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김수온

강나루터 2018. 6. 27. 06:01



김수온(金守溫,1409~1481)


조선전기의 유.불학자,문신


본관 영산

호 괴애 ·식우

별칭 자 문량, 시호 문평

활동분야 문학, 정치


1. 내 용


1409년(태종9년)에 충북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오얏골에서 4형제중 세째로 태어났다. 그는 총명하거나 명석했다기 보다는 무섭도록 노력하는 사람으로 1438년(세종20년) 29세에 진사가 되고, 1441년(세종23년) 32세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책의 인쇄와 글자교정을 하는 관직)로 있다가 곧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집현전 학사가 되어 정인지를 비롯한 학자들과 「치평요람」을 편찬하였다.


한편 1445년(세종27년) 승문원교리로서 유성원 등 여러 문관 의관들과 더불어 모든 의술의 처방을 망라한 「의방유취」라는 의학서적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유학자이면서 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서 불경에 밝았는데 당시 불교를 숭상하던 왕실과 인연을 맺고 조선초기 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도 했으며 37세 때인 1446년(세종28년)부사직의 관직으로 있을 때는 석가의 족보책인 「석가보」를 다시 보완하고 수정하여 더욱 자세히 편찬하였으며, 세조 때엔 법화경. 화엄경이 유교보다 훨씬 심오하다는 말까지 하면서 불교를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도 맏형의 영향 인 듯하며 그의 맏형 수성(守省)은 집현전 학자로 있다가 불교에 조예가 깊어 마침내는 스님이 되어 승명을 '신미(信眉)'라고 한 사람으로 세종.세조 등 불교를 숭상하는 왕을 도와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간행하였다. 1449년(세종 31년)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고, 1451년(문종1)에 전농시소윤(典農侍少尹)이 되었다.


1456년(세조2년) 명(明)의 사신 진감(陳鑑) 일행이 조선 방문시 김수온이  '희청부(喜晴賦)'라는 시문(詩文)을 지어  화답(和答)하여 명(明)의 한림원(翰林院) 학자들을 감탄케 하였으며,1457년(세조3년) 문과중시(文科重試)응시하여 급제하였고,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가 되었다.


1459년(세조5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으며, 특히 1466년(세조11년) 왕이 종신과 문무백관 100여명을 불러 술을 내리며 즉석에서 글을 짓게 하는 이른바 임시 과거 형태인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하였고 , 같은해 등준시(登俊試)에 다시 급제  장원하여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에 오르고, 상으로 백미 20석을 받는 등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로부터 문과와 무과의 장원에서 백미를 하사하는 관례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후 호조판서를 거쳐 1468년(예종 즉위)에 보국승록대부에 오르고 1471년(성종2년)엔 임금을 잘 받들고 정치를 잘한 신하에게 내린 좌리공신의 4등 공신이 되어 영산부원군에 봉하였으며, 1474년(성종5년) 벼슬이 영중추부사(정1품)에 이르렀다. 고전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세조의 명으로 원각사 비명을 지었고, 낙산사 종명을 지었고 금강경을 국문으로 번역하였다. 당시 형님 고승 신미와 더불에 불법에 깊었고 한때 회암사에서 스님이 되려고 한바 있다.


그는 학문과 문장을 게을리 하지 않아 당시의 대학자 서거정,강희맹 등과 문명을 다투었고 4서5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명화계감(明皇誡鑑)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국어 발전에 크게 힘썼다.


그의 저서로는 그의 호를 붙인 '식우집24권'이 있고,  석보상절(釋譜詳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을 집필 편찬하였으며, 문집으로 사리영웅기, 묘적사중창기, 화암사중창기, 도성암기, 보은사중창사액기, 중은암기, 상원사중창기, 원통암정관사중창기, 다수사상전기, 봉선사기, 원각사비명, 낙산사범종명,몽유도원도제문, 인성대장경발문 등이 있으며, 한시(漢詩)로 술악부사( 述樂府辭),  수필집 열운정기(悅雲亭記) 등의 작품이 있고, 그의 친필로 엮은 '복천사사적기(福泉庵事蹟記)'은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1481년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 성종은 "문평"이라는 시호와 그를 제사하는 부조묘를 내렸는데 원래는 종곡에 있던 것을 송시열선생이 보은읍 지산리 선학동으로 옮겼다고 한다.그의 유해는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에 묻혔다.


2. 신숙주와 일화


그는 책 읽기를 즐겨하는 젊은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은 다 읽고 남의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는데 책 주인들은 그에게 책 빌려 주기를 꺼려 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책이 일단 그의 손에 들어가면 되돌려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 읽는 습성은 과팍해서 내용을 읽고 읽어서 외게 되면 그 책장은 찢어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남의 책을 빌려서도 한장씩 뜯어서 소매 속에 넣아가지고 다니며 외고 다 외면 버리니 책 한권을 외면 한권이 열권을 외면 열권이 다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즐겨 빌려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그 당시 대학자요 정치가로 널리 알려진 신숙주에게 세종이 직접 전해준 「고문선(古文選)」이라는 책이 있었다. 신숙주가 대단히 아끼고 소중히 여겨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었다. 책을 알고 온 그가 하도 간청하기에 그것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신숙주가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가보니 아뿔사 책을 한장 한장 뜯어서 벽에 발라 놓았는데 그것도 연기에 그을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신숙주가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 고 물으니 "내가 누워서 외우느라 그리하였네" 책을 읽음에 비장한 각오로 배수진을 쳐놓고 몰두하려는 그의 정신력이 엿보인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으로 글공부를 하여 서거정,강희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이가 김수온이다. 그의 호는 괴애 또는 식우 인데 '식우"란 혹을 씻는다는 뜻으로 그의 목에 혹이 나서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손으로 혹을 쓰다듬는 버릇이 있어 붙여진 것이라 한다.


3. 스님과의 일화


그가 영천군수로 있을때의 일이다 왕의 비호를 받는 어떤 스님이 자신의 세력을 믿고 여러 고을을 시끄럽게 하기도 하고 지방의 수령들을 깔보아 업신여기는 등 갖은 행동을 부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런데 마침 그 스님이 영천 고을에 왔다 그는 넌지시 스님과 내기를 걸었다."나와 당신이 불교의 이치를 서로 토론하여 지는 사람은 자팡이로 마구 맞아도 때리는 사람을 원망하지 말기로 합시다" 그러자 그 스님도 선뜻 좋다고 했다 그리고 먼저 거침없이 불경을 줄줄외며 밝은 지식과 능숙한 말솜씨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상대방 스님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답변은 커녕 그저 머리만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그의 위엄 앞에 질려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대뜸 문창호지가 바르르 떨도록 호령을 했다."네 이놈 늙은 중놈이 불경도 모르면서 어찌 중생의 복리를 빈다고 떠들어 댈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는 지팡이로 사정없이 때리니 그 스님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부리나게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그후 그 스님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지방의 수령들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한다.


4. 명나라 방문


세조가 그를 북경에 보내 우리나라에 없는 불경을 구해 오게 한 일이 있었다. 그는 중주원부사로 명나라를 방문한 것인데 그가 중국땅으로 들어가면서 하루는 "감로사'라는 절에서 자게 되었다. 그런데 이절의 주지스님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스님으로 김수온이 조선의 학자라는 말을 듣고 미리 지필묵으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절 안으로 들어가니 벽에 묵화가 그려져 있는 매화가 보였다.


그는 곧 그 주지 스님이 준비해 둔 붓을 들어 문기둥에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조계종에서는 황매선사, 감로사는 흑매, 만약 빛깔을 가지고 본다면 반야는 아니로구나!"이걸 본 주지 스님이 "과연 큰 학자로구나" 하고 놀라며 뜰 아래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대접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빌려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