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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광사 행서 화기(李匡師 行書 畵記)

강나루터 2017. 10. 23. 21:45


이광사 행서 화기(李匡師 行書 畵記)

  竹史 김병환 2017.05.21 10:01

 


이광사 행서 화기(李匡師 行書 畵記)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원교 이광사(1705-1777)의 친필 서첩이 발견되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은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 고전적(古典籍) 소장 기관인 동양문고와 연구 협정을 체결하고 조사단을 파견해 자료 조사를 벌인 결과 동양문고 목록에는 올라와 있지 않지만 귀중본으로 분류되 일반 고전적과는 별도로 보관되 있는 두 서첩을 발견한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서첩은 김정희'완당서첩(阮堂書帖)' 이광사'원교서법'(圓嶠書法)으로,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광사의 '원교서법'은 조선 후기 정신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주역 해설서 '참동계'를 해서체로 쓴 것으로, 원교의 서체 연구는 물론 주역 연구에 있어 중요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민족문화연구원은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던 두 사람의 서첩이 같은 청구기호로 묶여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그동안 원교가 추사에 비해 저평가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 후기 대표적 명필이자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이었다. 또한 왕손에다 부친과 종형제들이 모두 학문과 예술이 뛰어나 '육진팔광'이라 불렸던 명필가문 출신이다.

 

   원교는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을 배워 아들에게 전수했으며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마흔 살에 이미 명필가라는 명성이 높아 글씨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추사가 초의선사를 보러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가 원교가 쓴 대웅보전 편액을 보고 "의기가 지나쳐 속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며 폄하하며 <당장 떼어버리라>고 했다던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이광사의 불행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소론이 세력을 잃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고,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받을 때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유배지에서도 그의 학문과 글씨를 배우려는 사람이 넘쳐나자 다시 완도군 신지도(新智島)로 옮겨야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더욱 글씨를 연마하여 마침내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맥(書脈)을 계승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광사는 <서결>에서 "예를 들어 사람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랑, 기쁨, 노여움, 상쾌함, 답답함, 속임, 뉘우침 따위 감정이 순간에도 변하는 것이므로 이게 바로 조화이고 자연이니 문장도 이와 같은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마치 자연의 조화가 사물에 따라 형태를 이루되 처음부터 일정한 체제가 없음과 같다." 이것이 그의 예술론인 것이다.

 

  51살부터 73살까지 무려 22년이란 기나긴 유배생활, 요절한 딸 그리고 남편이 옥중에서 처형당한 줄 알고 곧장 자결한 부인 등 그의 불행은 자신의 글씨를 조롱박에 넣고 밀봉한 채 바다로 띄워 보내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유배지에서 빛과 그림자가 공존했던 그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광사는 진서·초서·전서·예서에 두루 뛰어났으며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어 산수·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화풍을 이루었다고 한다.

 

   단군이래의 역사를 읊은동국악부 東國樂府30수와 귀양지 신지도의 풍속과 생활을 그린기속 記俗등의 문학작품이 전하고 있으며, 서화작품으로는행서사언시 行書四言詩·고승간화도 高僧看畵圖·산수도 山水圖등이 전한다. 그 밖의 그의 저서로는 서예 이론서인 원교서결 圓嶠書訣·원교집선 圓嶠集選등이 있다.

 

 

 

 

   18세기에 가장 대중적 명필이던 원교 이광사의 필적원교법첩은 보물 제167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글씨를 받은 사람이나 제작연대는 적히지 않았지만, 서첩에 찍힌 원교은자(員嶠隱者), 이광사(李匡師), 이광사필서(李匡師筆書), 이광사인(李匡師印), 이광사장(李匡師章), 도보(道甫), 원교(員嶠), 이도보씨(李道甫氏), 조선국이광사자도보(朝鮮國李匡師字道甫) 등의 인영(印影)을 통해 중년 필적으로 여겨진다. 이 서첩은 모두 40면으로 앞쪽의 25면은 밝은 옥색 비단에 먹으로 썼고, 중간의 9면은 매우 옅은 담옥색(淡玉色) 비단에 먹으로 썼으며, 뒤쪽의 6면은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로 썼다.

 

   옥색담옥색검은색 비단에 먹과 금니를 사용하여 작고 큰 글자를 전,,,,초 오체로 정성스럽게 썼다. 전서(篆書)를 쓴 부분에는 글자마다 오른쪽 위에 붉은 먹으로 석문(釋文)을 달아 보기에 편리하게 했다.

 

   표지에 있던 원래의 제첨(題簽)이 떨어진 듯 뒤에 "원교법첩(員喬法帖) <전해초(篆楷艸)>라고 써놓았는데 '원교(員喬)'는 오류이므로 '원교법첩(員嶠法帖)'이라 고쳐 표기하였다. 이 서첩은 현존하는 이광사의 수많은 서첩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작첩(作帖) 방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광사의 서론적(書論的) 입장을 잘 대변해주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자료출처: 장진영 jyj3347

 

blog.daum.net/juksajacob3990/160   청 산 별 곡




출처 : 그날에 솟아 오른 해
글쓴이 : 케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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