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백두대간이어가기 (영취산~육십령)

강나루터 2017. 11. 5. 05:44

충절의 고향 장수를 지나다

 

산행일시:2009년04월19일

산행거리: 약 12km

산행시간: 3시간10분(10:54~14:02)

누구와: 송암산악회원 60여명과 함께

주요산행처:무룡고개-영취산(1075.6m,11:05)-덕운봉-북바위-민령-깃대봉(구시봉 1014.8m,13:26)-육십령(14:02,734m)

 

 

무척 오랜만에 산행에 나선다.

지난 7개월은 식당을 운영한다고 시간도 없어서 식당 근처에 있는 수원산과 주금산을 여러 차례 올랐었고 일동의 청계산과 사패산과 북한산을 몇 차례 다녀왔던게 전부였다.

오늘은 모처럼 대간 땜방을 하기로 하고 송암산악회 버스에 몸을 싣고 주논개의 고향인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이 있는 무룡고개에 도착한 시간이 10시50분이다.

<무령고개에 있는 산행안내판---영취산~중재때 찍은 사진>

여러 대원들이 잠시 신발끈을 조이고 일렬이 되어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맨 후미에서 시작하여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서 한명씩 한명씩 추월을 하다보니 선두에 끼어 영취산을 올랐다.

이곳 영취산은 대간에서 분기하는 호남정맥이 분기하는곳으로 유명한 곳인데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지만 이제와서 어찌할것인가?

<영취산 정상의 돌탑---영취산~중재 때 찍은 사진>

<영취산 정상석에서---영취산~중재 때 찍은 사진>

여러 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한더고 벅적거리는 정상을 벗어나 선두대장과 4~5명이 앞으로 진행한다.

대간길은 비교적 순탄하여 마라톤을 해도 될정도이며 좌측으로는 무령고개로 올라온 도로가 구불구불 노출되어 장관을 이루고 우측으로는 함양땅 서상면의 평화스러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야할 능선과 뒤로 좌측은 서봉, 가운데는 남덕유산, 뒷편 우측은 무룡산이다>

얼마가지 않아 작은 봉우리가 나오는데 도면상으로 보면 덕운봉이 맞는것 같으나 정상부에는 아무표식도 없고 덕운봉은 한동안을 더 가서 정상목을 설치하였다.

어디가 확실한 덕운봉인지는 모르지만 그길로 얼마를 왔을까 안부에 도착하니 육십령과 영취산의 중간지점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는데 누군가가 파손을 시켰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설치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망가뜨리는 사람은 무엇이란 말인가????

완만하면서 작은 오르내림을 계속하며 산죽이 사방으로 펼쳐진 능선을 지나다보니 북고개에 닿는다.

논개생가는 물론이고 생가지라는 대곡저수지와 호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장안산과 서봉과 남덕유가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북바위---이 사진은 성봉현씨가 찍은 사진입니다>

북바위는 옛날 삼국시대에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고 있던 신라와 백제가 이 지역에서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를 한 나라의 장수들이 이 바위위에서 북을 울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북고개에서 잠시조망을 즐기고는 다시 앞서간 대장을 쫓아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민령(민재)에 도착 한다.

<민재---이 사진은 성봉현씨가 찍은 사진입니다>

민재의 전설 전설에 의하면 민재는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숙부인 주달무가 장수의 부호인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팔자 논개 모녀가 팔려가게 된 운명을 거부하고 외가가 있는 안의현으로 도망을 갈 때 넘었던 고개에서 생겨난 고개라고 하는데 민령(민재)우측으로는 논개의 무덤이 있다는 금당리로 하산하는 길이고 좌측으로는 생가지로 내려 가는 길이다. 다시 말해서 민재 우측은 무덤이 있고 좌측으로는 생가가 있는 곳인데 왜? 논개는 고향에 묻히지 못했을까?

논개라는 충절의 여신은 "주논개는 1574년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3세가 되던 해에 부친 주달문이 죽자 숙부인 주달무가 장수의 부호인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팔자 논개 모녀가 도망을 갔으며 이일로 장수현감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모녀는 무죄로 방면되어 현감 최경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몇 년이 지난 후 임진왜란이 나고 경상우병사로 병사를 지휘하던 최경회는 진주성싸움에서 패하여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논개는 기생으로 변장하여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논개는 고향에 묻히지 못했을까?  육십령에서 경상도쪽으로 고개를 내려서면 도적을 피해 온곳이라는 뜻의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이 있는데 논개의 출생지인 대곡리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주씨 중 일부가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신을 왔다고 하는데 논개의 묘는 피적래에서 마주보이는 방지마을에 있다고 한다. 논개가 민며느리로 팔려가게 된 운명을 거부하고 외가인 안의현으로 도망갈 때 넘었던 고개 민재 아래 첫 마을이 방지마을인데 논개의 묘소를 찾아낸 이는 전북문화재전문위원인 오치황씨로 오씨는 자신의 조부가 남긴 문집 <경독재집>에 실린 글 “장수 의병들이 논개를 부실로 맞은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방지마을에 안장했다”에서 실마리를 찾았다고 한다.

진주에서 장수까지 산길 120리를 직접 더듬으며 설화를 확인했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찾아낸 최 장군과 논개가 장수땅에 묻히지 못했는데 당시 의병들은 장수현감을 지낸 최 장군의 주검을 논개의 고향인 장수로 운구하려 했다고 하는데 장수 사람들이 왜군의 보복을 두려워 거절하는 바람에 출생지에 묻히지 못하고 백두대간 넘어 지금의 방지마을에 묻었다는 것이다. 방지마을은 논개의 외가인 안의현이 가깝고 논개의 친족들도 많이 살았다고 하며 논개의 부친이 원래 방지마을에서 살았다고도 전하는데 의병들은 피붙이들이 가까이 있으니 묘소를 돌봐줄 것이라는 기대로 방지마을에 묘를 썼다는 것이다. 이런 기대는 헛되지 않아 그 오랜 세월 방지마을 사람들은 묘소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면서도 매년 9월9일 제례를 지냈다고 한다.

아직 4월중순인데 요사이 며칠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오늘의 더위도 만만치 않다. 민령에서 깃대봉을 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기는하나 직사광선을 그대로 받으며 가는길이고 더위로 인한 지열이 숨쉬기 힘들정도로 솟아오르니 여간 불쾌하지 않다.

<깃대봉---이 사진은 성봉현씨가 찍은 사진입니다>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는 말처럼 무더위 속에서도 시간이 흐르니 우리는 깃대봉에 도착을 하였는데 밋밋한 정상부에는 깃대봉이라는 정상판이 설치되어 있는가 하면 정상석에는 구시봉이라고 되어 있으니어떨떨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깃대봉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이 이 지여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마다 깃발을 꽂았다고 하여 깃대봉이라 불렸었으나 산의 형태가 구시형이라 하여 2006년 1월 6일 구시봉으로 지명이 변경 되었다고 한다.

한동안시간을 보내며 조망을 즐기다보니 중간대원들이 속속 도착한다.

<깃대봉을 내려서며 본 육십령 일대---이 사진은 성봉현씨가 찍은 사진입니다>

선두는 자리를 뜨고 저편 아래보이는 육십령을 향해 내려서 억새밭 길을 지나며 보는 육십령 일대와 덕유산은 한가롭게 보였으며 육십령 함양방향으로는 채석장으로 보이는 흉물도 보였고 송곳같이 솟은 할미봉과 그 뒤로 남덕유가 연무에 쌓여 있다.

헬기장을 지나 경사진 길을 내려서다보면 깃대봉 샘터에 도착을 하지만 가뭄이 정점에 달해서인지 샘물은 고사하고 습기조차도 찾을 수가 없다.

<육십령 휴게소---이 사진은 성봉현씨가 찍은 사진입니다>

이제 육십령에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에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내려서니 육십령에 도착한다.

언젠가 무박으로 덕유산을 종주할 때 이곳에서 출발을 하였지만 밤이라 주변을 식별할 수도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육십령과 서봉, 남덕유산 그리고 할미봉의 참모습을 본다.

영남 선비들의 본 고장으로 경상도의 함양과 전라도의 오지인 장수를 이어주는 고개는 백두대간의 덕유산 남쪽에 있는 육십령(六十嶺)으로 육십령은 그 굽이만큼이나 수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는데 이 고개 이름을 육십령이라 부르는 계기에는 여러 얘기가 전하는데,

첫번째는 안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가 육십리이고, 장수 감영에서도 육십리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하며두번째는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육십 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얘기가 있으며 세번째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산적의 화를 피해기 위해 육십 명이 모여 넘는 고개라는 얘기인데 옛날에 육십령 고개에는 산적들이 많아서 함부로 넘나들지 못했는데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산 아래 주막에서 며칠씩 묵어가면서 육십 명의 장정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떼를 지어 넘어야 했다는 것이다.근처에는 당시 장정들이 모인 주막이 있던 곳이라는 장군동(壯群洞)이 있고 산적들을 피해서 살다가 이룬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피적래(避賊來)란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이런 곳이었기에 육십령에는 그 산굽이만큼이나 수많은 전설이 전하기도 하는데 산적으로 인해 얽힌 슬픈 이야기로 산행기의 끝을 맺는다.옛날, 한 경상도 총각이 전라도에 사는 규수에게 장가를 들고 처가에 머물기를 어느덧 일 년이란 세월이 흘러가자 신랑은 본가 형편도 궁금하기도 하고 이제는 신부를 경상도에 있는 본가로 데리고 갈 때가 되었기에 우선 혼자 본가에 다녀오기로 하고 높고 산적이 많기로 유명한 육십령을 넘다가 산적들에게 붙잡혀 물건을 다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이러한 사정을 알도리가 없는 전라도 신부는 남편이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매일 동구밖에 나가 기다리기며 여러 날을 보내다 신부는 마침내 쓰러져 죽으니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출처 : 기억할만한 지나침
글쓴이 : 범솥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