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江亭(송강정) - 정철 (鄭澈)
明月在空庭(명월재공정) : 달빛은 빈 뜰 안에 가득한데
主人何處去(주인하처거) : 주인은 어디 갔나.
落葉掩柴門(낙엽엄시문) : 낙엽은 사립문을 덮어 버리고
風松夜深語(풍송야심어) : 바람은 소나무에서 밤새도록 속삭이네
송강정(松江亭)은 환벽당, 식영정과 함께 전남지방 기념물 1호로 지정되었으며, 담양군 고서면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서인 진영에 속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49세 되던 1584년(선조 17년)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와서 정자를 짓고 지내면서 「사미인곡」「속미인곡」을 비롯한 뛰어난 가사와 단가들을 남겼다. 지금의 정자는 1955년에 중수된 것이다.정자터 아래의 개울이 죽록천이고 부근의 들을 죽록이라 부르므로 죽록정(竹綠亭)이라 하였는데, 이 정자를 후에 정철의 후손들이 중건하면서 송강정이라 불렀다. 지금도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과 함께 측면에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송강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옆이 마루로 되어있다. 옆에는 1955년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있고, 뒤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얕은 담처럼 둘러져 있다.
정철이 담양 창평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두 누이가 각각 인종의 귀인이자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던 덕에 궁중에 출입하며 경원대군(후에 명종)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등, 명문가의 자식으로 유복하게 지내던 그의 어린 시절은 그가 열살 되던 해(명종 즉위년, 1545)에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끝이 났다. 계림군은 죽임을 당했고 형은 매를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정철도 북으로 남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돌았다. 6년 후 유배에서 풀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왔다.창평 생활은 송강의 일생에서 그나마 안정적이고 따스한 시기였다. 열 여섯이 되도록 체계적인 학문을 배울 수 없었던 그는 그후 10여 년 동안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면앙정 송순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석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또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도 사귀었다.1561년(명종 16년)에 27세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시작된 정철의 벼슬살이는 선조 즉위 이후, 시대적 분위기와 더불어 파란만장했다. 수찬·좌랑·종사관 등을 지내다가 40세 때 당쟁에서 밀려 낙향, 43세에 다시 조정에 나가 직제학·승지 등을 지내다가 동인의 탄핵으로 낙향하여 4년간 송강정에 은거, 54세에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동인 세력을 철저히 추방, 다음해에 좌의정이 되고 56세에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천에 유배, 57세에 경기·충청·전라체찰사, 이듬해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시 동인의 모함을 받아 강화 송정촌에서 쓸쓸히 살다가 5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시문에 있어서 한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객이다. 한시, 시조, 가사를 막론하고 시문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 조선 전체를 통틀어 한 분야에서도 그에 필적할만한 문장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송강정에서 은거하던 기간동안「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성산별곡」등의 가사와 시조들을 썼는데 특히 사미인곡은 이름 그대로 연군지정(戀君之情)을 읊은 노래이며, 그 수법은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을 기탁(寄託)하여 읊은 것이다. 송강 자신의 충정(忠情)을 표현한 노래로 그 완곡한 정서와 세련된 기교가 조선조 시가의 백미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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