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다산이 제자에게 보낸 서첩

강나루터 2017. 10. 3. 07:16
[신 발굴자료로 본 다산의 휴머니즘]<3·끝> 다산의 제자사랑-황상에게 보낸 서첩
"기억력·이해력 좋지 않고 글재주 없다하여 실망말라
공부를 빛나게 하는 건 근면이다"
안대회 ·명지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
입력 : 2005.07.29 18:36 08' / 수정 : 2005.07.29 19:50 56'

이번에 발굴된 많은 자료 가운데 개인적으로 관심이 쏠린 것은 다산이 강진에서 양성한 제자 황상(黃裳,1788~1870)에게 준 시와 간찰이다. 강진 유배시절 다산은 수십 명의 제자를 가르쳤고, 그 중에는 이강회, 이청, 윤창모 등등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다산은 각자의 재능에 적합하게 가르쳐 성과를 보아, 최근 그들의 저작이 속속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또 다산 자신도 수많은 저술을 남기는 데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발굴된 자료에 제자들과 주고받은 시문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많은 제자 가운데 다산과 가장 인간적인 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황상이었다. 그는 막 강진에 유배 온 중죄인 다산의 첫 제자였고, 제자 가운데 최고의 시인으로 이름이 있었다. 추사도 그 점을 인정하였다.
그는 부패한 사회를 고발하고 풍자한 다산의 시풍을 충실하게 계승하여 《치원유고(?園遺稿)》라는 문집까지 남겼다. 다산처럼 그도 〈애절양(哀絶陽)〉 시를 썼다.
황상은 다산의 집안과도 가족처럼 지냈다. 스승과 제자, 스승의 아들과 제자 사이에 맺어진 가슴 뭉클한 사연이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황상에 관한 다산과 아들 정학연의 글이 평소 눈에 익었던 차에 친필 원본을 보게 되었다. 《송치원시첩(送?園詩帖)》, 《석재죽란(昔在竹欄)》, 《을축동작여치원(乙丑冬作與?園)》, 《견서여시(見書與詩)》 등의 서첩이 모두 황상에게 준 서첩이다.
강진 유배시절 첫 제자인 황상에게 喪당하거나 病걸렸을 때도 따뜻한 편지
다산 아들들도 아버지 뜻 이어받아 죽을때까지 깊고 그윽한 우정 나눠
처음 보는 자료가 적지 않았다. 특히, 흑산도에 귀양살이하던 정약전이 다산에게 보낸, 지면 가득히 황상을 염려한 친필 편지가 흥미로웠다. 지체가 낮다고 해서 세력 가진 사람들에게 곤경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한편, 문장에 경솔하고 날뛰는 태도가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대목도 보였다. 다산이 그 편지를 황상에게 주며 “너를 염려한 친필이니 잘 보관해라” 했다고 하여 함께 묶여 있었다.
다산과 정약전 형제가 문학에 재능을 보인 황상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애를 썼음을 보여주는 편지다. 그들은 말로만 염려하지 않았다. 다산이 황상에게 준 작품과 편지에서 확인된다. 상을 당한 황상 형제를 위로하는 편지 등에서 작은 일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무더운 여름날 황상이 머물고 있는 시원한 보은산방이 그립다는 시에서는 소탈한 다산의 일면도 드러낸다. 찌는 듯한 여름이라 “밤이 깊어질 때면 미칠 것만 같아/옷을 벗어 부치고 우물에 가 목욕하네(更深每發狂, 解衣浴村井)”라고 젊은 제자에게 푸념하는 모습은 점잖은 다산의 인상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또 학질에 걸린 황상에게 학질이 떨어지기를 기원하며 준 작품이 흥미롭다. 자신은 참지를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데 어린 황상은 잘 참고 떨지도 않는 것이 신통하니 곧 낫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다산이 써준 면학문(勉學文)이다. 황상에게 다산이 직접 써준 글이다. 1802년 임술년 10월 17일, 강진의 한 주막에서 서로 대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을 너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 글 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은 허황한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자는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자는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자는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뚫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근면함을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 다산이 제자인 황상에게 부친 한시와 다산 정약용의‘면학문’을 맏아들 정학연이 다시 쓰고 사연을 적은 발문.
자신감이 없는 학생을 공부로 이끌어주는 이 문장은 짧지만 감동적이다. 다산의 격려는 지금 들어도 공부하는 자의 용기를 북돋워 주는, 따뜻하면서도 준엄한 스승의 마음이 느껴진다. 황상은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며 한평생 학문의 길을 걸었다. 스승의 글을 받은 날로부터 꼭 60년이 되는 임술년, 70 노인이 된 그는 스승의 말을 다시 되새기고,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며 감사하는 글 〈임술기(壬戌記)〉를 썼는데 거기에도 면학문이 실려 있다.
이번에 본 면학문에는 한결 가슴 뭉클하게 하는 것이 있다. 다산이 아니라 맏아들 정학연이 쓴 글씨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글을 다시 쓰고 “오른쪽 한 편의 글은 열수선생(다산)이 쓰신 면학문으로 쓴 때는 임술년 10월 17일이요, 황상의 나이 15세였다. 본래의 종이가 해지고 찢어져 다시 기록하여 첫머리에 싣는다”라는 발문을 뒤에 붙였다. 다산 친필이 닳고 닳아서 할 수 없이 아들인 자기가 써서 황상에게 다시 준다는 내용이다. 정학연이 다산의 글을 다시 쓴 때는 1854년 정학연의 나이 72세요, 황상의 나이 67세였다. 다산의 묘에 참배하러 세 번이나 찾아온 황상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써준 것이다. 스승이 써준 면학문이 닳고 해어질 정도로 간직한 정성이나 아버지의 제자에게 아버지의 글을 대신 써준 일이 그들 사이의 인간적 유대감을 잘 드러낸다.

▲ 안대회 명지대국어국문과 교수
그처럼 다산의 아들들이 황상과 죽을 때까지 가족 같은 우정을 나누어, 정씨와 황씨의 변치 않을 교우를 유지하려고 정황계(丁黃契)를 만들어 첩을 만든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여러 서첩에는 그 같은 우정의 실상을 확인시켜 주는 시와 글이 함께 묶여져 있다. 강진으로 돌아가는 황상을 보내며 써준 정학연의 시와 문장, 선물로 주는 “규장전운” 한 권과 부채, 담배통 등의 목록 등도 그 중의 하나다. 100~200년 전 강진에서 맺어진 스승과 제자의 대를 이은 깊은 인연은 그들이 친필로 남긴 서첩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도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이번에 발굴된 다산 관련 자료들은 30일부터 8월 31일까지 강진 다산초당 아랫마을에 있는 다산유물전시관에서 특별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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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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