ‘뭘 하느냐, 빨리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
오지 않고 서까래를 헤아리다 범에게
물려갔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로 어느 새댁이 밤에 누군가 부른다며 자꾸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다가 마침내 변소 간다고 나가서는 신발을 거꾸로 신었다가 바로 신었다가 하다가
범에 물려갔다고도 한다. 호 당한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 마치 범에 물려 갈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거의 운명적으로 호식당한 셈이다. 더 적극적으로 호식당하는 일을 팔자 소관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절터 부근에 장정 다섯이가 놀다가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잤는데,
밤에 범이 나타나서 문 앞에 누워있는 사람을 두고서 방 가운데에 누어 자는 사람을 물고
갔다고 한다. “두 사람이나 건너서 가운데 자는 사람을 물고 갔으므로 팔자 소관이라는 것이다.
” 금계 1리의 차이준 할아버지가 호식할 팔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떤 사람이 산중에서 한 십여 명 같이 자는데, 호랑이가 문밖에 와서 야단을 지기자 호식할
사람을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각자 자기 속적삼을 벗어서 문밖으로
내던져 보기로 했다. 여러 사람들이 적삼을 내던져도 본체만체 하던 호랑이가 마지막 사람이
적삼을 던지자 으르렁거리면서 넝큼 받아서 물어뜯었다. 할 수 없이 이 사람이 나가자 호랑이가
 낚아채서 달아났다. “호식하는 사람 따로 팔자가 있다구.” 사람들은 호식할 팔자를 인정한다.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이 호랑이의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에는 호식할
팔자를 타고 난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호식할 팔자로 지목된 사람도
 이를 승복한다. 그래서 이 결정에 저항하지 않고 나가서 스스로 희생을 감수한다. 이런 설화들을
보면 호랑이는 단순히 인명을 해치는 맹수로 간주되지 않는다. 사람을 한갓 먹이로 삼지 않는
까닭이다. 자연히 아무나 해치지 않는다. 그럴 만한 사람을 골라서 해친다. 실제로 호랑이를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을 가려서
해치기도 하고 해치지 않기도 하는 것은 곧 선악에 대한 징벌일 수도 있다. 앞에서 황씨 제실에
호랑이가 나타난 이야기는 호랑이가 부정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호랑이는
선악을 판단할 뿐 아니라, 부정스러움과 정결함을 가려내는 신격으로 섬겨진다. 산신령이라
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신령한 존재로서, 부정한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 나타나서 위협을
주며 부정을 경계하기도 한다.

도솔봉에 약수가 있어 정성을 드리고 약수를 마시면 무슨 병이든 고칠 수 있을 정도로 효험이 있었다. 그 약수 가에 한 할머니가 움막을 짓고 기도를 들이며 살았는데 가끔 호랑이가 약수 가에 나타나 앉아 있으므로 약수를 마실 수 없었다. 정성이 지극한 사람이 가면 나타나질 않았다. 그 할머니 아들이 하나 있어서 약수터에 자주 드나들다가, 문둥병 걸린 처녀를 약수터에서 만났는데 서로 눈이 맞아 몸을 섞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 호랑이가 계속 약수터에 나타났다. 할머니가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 이후부터 호랑이 때문에 약수를 이용할 수 없었다.

권기순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실화라고 했다.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지금 그 약수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궁굼해 할 정도였다. 약수의 효험은 수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성을 드리고 마셔야 한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약수의 효험은 약수를 마시는 사람의 정성에 있다. 그러한 정성을 헤아리는 구체적인 신격이 호랑이다. 호랑이는 단순히 약수터를 지키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의 정성을
가늠하는 신격이다. 부정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성을 기울이기보다 육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있는 한 약수터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 이상 약수터가 부정으로 오염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나타난 것이 호랑이다. 호랑이는 악한 사람을 퇴치하고 선한 사람을
구해주며 세상의 부정을 막아주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산신령으로 섬겨지며
믿음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리고 사람의 앞일까지 내다보는 예언력도 지녔다. 사람이 위기에 처할 줄을 알고 길을 가로막고
 가지 못하게 해서 살려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탄광에서 일하던 사람이 저녁을 먹고 교대를
하기 위해 탄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다. 그래서 호랑이를 피해 다른 길로 가려고
하자 다시 그 앞을 막아섰다. 다른 쪽으로 가도 계속해서 앞길을 가로 막았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해서 물러나다가 집으로 도망쳐 왔다. 그날 저녁에 탄광이 무너져 몇 사람이 죽었다.
이 사람은 호랑이 덕에 목숨을 구했다. 호랑이가 탄광이 무너질 줄 알고 이 사람을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호 이의 이러한 신통력은 사람의 행실까지 꿰뚫어 보고 그 선악을 평가하기까지
한다. 호랑이를 초월적 존재로 믿는 인간적 기대의 결과라 하겠다.




2008.7

출처 : 소촌의 마당
글쓴이 : 소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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