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에 있는 나옹화상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느티나무 2그루
나옹화상이 심었다는 유래비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 영양 남씨 집성촌을 방문했다가 안내판에 목은 이색의 기념관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님은 본관지가 충남 서천의 한산(韓山)으로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과 함께 고려 3은의 한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야은 길재를 포함해서 4은으로도 부른다. 그런데 목은을 제외한 3사람은 경상도 출신으로 알고 있었는데 목은 조차 경북 영해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자랑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이 경상도 영해지방에 살던 사족(士族) 간재(簡齋), 김택(金澤?~?)의 사위가 되어 그가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급제하기 전에 유람(遊覽)으로 여기에 와서 김택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고’고 했다. 또 하나 흥미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목은의 외할아버지 김택의 본관이 함창김씨라는 점이다.
함창(지금의 상주 함창읍)은 필자의 고향과 그리 멀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우리 마을에도 함창 김씨들이 많이 살았다. 1950~1960년대 우리 또래가 클 때만 하드라도 씨족끼리는 선의의 경쟁도 했었는데 당시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함창김씨들은 비록 고령가야의 후손들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비슷한 가구였던 우리 성산이가(星山李家)에 비해 살림살이도 여유가 없었고, 집안의 품격을 가늠했던 공무원 수도 적었다. 훗날 우리 집안 역시 먼 할아버지가 중종 조 이판(吏判)을 역임한 문신이었던 것 이외 그리 대단한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때만 해도 조금은 우쭐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함창김씨가 여말 학자이자 충신의 사표인 목은을 외손으로 둔 사실을 알고 그 집안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어 보는 눈을 달라지게 했다.
함창김씨인 친구 병웅군에게 족보를 가져오게 하여 보았더니 그들이 우리 마을에 정착한 것은 조선 태종 때 진주판관을 역임했던 간재의 고손자(高孫子) 김안도(金安道)가 여말 전라도 안렴사를 지낸 아주신씨 신우(申祐)와 사돈관계 즉 퇴재(신우의 호)가 안도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면서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기록은 함창김씨들이 우리 이가(李家)보다 더 일찍 마을을 일군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비교적 오지인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 동구 앞에는 나옹정(懶翁亭)이 있다. 사불산 대승사에 있던 나옹화상이 간재의 사위였던 이곡과 함께 일대의 산수를 사랑해 자주 왕래할 때 심은 느티나무 2그루를 마을 사람들에게 정자 구실을 하여 나옹정이라 한다는 것이다. 상주나 문경에서 산수가 좋은 곳이라면 이 곳 말고도 여러 곳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곳을 찾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따라서 내 나름의 해석은 고령가야 왕족 후예의 장인 간재에 대한 특별한 애정 때문에 함창이 가까운 이곳을 사랑했지 아니하였을까 한다.
함창김씨는 김해에서 가야(伽倻)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여섯 아들 중 한 분이 건국한 고령가야(古寧伽倻)의 후예다. 고로, 마종, 이현 세 왕이 213년간 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신라에 의해 망하고 영해의 사도성(沙道城)에 유폐 되었다.
그 후 고려 인조 조에 덕원군(德原君, 함창김씨의 중시조, 시호, 문정) 김종제(金宗悌1124~?)라는 분이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그 이 전에는 격리된 체 살아 왔다고 한다.
족보의 이러한 내용이 사료와 부합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살펴보았더니 293년(신라 제14대 유례왕 10)사벌주 호민(豪民, 부자) 80여 가구를 이주시켰다고 하는데 이 이주민들이 바로 고령가야가국의 왕족들이라는 것이다. 내륙의 오지인 상주 함창에서 수백 리 먼 바닷가 영해지방 사도성에 이주시킴으로 혹시 있을지 모를 반란을 미리 막으려했던 것 같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간재의 본관이 비록 상주 함창이지만 영해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일찍부터 영해에 자리 잡았던 영양 남씨 집안에 장가들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잡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누구나 한 번씩 읊조려 본 시(詩)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높은 명성에 비해 작자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작품이다. 그는 조선건국에 크게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스님이 출가를 하고 가정이 이 오지까지 와서 나무를 심은 것을 보면 맺은 우정은 아주 특별했던 것 같다.
나옹화상은 영해(지금은 창수면)에서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어머니 정씨(鄭氏)사이에 태어났다. 같이 놀던 절친했던 친구가 죽자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이냐’며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모른다.’고 하자 괴로워하며 공덕산(지금 문경의 사불산) 묘적암으로 요연(了然)선사를 찾아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명산대찰을 편력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의 회암사(檜岩寺)에 머문다. 그러나 여기서도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음에 부족했던 그는 1347년(충목왕 3) 마침내 중국을 향해 출발 이듬해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 도착 그 곳에 머물고 있던 인도 출신의 지공(指空)화상으로부터 불법을 배웠다. 1358년(공민왕 7) 10여 년의 중국에서의 구도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1361년(공민왕 10) 왕이 그를 불러 설법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선물을 주고 개경 가까운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머물게 했다. 공민왕의 끝임 없는 배려로 불교발전에 기여했다. 1371년(공민왕 20)왕사로 다음 즉위한 우왕으로부터도 왕사로 추대 받았다. 1376(우왕 2)왕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하니 세속 나이 57세, 법랍 37이었다. 저서로 <나옹화상어록, 보물 제697호> 등이 있다. 한산군 이색(李穡, 1328~1396)이 임금의 명을 받아 비문을 짓고 공신 권중화가 쓴 비가 신륵사에 전해오고 있다. 비록 왕명이었지만 아버지의 벗이었던 나옹화상의 비문을, 아들이 쓴 것도 뿌리 깊은 인연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최근 여주군교육청이 나옹예술제를 개최하고 영덕군이 나옹화상의 출생지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화상(和尙)의 손길이 미친 살아있는 이 나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런 역사성을 간직하고 생육상태가 양호한 나무를 상주시에서는 수령을 170여 년이라 해 놓고, 천연기념물도 아닌 보호수로 관리하고 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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