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秋史의 철학사상
正祖이래로 淸朝를 왕래하던 學者들은 淸代文化를 흠모하여 淸朝의 學術思想과 文物制度를 讚揚하고 輸入하려고 했다. 이 시기에 朴齊家, 申綽, 丁若鏞, 李德懋 등은 秋史의 先驅가 되어 그들의 영향으로 秋史는 淸代學術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入燕할 기회를 갖기를 원하고 있었다. 마침 추사는 24세 때 아버지 金魯敬을 따라 燕行하여 당시 淸代의 鴻儒인 翁方綱과 阮元 등 大碩學들과 만나 學緣을 맺게 되었다. 翁方綱은 당시 78세이며 阮元은 47세였다. 翁方綱은 金石學의 大家로서 『四庫全書』 編輯時에 金石學을 담당한 大學問家로서 地位도 높고 年歲도 높았으며, 阮元은 經學의 大家로 『皇淸經解』를 편찬한 大學者였다.
秋史는 24세의 젊은 사람이지만 이미 進士시험에 합격하고 經典에 정통하였으며 諸子百家에 능통한 文士였다. 그들과 學說을 논함에 기치가 내려가지 않는 對敵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놀라며 東方에 어떻게 이런 傑出이 있느냐고 칭찬하며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歸國 후에도 계속적인 교류를 통하여 淸代의 學術文化를 받아들이는데 一人者가 되었다. 翁方綱이나 阮元은 학문적 성과를 朝鮮의 秋史 金正喜에게 먼저 보이고 그 意見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翁方綱은 實事求是의 實學派라 하지만 傳統的 古典을 간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阮元은 이에 不肯한다. 여기서 추사가 입장이 다른 두 大家를 다 이해했다는 것은 그 학문이해의 폭을 짐작케 한다.2)
이와 같이 추사는 淸朝의 實學思想을 받으면서도 종래의 性理學的 義理思想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實學과 性理學을 조화하여 創造的으로 발전시키는데 남다른 특징이 있다. 이것은 물론 翁方綱의 영향도 있지만 阮堂 자신의 학문 폭이 넓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의 「實事求是說」은 종래의 實學派와 그 성격을 달리한다. 그들이 義理之學 즉 性理學을 形而上學的 觀念論이라 하여 批評, 否定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해서 秋史도 이를 반대한다. 秋史의 「實事求是說」에 의하면, 漢代의 考證學과 宋代의 義理之學을 둘로 나누지 않고 考證之學은 집을 찾아가는 길이요 義理之學은 들어가 앉는 室堂으로 비교하여 집안에 들어가려면 그 길을 따라서 가야 한다고 하였다. 訓詁學, 즉 考證學만 하고 義理之學 즉 性理學을 하지 않는다면 문밖에서 돌아다니며 집안에 들어가지 않는 下人과 같다고 하였다. 또 義理之學을 한다고 해서 考證之學을 하지 않는다면 월담해서 창문으로 들어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의 집에 들어가 앉아 자기 집인 줄 알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漢學=考訂之學과 宋學=義理之學은 둘로 나눌 수 없으며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추사의 實事求是의 중심내용이다.
秋史의 學問은 넓고 크며 정밀하고 엄정하다. 그는 經學, 金石學, 考證學, 書法, 詩와 文에 深邃할 뿐 아니라 佛敎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秋史는 儒家 出身으로 僧侶는 아니지만 佛敎의 經典과 禪宗의 眞意를 체득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秋史는 見性한 사람이라고 모두 말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道家에 있어서도 남다른 硏究와 樸學의 眞意를 체득하였으니 詩書畵에 나타난 작품을 통하여 그 경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실학을 강조하고, 經驗的, 實證的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한다 하여 實事求是라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實(사실)과 是(正, 眞)는 단순한 물리적 사실만이 아니고 心理的 내지 倫理的 哲學的 宗敎的 次元에까지 가는 實이며 眞理로서의 是인 것이다. 佛敎로 말하면 文字般若나 觀照般若가 아니라 實相般若의 實인 것이다. 道敎로 말하면 樸實自然의 實이고 儒敎 經傳으로 말하면 明德의 實인 것이다. 秋史의 實事求是의 實은 中國 淸朝學者들이 말하는 實事求是와 그 의미 내용이 스스로 다른 것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實學派들이 말하는 實學과도 다르다.
실로 秋史는 학문의 정상에서 儒․佛․道가 會通하는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 수 있다. 佛家의 空中妙有와 儒家의 豁然貫通과 道家의 見素抱樸의 경지는 三敎가 主體 안에서 會通한다고 하겠다. 佛敎의 見性과 道敎의 察性과 儒敎의 盡性이 상통하는 것이다. 佛敎의 心識과 儒敎의 性理와 道敎의 淸虛의 氣가 상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지를 체득한 것이 秋史 金正喜이다. 그러므로 어느 면에서 보아도 그 學說에 모순이 없다.
2. 秋史의 예술사상
秋史는 藝術作品이 되려면 作品 속에 自己의 人品과 靈魂이 透映되고 表象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단순히 對象의 形體를 그리거나 그 방법을 안다고 해서 藝術作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했다(不在形似, 不在蹊逕). 이는 技巧나 技術은 될지언정 藝術作品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蘭을 그릴 때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다르다고 하여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반드시 모두 蘭을 잘 그린다고는 할 수 없다. 蘭을 그림에 있어서 특별히 한 格을 갖추어 마음속에 書卷氣가 있어야만 이에 붓을 들어 그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蘭을 畵한다고 하지 않고 寫한다고 한다. 畵라 함은 主體가 아닌 對象의 모양을 보고 그리는 것이지만, 寫라 함은 自己胸中에 內在한 생각과 神明이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의 高下는 그 人品의 高古出群한데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人品亦皆高古出群, 畵品亦隨以上下).
藝術의 美는 속에 있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精神이 外部로 나타나 四肢에 퍼지고 자기하는 행동으로 피어나는 것이 美의 지극한 경지이라고 『周易』에서는 말하고 있다(坤卦 文言: 美在其中, 暢於四支, 發於事業, 美之至也).
1) 歲寒圖에 나타난 儒敎的 人間像
儒家의 예술철학은 상술한 바와 같이,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論語 子罕』)”라 하여 모든 藝術作爲는 그 內容으로 人間의 本性인 사랑하는 마음(仁性)이 내재해 있어야 한다. 仁이 없는 작품은 내용 없는 形式으로 虛像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를 할 때 그 상황에 적중하는 정감이 없이 소리를 내어 부르는 노래를 괴뢰라고 하였다(『樂學軌範』). 여기에서 말하는 仁의 근본은 사람 심성의 본질인 德에서 나와야 하며 이 德은 天道에 근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道에서 德으로, 德에서 仁으로, 仁에서 藝로 나타나야 한다. 이 때 藝는 藝術的 次元의 藝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과 태도까지도 藝의 영역에 속한다. 가장 인간적이어야 한다(眞善美聖). 儒家의 藝術思想은 진정한 人間性 露出인 것이다. <柳承國著 : 韓國思想과 現代 pp. 259~263,(阮堂親筆歲寒圖解說 참조) >
2) 不二蘭과 禪思想
秋史는 傳統的 儒敎家庭에서 태어나 士大夫의 禮節이 엄격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러므로 春秋大義와 禮法을 숭상하며 타의 模範이 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佛敎의 信心이 돈독하고 佛敎敎理에 정통할 뿐 아니라, 그의 생존시에 僧侶들이 그를 가리켜 見性한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思想뿐 아니라 그의 예술작품 속에는 禪思想과 관련되지 않는 作品이 거의 없다. 예를 들면 禪佛敎를 나타낸 작품으로 不二蘭은 너무나 유명하다. 佛敎에 관한 白坡禪師와 草衣大師와의 佛敎論爭은 아주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항상 『金剛經』을 護身經으로 여겨 濟州道 귀양살이 9년간, 北靑 귀양살이 1년을 갈 때에도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한다. 中國의 碩學 文人들과의 交涉에 있어서도 儒敎 經典뿐만 아니라 佛經과 염주 같은 貴物을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3).
秋史의 佛敎藝術은 生命과 情熱과 慈悲心이 無量하게 세계에 넘쳐 흐르기를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作故하던 71歲에 봉은사에 ‘板殿’ 두 글자를 絶筆로 남긴 것도 그 信心의 證表이다.
不二蘭은 禪旨의 奧妙를 나타냈으니 이는 傑作 중의 傑作이라 하겠다. 不作蘭의 畵題에 보면,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우연히 마음속의 하늘을 그려냈다.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찾고 또 찾기를 거듭해 보니 이 오묘한 이치가 바로 維摩의 不二禪이로다.”라 하였다. 維摩不二禪은 『維摩經』 不二法門品에 있는 말이다. 모든 菩薩들이 禪의 法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最後의 維摩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蘭花를 설명한 것은 紙面에 그리는 것보다는 마음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藝術의 境地라는 뜻이다. 이에 계속하여 추사는,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毘耶離城에 있던 維摩의 말 없는 대답으로 응하겠다.”고 하였다. 이같이 禪道理의 奧妙하고 無限한 이치를 有限한 인간의 言語와 文字로 나타낼 수 없다는 뜻이니 이는 文字般若가 아니고 實相般若를 체득하라는 뜻이요, 이 妙理는 體得하기도 어렵거니와 體得하였다고 하여 남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作品이 자주 언제나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有名한 畵家나 名筆이라 할지라도 그 평생을 통하여 回心作이라고 할 수 있는 名作은 평생을 통해서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글씨 쓰는 법이나 그림을 그리는 법을 알았다고 해서 명작을 하루아침에 그려 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3) 一院秋苔와 道家의 藝術思想
儒敎는 人間을 중심으로 하는 人道主義思想이라면 道敎는 自然을 중심으로 하는 自然主義哲學이다. 道家에서의 自然의 개념은 物理的 또는 文學的 對象의 自然이 아니다. 내가 自然 속에 있지만 自然이 내 안에 와 있는 自然性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人間의 善行과 옳은 판단도 상대적인 것이요 自然의 영원한 常道는 아니라 한다. 도리어 人間自身의 主體까지도 부정하여 無欲, 無知, 無爲, 無名의 상태에 이르러 파악되는 자연이다. 따라서 否定의 論理, 超脫의 哲學이 성립된다. 人爲的인 有爲의 사상이 아니라 자연으로 되는 無爲의 철학이다. 一切의 인위적 요소를 無化하여 자기도 없는 無己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自然과 合一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 無의 철학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人爲의 慾求나 知識이나 行爲, 사람이 옳다고 하고 참되다 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참된 자연의 본질이 아니며 이런 판단과 행동과 생각은 자연의 常道에서 볼 때 악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自然스럽고 人造的이 아닌 無爲를 통해서 自然의 眞相이 드러나게 된다. 否定에 또 否定을 통해서 樸(자연성)이 드러나므로 이 樸實自然에서 나오는 생각, 말, 판단행위는 盡善 盡美한 것으로 본다. 道家의 自然主義는 厭世的이며 退嬰的인 것이 아니라 보다 진실하며 적극적 차원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秋史는 누구보다도 이 道家的 自然主義를 깊이 體得한 분이라 하겠다. 老子는 말하기를, “학문하는 것은 날마다 더(益)하는 것이요 修道(眞理)를 하는 것은 날마다 더(損)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라 하였다. 損하고 또 損하여 다 털어버리면 人爲가 없어도 하지 않은 것 없이 다 한 것이 된다. 이 때에 인간의 자연성이 드러난다고 한다. 이 때 나오는 三寶가 있으니 “一曰慈요 二曰儉이요 三曰不敢爲天下先”이라 하였다. 즉 첫째 사랑(자비심)이요, 둘째 검소(수식하고 사치하지 않음)함이요, 셋째 세상사람보다 먼저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秋史는, 내 胸中(마음․정신)에 五千字가 들어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어 글씨를 쓸 수 있고 그 書品, 畵品의 작품이 超出하여 一等品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한낱 속된 魔鬼의 쟁이(匠)가 될 뿐이라고 하였다. 이 때 五千字라 함은 道家의 祖宗인 老子 『道德經』을 지칭한 말이다.
道家의 超脫을 秋史의 작품 중에는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一院秋苔不掃除 한 정원에 가을 이끼를 쓸지 않았는데,
風前紅葉漸飄疎 가을바람에 서리 맞은 단풍잎이 우수수 지는구나.
虛堂盡日無人過 텅 빈 집 종일토록 지나는 사람 없는데,
老樹低頭聽讀書 늙은 나무 축 늘어져 나의 글 읽는 소리를 듣는구나
道家의 風은, 人工이 少하고 天品이 勝한 것이라야 藝術作品이 된다고 한다.
秋史는 沈桐庵熙淳에게 준 글에서 글씨 쓰는 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 士君子의 襟度가 넓고 커서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물이 흐르듯 氣韻이 팔 아래로 자연스럽게 통해야 한다.
둘째, 純然하게 天氣가 필묵에 行해서 너무 蹊逕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4) 黙笑居士自讚과 儒․佛․道를 會通한 人品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少年期에 자라서 靑年이 되고 壯年이 되면 成人으로서 成熟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한다. 上品之人으로 老熟해지면 小人이 되지 않고 士․君子가 되어, 賢人으로 더 進德, 修業하여 聖人․神人․至人으로 成格이 되기를 어려서부터 뜻을 두고 마침내 큰 씨알을 맺어야 한다. 莊子는 말하기를, 聖人은 無名하며 神人은 無功하며 至人은 無己라 하였다. 최후의 결실은 사람답게 成熟한 人格을 이루는데 있다.
秋史의 黙笑居士自讚은 자기를 두고 한 말이지만 萬人이 바라는 성숙한 理想的 人間像이라 하겠다.
當黙而黙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黙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黙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况 而知其免夫矣.
“잠잠하게 말하지 않을 때를 당하여 말하지 않고 잠잠하게 있으니 그 때 그 자리에 옳은 것이요, 마땅히 웃을만한 경우를 당하여 자연히 웃음이 나오는 것은 그 자리 그 상황에 맞는 일이다. 이럴까, 저럴까, 가한가, 불가한가를 가릴 때와 屈(구부릴)할까, 伸(펼)할까, 消(꺼짐)할까, 長(늘어남)할까를 결단할 때 動(움직임)하여 천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靜(고요함)하여 인정에 어긋나지 않고 예법에 맞으니, 黙하고 笑하는 뜻이 크도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으니 黙한들 무슨 잘 못된 것이 있겠는가. 그럴만한 경우를 당해서 마음이 天然(自然․本然)4)스럽게 웃음이 나온다면 웃는다고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나는 오직 스스로 나를 반성하여 크게 잘못함이 있는가를 자성할 뿐이다.”
結語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을 살고 간 秋史 金正喜 선생의 생애는 파란만장하였다. 그 博學多識한 학문과 포부를 떳떳하게 펴보지 못하고 불우하게 絶海孤島인 南海 濟州道에서 9년 동안이나 고초를 당하고 또다시 최후 만년에 北靑에서 老境을 보내고 돌아와 果川 선영의 산소아래서 5년을 지내며 생을 마쳤다.
선생의 인품은 인자하고 온화하지만 不義에 대해서는 確固不動하였다. 평생에 政治와 出世는 접어두고 오직 眞理探究와 學問硏究와 藝術活動에 정열을 쏟았다. 孟子가 말한, 善政보다 善敎가 더 중요하다고 한 것과 같이 社會를 바로잡고 平和의 세계를 이룩하려는 뜻을 가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처음부터 眞理의 근원을 찾으려 했고 이를 敎化하기 위하여 藝術活動을 하였다. 秋史의 藝術精神은 高古한 인격에서 高尙한 예술이 創出된다며 그 예술정신을 鼓吹하였다. 救世濟民의 뜻이 추사선생의 평생의 抱負요 그 業績이라 하겠다.
白坡禪師와 佛敎의 敎理를 논쟁할 때 쓴 「辨證十五條」를 보면 그 論說이 과격하고 論旨가 快快하여 보기에 민망한듯 보이지만 白坡禪師가 作故한 후 撰한 白坡碑文의 내용을 보면 白坡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고 大師의 長點을 大書特筆하였다. 학문은 嚴正하지만 이는 학문상의 토론이요 그의 특징과 장점과 인격은 남다른 점을 闡明한 것이다. 白坡문하인 雪竇에게 써 준 ‘百蘗’ 두 글자는 이를 잘 증명한다. 世間에서 秋史와 白坡는 악연같이 보지만 인간적으로는 친애하여 변함없는 것을 알 수 있다. 百丈은 大機를 잘 터득하였고 黃蘗은 大用을 깨친 高僧이지만 白坡는 大機大用을 겸비한 것이 그 長點이며 先覺이라는 뜻으로 百蘗 두 글자를 써 준 것이고 白坡碑의 내용도 이 뜻을 찬한 것이다.
추사의 도덕과 문예가 일치하는 사상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 처지에 따라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추사가 그의 아들에게 써준 <不欺心蘭>에 보면 난초를 그릴 때, 畵蘭이라고 하지 않고 寫蘭이라고 하였다. 난초를 그린다고 할 때에는 내가 내 앞에 대상화된 난초를 보고 그 모습을 따라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寫蘭이라 함은 내 인품에서 느끼고 감상된 마음 속의 난초를 그려 내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자기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 말고 성실하고 정직한 자세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한 줄기 난초 잎을 그리고 한 점의 좋은 꽃을 그린다 하더라도 스스로 반성해서 마음에 잘못된 점이 없어야 하며 이럴 때에만 남한테 그 그림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니, 열 눈이 자신을 주시해 보며, 열 손이 손가락질하는 것이니, 그 두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조그만 예술(小藝)도 반드시 誠意와 正心으로 속으로부터 우러 나올 때에만 비로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작은 것은 작은 데로 큰 것은 큰 데로 道心과 文藝가 일치함을 말한 것이다. 위대한 영혼이 반영된 것을 걸작의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가 높고 밝아서 활연관통하여 精義가 入神하였을 때 그려진 작품은 천하의 명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도 도심과 문예가 일치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경지에서 불교의 해탈이 있으며, 해탈한 경지에서 大機大用을 겸비하고 機用殺活을 자제롭게 하여 몽매한 대중을 제도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국 근대에 있어서 이루어진 秋史 金正喜선생의 업적은 오늘날 세계화시대에 있어서도 높이 선양될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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