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세상

오세창과 연보

강나루터 2017. 1. 30. 08:09


   위창의 글씨는 전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수(眉수) 허목(許穆, 1595-1682)등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전서를 통해 일가를 이룬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창 만큼 갑골문이나 종정금문(鐘鼎金文), 소전(小篆), 고쇄(古鎖)나 印篆(印篆), 와전(瓦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작품으로 소화해 낸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서전문'작가로서 위창의 배경은 물론 아버지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다. 한어역관(漢語譯官)으로 중국을 13차례나 내왕을 하면서, 당시 중국에서 무르익은 금석학(金石學) 관계자료를 방대하게 수집해 왔기 때문이다.
『천죽재차록(千竹齋箚錄)』에 의하면 역매가 중국에서 元·明이래 서화 100여 점과 3代(하·은·주)와 진(秦)·한의 금석과 진(晉)·당의 비판(碑版)을 사들인 것이 수 백 종이 넘는다고 밝혀져 있다.
실제 역매는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의 저자로서 청의 금석·고증학(考證學)을 조선에서 꽃피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맥을 잇고 있는 금석학자이다.
이런 이유로 추사가 서한예서(西漢隸書)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꽃 피웠다면, 그 맥을 잇고 있는 위창 글씨의 꽃이 전서에서 피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창의 글씨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전각가로서 위창의 면모이다.
그것은 글씨나 전각이 도구가 다를 뿐 전서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위창의 글씨에서 전각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창예술의 트레이드 마크는 글씨 따로 전각 따로가 아니라 글씨와 전각이 하나 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인(印)은 신표(信標)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일반적으로 서화작품의 부속품 정도로 인식되어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예술로서 인의 가치와 세계를 잘 모르고 있다. 전각가로서 위창의 면모는 바로 이러한 印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꾸고, 전각의 영역을 극대화시켰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위창의 전각세계는 무엇보다 ①인재(印材)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 ②인의 형식이나 인문(印文)의 종류를 자유자재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③인의 응용 또한 금석문이나 고폐(古弊)·와당(瓦當)의 탁본, 글씨, 편지, 선면 등에 다채롭게 적용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위창의 위치를 우리나라 근·현대 전각의 개창자로 자리 메김 하기도 한다.


   그러면 위창의 글씨와 전각작품은 실제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 졌는가. 우리는 '고전을 불러내는 데에는 위창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위창의 작품 속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고전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그 중에는 원작과 털끝하나 차이 없이 그대로 점획과 결구, 형태를 화면 속에 불러들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한편 원작의 기운만을 슬쩍 작품 속에 자유자재로 불러내기도 한다.
위창 예술의 비밀은 작가자신의 타고난 천재성이나 변화무쌍한 전위적인 조형실험보다 이러한 '쌍구가묵(雙鉤加墨)'과 '임모(臨模)'에 쏟은 노동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사실 동양예술, 특히 금석문과 서화의 공부를 위해 임모는 옛날부터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왔다. 중국 남북조시대 사혁(謝赫)이 제시한 회화품평의 6가지 기준 중 전이모사(轉移模寫)가 그 한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모'는 투명한 종이를 원작품의 위에 대고 윤곽선을 따라 그대로 베끼는 방식으로 작가가 원작의 구도나 형태를 그대로 체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임'은 '모'에서 놓쳐 버리기 쉬운 원작품의 정신성과 감정의 깊이, 즉 운필의 속도, 먹의 농담 등에 기인하는 원작품의 기운생동을 체득하는데 주안점을 둔 방식으로 그 정도에 따라 형임(形臨), 의임(意臨), 배임(背臨) 등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위창은 구도자적인 자세로 90평생을 하루같이 이와 같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 금석문, 전폐(錢弊), 와전, 상형고문에서 묵적(墨跡)에 이르기까지 '쌍구가묵'과 '임모'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비단 작가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증거가 아니면 믿지 않는 금석학자, 고증학자의 가장 기본적인 연구방법이기도 하다.
금석학은 고대 금석문을 통해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고증학의 한 분야이다. 따라서 비갈(碑碣)과 종정이기(鐘鼎 器) 등의 문자유물의 판독과 감상, 그리고 학습과 연구는 1차적으로 탑본(榻本)과 쌍구가묵의 방법을 통해 행해진다.
청조에서 새로운 경학의 연구방법으로 시작된 금석 고증학은 사실상 조선에서 꽃이 피고 결실을 보았는데, 우리나라 금석문연구는 그 장본인이자 『예당금석과안록』의 저자인 김정희를 주축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이상적과 『삼한금석록』을 지은 오경석·오세창 부자를 통해 맥이 이어졌다.
특히 오세창은 탑본과 고증을 통한 금석학의 연구성과에 서예와 전각을 결합시켜 독자적인 예술영역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창의 작가적인 태도는 정통파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의 작품세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듯이 개인의 감정을 극도로 자제한 연후에 나오는 정교함의 극치를 자랑한다.
글씨에서 쌍구가묵과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형임이 그러하고, 전각에서 특히 운치를 중요시하는 중봉철필(中鋒鐵筆)보다 예리함이 돋보이는 편도각(偏刀刻)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금석문과 고폐, 와당의 탑본은 원작과 조금도 다름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금석학자로서 엄정한 고증학적 태도로 규명해내는 작품의 내력이나 품평은 작품의 정교함을 배가시키고 있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것은 위창의 화면경영 능력이다. 작품이라기 보다 설계도라고 해야 할만큼 탑본의 배치, 그것에 대한 품평, 제첨, 그리고 마지막 어떤 내용과 종류의 인문(印文)을 찍을까를 결정하기까지 철저한 계산에 근거하고 있다.
이 정도에 이르면 단순히 작가적인 측면에서 위창을 평가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굳이 말한다면 경학, 금석학, 문자학, 역사 등의 인문학에 두루 박통(博通)한 서예, 전각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화감식은 '작품을 읽고(讀畵)' 그 작품의 진위(眞僞), 우열(優劣), 시비(是非)를 판별하거나 감상하는 일이다. 이러한 '독화(讀畵)'의 요체는 작품 속에 표현된 작가의 심미의식을 기법을 통해 구조적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서화의 기법은 점획의 운용을 다루는 필법과 묵의 농담을 다루는 묵법, 화면에서 자법(字法)과 장법(章法)을 문제삼는 결체구도(結體構圖)가 좌우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개인이나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들을 판별하는 것이 서화감상뿐만 아니라 서화감식의 핵심이 된다.
따라서 서화 감식가는 기본적으로 많은 작품을 읽어야 될 뿐만 아니라, 실제 임모를 통해 미술사 전개맥락에서 시대양식을 선도하는 핵심작가의 필법과 묵법, 그리고 결구를 체득하고 있어야 함은 기본중의 기본에 속한다.
우리는 그 예를 위창에서 찾을 수 있다. 위창은 가장품(家藏品)과 직접 수집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화골동과 금석문, 전폐, 와당, 그리고 그 고탁본을 수도 없이 배관을 하고, 또 손으로는 그것을 쌍구가묵과 임모를 하고, 머리로는 그것에 대한 내력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무수히 많은 책과 서예, 전각작품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낸 사람이다.
오늘날의 간송콜렉션이 위창의 눈과 손, 간송의 재력으로 민족문화의 보물창고가 된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며,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의 『근묵(槿墨)』34책, 국회도서관 소장의『근역인수(槿域印藪)』, 박영철 컬렉션이었다가 서울대박물관에 기증된 『근역서휘(槿域書彙)』37책,『근역화휘(槿域畵彙)』3책, 국립중앙도서관 위창문고의 3,082책,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고구려고성각자(高句麗故城刻字)>외 금석 및 와당 실물은 모두가 위창의 눈과 손을 거쳐 만들어 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그에게 감식가라는 타이틀을 또 씌우지만, 이 모두를 합해 '한국미술사 연구의 아버지'라고 불러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서화사연구의 바이블이라 할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만든 것은 이에 대한 이견을 불허한다. 우리나라 서화사는 『근역서화징』을 통해 비로소 집대성되었고, 지금의 연구도 이를 통해서 전개되고 있다.
1928년 계명구락부에서『근역서화징』이 출간되자 최남선(崔南善)이 '암흑(暗黑)한 운중(雲中)의 전광(電光)'이라고 극찬하였다.
특히『근역서화징』은 ① 서예가 392명, 화가 579명, 서화가 149명 등 총 1,117명에 이르는 우리나라 서화가들의 보록(譜錄)이라는 점, ② 열전(列傳)을 편년체 식으로 열람하는 전통사학의 방법론을 통해 한국서화사의 시기구분을 「나대편(羅代編)」「여대편(麗代編)」「선대편상(鮮代編上)」「선대편중(鮮代編中)」「선대편하(鮮代編下)」등의 5편으로 나눈 최초의 시도라는 점, 그리고 ③ 그 방법도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를 배제하고 270여종의 실증자료와 전거에 의해 전적으로 찬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이렇듯 위창은 이미 100년 전부터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민족서화연구와 컬렉션으로 항거하면서, 정심박통(精深博通)한 머리, 엄정한 눈, 부지런한 손발로 만든 우리민족문화의 보화를 우리 앞에 귀한 선물인 동시에 무거운 과제물로 던져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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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해주(海州), 자(字)·중명(仲銘) 重明(중명), 호·위창(葦滄) 한도인(閒道人), 당호(堂號)·여박암(旅泊庵)

1864년(1세) 7월 15일 서울 중부 犁洞(이동, 현 을지로 2가)에서 오경석(吳慶錫, 1831-1879)과 김해 김씨사이에서 1남 1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71년(8세) 부친의 친우이며 한의학자, 개화사상가인 유대치(劉大致)를 스승으로 모시고 가숙(家塾)을 설치하였다.
1875년(12세) 10월 16일 같은 역관이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직위를 가진 우봉 김씨 김재신(金載信)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1879년(16세) 5월 29일 역과(譯科)에 합격하여 가숙을 철거하였으나 8월에 콜레라로 인하여 7일 모친상을 당하고 22일 부친상을 당하였다.
1884년(21세)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유대치와 함께 10월 광주군 우석촌(于石村)으로 도피하여 구속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1886년(22세)사역원(司譯院) 직장(直長) 및 <한성주보> 기자로 임명되었고, 그 다음해인 23세 때 1887년 박문국주사(博文局主事)로 자리를 옮겼다.
1894년(31세) 김홍집 내각에 의해 갑오경장이 실시되었던 해로 6월에 내무부주사로서 軍國機務處郞廳(비서관)이 되었으며 7월에 의정부주사를 겸하여 정식내각비서관이 되었다.
1897(34세) 8월 14일에는 일본 문부성(文部省)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의 조선어과 교사로 초청되어 1년을 근무하고 1898년 10월에 귀국하였다.
1898년(39세) 개화당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천도교의 3대 교주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 도사가 되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06년(43세) 5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손병희, 권동진과 귀국하여 <만세보(萬歲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세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다가 1년만에 폐간되었다.
1907년(44세) 11월에 윤효정(尹孝定), 권동진(權東鎭),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대한협회를 조직하여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항일운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대한협회'의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대한민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무렵부터 한국의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근역서화징』의 출판계획을 수립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1910년(47세) 한일합방이 되면서<대한민보>는 폐간되었고, 천도교 도사로 있으면서 서예와 전각작품 제작, 우리나라 고서화와 인보에 대한 편저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서화계와 관계를 맺기 시작, 김가진(金嘉鎭), 안중식(安中植), 이도영(李道榮)등과 화랑을 개설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1911년(48세)부터 부친이 수집해 놓은 하(夏)·은(殷)·주(周)·진(秦)·한(漢)에 이르는 역대 금석문으로 작품제작과 연구에 전념하며 한국최초의 근대미술학원인 '경성서화미술원'의 운영위원회인 '서화미술원'의 회원이 되었다.
1916년(53세)에는 우리나라 역대서화작품을 시대별, 작가별로 분류하여 정리한『근역서휘(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畵彙)』의 편저작업을 시작하였고 그 이듬해인 1917년에는 9년만의 정리작업 끝에『근역서화징』이 탈고되었다.
1918년(55세)에는 '서화협회'가 창립되어 13人의 발기인 중 1人으로 참가하여 서화계의 대표적인 인사로 부각되었다.
1919년(56세) 3·1독립만세운동에 민족대표 33인중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의해 구속, 3년형을 언도 받아 경성감옥에서 2년 8개월을 복역하던 중 58세 때인 1921년 11월 23일 가출옥되었다. 이후 위창은 사회활동을 피하고 서예와 전각작품의 제작 및 각종 고서화자료의 편저작업에 몰두하였다.
1921년(58세) 서화협회지인『서화협회 회보』에 '탑원초의(塔園草衣)'라는 필명으로 「서가열전」「화가열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착수하여 〈나대편〉,〈여대편〉을 연재하여 한국 최초의 미술사료 정리작업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1922년 제 2호로 중단되었다.
1922년(59세) 6월에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작품을 출품하여 2등 상을 수상하였으나 그후부터는 서화협회전(협전)에 출품, 1925년 제 5회 협전에<서시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과 <전서>를 출품하였다.
1927년(60세)『근역서화징』이 완성되어 1928년에 계명구락부에서 출간되었다.
1929년(62세) 제9회 협전에 <어거주(魚車舟)>, 1931년(64세) 제11회 협전에는<소선단찰(小扇短札)>,1934년(67세) 제13회 협전에<상형고문(象形古文)>을 출품하였고, 1936년(69세) 제14회, 1937년(70세) 제15회에도 작품을 출품하여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76세) 역대 서화가의 작품을 모은『근묵(槿墨)』의 편집, 제자(,題字)를 쓰고 낙관편(落款篇)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한국의 역대인장을 모은『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편집 종료하였다.
1945년(82세) 해방이 되자 9월에 결성된 '조선서화동연회'에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1946년(83세)과 1947년(84세) 제1, 2회 서화동연회전에 출품하여 노년까지 적극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민족원로로 다시 언론계에 추대되어 서울신문사 사장에 취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국준비위원회' 고문,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 '대한국민당' 등 각 정당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무수한 환영회, 국민대회, 시민대회에 참석하였다.
1946년(83세) 8월 15일 해방1주년 기념일에 대한제국 황제 옥새를 민족대표로 인수하였다.
1950년(87세)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하였고, 1953년(90세) 4월 16일 대구 대봉동에서 타계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1963년 3월 1일에는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고, 1993년에는 국가유공자로 추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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