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反間之計(반간지계)

강나루터 2018. 6. 23. 04:30


 


反間之計(반간지계)


적의 마음을 치는 게 으뜸이요 적의 성을 치는 것은 그만 못하다 마음으로 싸워 이기는 게 군사로 싸워 이기는 것보다 낫다. 마음으로 무릎 끓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

 

뒤집을 반        사이 간        갈지        셀 계

 

아군을 적군에 보내어 거짓정보를 퍼트리거나 적군을 이용하여 거짓정보를 유포하게 만드는 계책 반간지계(反間之計)의 유래(由來) : 손자병법(孙子兵法) 용간(用間), 삼국지(三國志)의 여러 부분에 반간계(反間計)를 사용한 흔적이 많은데,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주유(周瑜)가 사용한 반간지계(反間之計)를 제일로 들어 볼 수 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조조(曹操)20만 대군과, 손권(孫權),유비(劉備)의 연합군 5만의 전투였다.

여기서 손권(孫權),유비(劉備)군이 승리함으로 적벽대전(赤壁大戰)이 유명하다.

적벽(赤壁)이란 말은 사실 조조(曹操)군의 함선이 불타면서 그 불기운에 벽이 벌겋게 되었다고 해서 적벽(赤壁)이다.

지금 쓰여 있는 적벽(赤壁)이란 글씨는 주유(周瑜)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승리 후 썼다고 유래된다.

 

()나라의 조조(曹操)는 기반이 완전히 다져있는 상태라 적벽(赤壁)에서의 전투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숫자만 봐도 20만 대 5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조조(曹操)군은 북쪽 특유의 기마술이 강한 군사들이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패한다하더라도, 나라에는 크게 어려움을 겪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나라의 손권(孫權)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기반이 다져져 있는가도 아니고 3만의 병력밖에 없던 터라 유비(劉備)2만을 받아들여 연합군을 만드는 것이 당연하였다.

또한 이 전투에서 패한다면 나라도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조조(曹操)군의 최대 약점은 수전(水戰)이었다. 수전(水戰)을 할 줄 아는 병사라고는 형주(荊州)에서 투항한 채모(蔡謨)와 장윤(張允)이 이끄는 형주군(荊州軍)이 전부였다. 조조(曹操)는 채모(蔡謨)와 장윤(張允)을 수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조조(曹操)군을 훈련토록 만들고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오()군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기도 했다.

 

()군에 사신으로 간 장간(蔣幹)은 주유(周瑜)와는 동문수학한 친구로서 주유(周瑜)를 회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주유(周瑜)는 위()나라의 조조(曹操)군이 수전(水戰)에 약함을 알고 있었기에 현재 걱정하는 것은 채모(蔡謨)와 장윤(張允)이었다. 그들이 현재 조조(曹操)군을 훈련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조조(曹操)군을 계속 훈련시킨다면 수전(水戰)에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해서 주유(周瑜)는 반간지계(反間之計)를 사용하였다. 항복을 권유하러온 장간(蔣幹)을 반갑게 맞이하며 오랜만에 회포를 풀기위해 연회를 베풀고 함께 술을 마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일부러 술이 취한척하며 상 위에 채모(蔡謨)와 장윤(張允)이 쓴 것처럼 만든 편지를 올려놓고 잠자는 척 하였다.

 

채모(蔡謨)와 장윤(張允)이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물증이라 생각하고 장간은 그 편지를 숨겼다.

주유(周瑜)는 또 한편으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때 채모(蔡謨)와 장윤(張允)이 자신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장간(蔣幹)이 들리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에 장간(蔣幹)은 확신을 가지고 위()나라로 돌아가 조조(曹操)에게 편지를 내놓으며 채모(蔡謨)와 장윤이 배신했다고 이야기를 했고, 조조(曹操)는 그 편지를 보고 채모(蔡謨)와 장윤(張允)을 참수했다. 이로서 주유(周瑜)의 반간지계(反間之計)는 성공했고 이 때문에 조조(曹操)군은 적벽(赤壁)에서 대패를 당하였다.

 

이처럼 상대방에게 거짓정보를 흘려 적을 깨뜨리는 것이 반간지계(反間之計) 


출처 : blue mountain(계백)
글쓴이 : 계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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