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육신(生六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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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生六臣)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를 말한다. 세조의 찬위 사건을 불의의 행위로 단정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에 따라 두문(杜門) 혹은 방랑으로 일생을 보냈다. 이들은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추모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생육신과 사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생육신과 기타 세조 찬위에 분개하여 벼슬길을 단념한 사람들을 통칭하여 청담파로도 분류하고, 사림에 넣기도하는 등 학자에 따라 이견이 존재한다.
경남 함안 서산서원의 생육신을 모신 충의사(忠義祠)
생육신의 구분
생육신은 조선 제6대왕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6인의 신하로 성삼문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무인인 유응부도 거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모두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화를 입은 인물은 사육신을 비롯해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선 인물을 대개 사육신으로만 알고 있는 까닭은 바로 생육신으로 자처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육신전」을 저술한 것에서 비롯된다. 남효온은 자신의 문집인 『추강집』에 사육신에 관한 기록을 「육신전」으로 남겼고, 수양 대군의 불법에 맞서 저항한 이들의 명성은 재야의 사림(士林)들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성리학의 이념인 충절과 의리가 한층 강화된 조선 후기 숙종대를 거쳐 정조대에 이르러 마침내 국가적인 공인을 받게 되었다.
즉, 1456(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사육신(死六臣)에 대칭하여 생육신이라 하였다. 곧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을 말한다. 이들은 세조 즉위 후 관직을 그만두거나 아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조의 즉위를 부도덕한 찬탈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며 지내다 죽었다. 중종반정 후 사림파가 등장, 사육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게 되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생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서산서원
生六臣 事蹟碑(생육신사적비:六頭 거북비로서 각 면마다 생육신 한분 한분의 사적을 새겼음).
생육신 명단
생육신의 명단에도 논란이 있어 남효온을 생육신으로 간주하는 주장과 권절을 생육신으로 주장하는 견해가 나뉘어 있다.
김시습
성담수(成聃壽)
원호
이맹전
조려
남효온
권절(權節) : 남효온 대신 생육신에 꼽히기도 한다.
생육신인 성담수의 외조카는 이기와 이행 형제이다. 성담수는 외조카를 통해 율곡 이이 가문과도 인척관계를 형성한다.
사육신과 함께 사생육신(死生六臣), 혹은 십이신(十二臣)으로도 부른다.
김시습(金時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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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 | |
출생 | 1435년 조선 한성부 |
사망 | 1493년 (59세) 조선 충청도 홍산(현재의 충청남도 지역) 무량사 |
사인 | 병사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열경(悅卿) |
학력 | 1447년 중시에 장원 |
직업 | 학자, 문인, 승려, 시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배우자 | 남씨 부인 |
부모 | 김일성(부), 선산 장씨 부인(모) |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의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생애
생애 초기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무반 출신으로 충순위를 역임했다.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다 하며, 3세에 스스로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한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내용에 감동한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년기에 그는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 김반, 윤상 등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은둔과 방랑 생활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경기도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조 정변 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꺼리며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안응세(安應世)·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숙주나물과 동인지, 정창손의 행차를 보게 되면 서슴없이 욕설을 날리며 조소하였다. 한편 그가 만나 교유하던 인물로는 서거정, 김담, 김종직 등이었다.
생애 후반
성리학 사상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느 시점에 승려가 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1466년(세조 12)에 김시습은 충청남도 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과 단종에 관련되어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김시습이 증축한 건물은 년(영조 4)에 화재로 동학사가 불에 소실되었다가 후대에 1864년(고종 원년)에 만화(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
1472년에는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언젠가 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한명회(韓明澮)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하기도 했다.
한명회의 시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김시습의 시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욕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그의 해학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배꼽을 잡고 웃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의 무량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그가 큰 한을 품었다고 하였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사후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남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공주의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된다. 향년 59세(1493년).
가계
할아버지 : 김겸간(金謙侃)
아버지 : 김일성(金日省)
어머니 : 울진 장씨(蔚珍 張氏)
부인 : 남효례(南孝禮)의 딸
저서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
《관동일록(關東日錄)》: 100여편의 시
《금오신화(金鰲新話)》: 후미에 내용을 수록했음
《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 법화경을 찬미했다.
《산거백영(山居百詠)》(1468년): 시집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1476년)
《신귀설(神鬼說)》
《애민의(愛民議)》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
《유호남록(遊湖南錄)》
《유관동록(遊關東錄)》
《유관서록(遊關西錄)》
《유금오록(遊金鰲錄)》
《천형(天形)》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태극설(太極說)》
《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華嚴一乘法界圖註幷書)》: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주석한 것이다.
사후에 지어진 김시습 관련 저서
《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 : 기자헌이 김시습의 시를 중심으로 폈다.
《매월당집(梅月堂集)》: 김시습 사후 18년에 중종의 명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10년이 걸려 3권의 문집으로 처음 완성됐다.
성담수(成聃壽)
성담수(成聃壽) | |
출생 | 조선 |
사망 | ? 조선 |
국적 | 조선 |
별칭 | 자는 미수(眉叟) 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 시호는 정숙(靖肅) |
학력 | 1450년 진사 |
직업 | 정치인, 문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부모 | 아버지 성희(成熺) |
친척 | 동생 성담년, 여동생 성씨, 외조카 이기, 외조카 이행, 당숙 성승, 6촌 형 성삼문, 성삼빙, 성삼고 |
성담수(成聃壽, ? ~ ?)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은일사로, 세조 때 단종 폐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사직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미수(眉叟) 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이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성담년은 그의 친동생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그의 6촌 형이고, 명종 때의 정승 이기와 용재 이행은 그의 생질이었다. 교리를 지낸 성희(成熺)의 아들이다. 본관은 창녕이다.
생애
예문관대제학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개(成槪)이고, 아버지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성희(成熺)이며, 어머니 이씨는 호조판서를 지낸 이견기(李堅基)의 딸이다. 성승은 그의 당숙이고 성삼문은 그의 6촌 형이었다. 1450년(세종 32년)에 진사가 되었고, 승문원 교리 등을 지냈다. 단종 복위 사건으로 6촌간인 성삼문 등이 사형당했으며, 그도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어 김해로 귀양 갔다가 3년 만에 겨우 풀려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 성희는 3년 뒤에 풀려나서 공주에 돌아왔으나 유배지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한다. 그는 1450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관직을 단념한다. 그 후 세조는 여러 번 그에게 참봉, 봉사 등의 관직을 내렸지만 받지 않았다. 벼슬을 단념하고 경기도 파주의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사후 정숙(靖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세조는 그의 아버지 성희에게 참봉 벼슬을 내렸다가 그에게도 참봉 등의 관직을 내렸는데 그는 세조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뜻임을 간파하고 이를 거절하였다. 그 뒤 그와 함께 은거한 대표적인 신하 다섯명인 김시습, 이맹전(李孟專), 원호, 조려(趙旅), 남효온 등과 함께 사육신에 대비하여 생육신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사후 성종 때 동생 성담년이 관직에 나가기도 했다.
1782년(정조 6)에 김시습(金時習)ㆍ원호(元昊)ㆍ남효온(南孝溫) 등과 함께 정조의 특명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함께 봉향하였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성송국(成松國), 성삼문,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성제원(成悌元), 성혼(成渾) 등 성씨 일족들을 제향한 서원에 배향, 함께 제향되고 있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성개(成槪)
아버지 : 성희(成熺)
어머니 : 이견기(李堅基)의 딸
동생 : 성담년(成聃年), 성종 때 출사
동생 : 창녕 성씨
기타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은 그의 6촌 형이고[1], 명종 때 을사사화를 날조하는데 가담한 이기는 그의 외조카로, 여동생의 아들이었다.
원호(元昊)
원호(元昊, 1397년 ∼ 1463년 )는 조선 단종 때의 문신·학자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조의 찬위와 단종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무항(霧巷)·관란재(觀瀾齋),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생애
1397년에 태어났으며 원호의 본관은 원주 원씨로 아버지는 별장을 지낸 원헌(元憲)이고 어머니 역시 원주 원씨로 국자감 진사를 원천상(元天常)의 딸이자 원천석(元天錫)의 조카딸이었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단종이 수양 대군에 의해 영월로 쫓겨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살았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는 조려, 이수형과 함께 영월을 찾아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다.
1457년 단종이 죽자 원주에 내려가 있는 것을 세조가 호조 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생전에 손자 원숙강(元叔康)이 출사하였으나 예종 때 사관으로서 〈세조실록〉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필로 인해 살해당하자, 자신이 쓴 책을 모두 소각하고 자손들에게 글을 읽어 명리를 바라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다.
사후
숙종 때 그 절개를 찬양하여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1782년에는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증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사후 강원도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다.
가족 관계
증조부 : 원광붕(元廣朋)
할아버지 : 원중량(元仲良)
아버지 : 원헌(원憲)
어머니 : 원천상(元天常)의 딸
부인 : 영월 신씨, 신을현(辛乙賢)의 딸
장남 : 원효행(元孝行)
차남 : 원효렴(元孝廉)
삼남 : 원효건(元孝乾)
사남 : 원효곤(元孝坤)
사위 : 오치종(吳致宗)
이맹전(李孟專)
이맹전(李孟專, 1392년 ~ 1480년)은 조선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거창 현감 등을 지냈다. 단종 때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내어 권력을 휘두르자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선산으로 내려가 김종직 등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죽은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이희경(李希慶)
아버지 : 이심지(李審之)
어머니 : 여극승(呂克勝)의 딸
동생 : 이계전(李季專)
부인 : 일선김씨, 김성미(金成美)의 딸
장남 : 이순(李恂)
손자 : 이보원(李堡源)
차남 : 이췌(李惴)
삼남 : 이돈(李惇)
사남 : 이이(李怡)
장녀 : 밀양인 박사제(朴斯悌)
조려(趙旅)
조려(趙旅, 1420년 ~ 1489년)는 조선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자이다.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 은자(漁溪隱者). 공조 전서 조열(趙悅)의 손자, 증 사복시정 조안(趙安)의 아들. 1453년에 진사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숨어 살았다. 본관은 함안(咸安). 경상남도 함안군 출생.
생애
1420년(세종 2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1453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명망이 높았다. 그 뒤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즉위하자, 불합리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섬길 수 없다 하여, 폐위된 단종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망설임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안 군북에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456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강원도 영월을 방문하여 수시로 단종의 안부인사를 원호의 관란정(觀瀾亭)에 유숙하며 원호, 이수형 등과 함께 국사를 논하면서 어린 임금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후에 원주 치악산에 올라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고 치악산 정상에 원호, 이수형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새겼다. 1457년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이 거듭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단종이 사사당하자 문상을 하러가던 그는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하였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했다 한다.
그 뒤 단종왕의 넋을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모신 후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 아래에 은거하여 사람들은 그가 머무르던 서산을 백이산이라 불렀다. 단종 승하 후 3년간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고 1489년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그를 여러 차례 관직에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후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1698년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자 이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 등이 상소를 올려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이맹전, 원호, 남효온, 성담수와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후에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지어졌다.
1781년 이조 판서 겸 동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가증(加贈)되고 시호는 정절(貞節) 저서로는 후손 증 이조 참판 조영석이 정리한 어계집(漁溪集)이 전한다.
저서
《어계집》(漁溪集)
남효온(南孝溫)
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고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의령(宜靈),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 김시습 · 조려(趙旅) · 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장군 남이, 영의정을 지낸 남곤, 문신 남포의 친족척이다. (이손)문신 한산군 이손의 사돈으로 남효온의 딸이 이손의 3남 이온언의 부인이며 한산군 이손이 남효온의 집안을 보살펴줘서 추강집에 감사함을 기록했음
생애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낸 일이 늘 마음에 걸려 있던 그는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타나서 아들을 죽인 것을 책하자, 세조가 물가로 옮기게 한 소릉(현덕 왕후의 능)의 복위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임사홍·정창손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유랑 생활로 인생을 마쳤다.
죽은 후 1504년 갑자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폐비 윤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하여 부관참시되었다. 그가 저술한 《육신전》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간행되었다. 중종(1513년) 때, 소릉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년)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학문
남효온은 홍유손, 정희량과 마찬가지로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며 동시에 청한자 김시습의 제자였다. 영의정 재(在)의 5대손으로 태어나 생원 전의 아들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들어가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고 주계정(朱溪正) · 심원(深源) · 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특히 36세 성종 20년(1489, 기유년)에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평양에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추강 남효온의〈단군묘 알현〉이라는 시가 이채로운 모습이다.
(檀君生我靑丘衆) 단군이 우리를 낳으시니 우리 강산에 사람이 많지 않나
(敎我彛倫浿水邊) 패수에서 윤리도덕을 가르치시고
(採藥呵斯今萬世) 약초를 찾고 형벌을 내린 지 만세가 되어도
(至今人記戊辰年).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진년을 기억한다네
무진년(戊辰年)은 바로 단군이 나라를 세웠던 기원전 2333년이다. 이 시는 단군에 대한 찬미와 함께 남효온은 관서지방의 고조선, 고구려, 고려 등의 유적지를 두루 찾아다니며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나타낸 것이 특별하다. 단군묘에 대한 논란으로 당시(1489년 전후) 평양에 있었다는 단군묘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관계
증조부 : 남간(南簡)
할아버지 : 남준(南俊)
할머니 : 강석덕(姜碩德)의 딸
숙부 : 남제(南悌)
숙부 : 남율(南慄)
사촌 : 남효순(南孝純)
아버지 : 남전(南恮)
어머니 : 이곡(李谷)의 딸
부인 : ?
아들:남충세
사위 : 임성(任誠)
사위:이온언(한산군 이손의 3남으로 한산군 이손이 사돈 남효온의 집안을 보살펴줌 추강집에 기록되어 있음)
손녀(남충세의딸)사위:유관(남효온의손녀가 유관에게 시집가서 좌의정 유홍을 낳음ᆞ 유홍의 외증조부가 남효온임)
손녀(남충세의 딸)사위:이강(한산군 이손의 손자)
이강의 큰아들 이준인의 딸이 좌의정 유홍의 부인임
저서
《추강냉화》(秋江冷話)
《육신전》(六臣傳)
《수향기》(睡鄕記)
《추강집》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고담궤설》(高談詭說)
《귀신론》(鬼神論)
권절(權節)
권절(權節, 1422년 ~ 1494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단조(端操), 호는 율정(栗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447년 세종 29년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에 이르렀으나 수양대군의 단종 폐위음모에 불참하였고, 단종이 폐위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세조는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거짓으로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일생을 보냈다.
사후 조선 숙종 때 그의 무덤 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생애
어릴 적부터 힘이 세고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남이 장군과 더불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한다.
1447년 세종 29년 친시문과 시험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집현전에 들어갔고, 세종대왕의 눈에 들어 세종대왕은 그의 글과 무예의 뛰어남을 알고 집현전 교리로 승진시켰다.
이후 평소 정분이 있던 수양대군이 여러번 그를 찾아와 단종을 몰아내는 일에 대해서 의논해 왔으나, 권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수양대군의 계획에 응하지 않았다. 뒤에 수양대군이 여러번 사람을 보내 계유정난에 동참할 것을 여러 번 권유받았으나, 귀머거리로 가장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1455년 교리가 되었으나 곧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발탁되고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나 조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권절의 재주를 아까워한 세조는 다시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를 사양하고, 거짓으로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일생을 보냈다.
사후
사후 조선 숙종 때 그의 무덤 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1791년 정조 15년 창절사(彰節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가족 관계
증조부 : 권귀(權貴)
할아버지 : 권엄(權嚴)
아버지 : 권심(權審)
어머니 : 유계조(柳繼祖)의 딸
저서
《율정난고》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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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金鰲新話)》는 조선 전기의 시인, 작가, 승려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금오산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최초의 한문 단편소설집이다.
수록 단편
《금오신화》에는 아래와 같은 다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내용
한국 전기체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으며, 초기 소설의 형태로 등장인물은 모두 재자가인이며,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한가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출판
《금오신화》는 일본에서 전해오던 목판본을 최남선(崔南善)이 발견하여 1927년 잡지 《계명》 19호에 소개를 하였다. 이 목판본은 1884년 동경에서 간행된 것으로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1999년 9월에는 16세기 경 조선 중기의 문신 윤춘년이 필사한 필사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조선시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쓴 한문 소설로 조선 때 남원(南原) 지방에 사는 양생(梁生)이라는 총각이 주인공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애정소설이며, 특히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명혼소설(冥婚小說)이라고 부른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려 있다. 국내의 것으로는 김집(金集, 1574 ~ 1656)의 수택본 한문소설집에 <이생규장전>과 더불어 필사된 것이 있다.
줄거리
전라도 남원에 사는 총각 양생(梁生)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의 구석방에서 외로이 지냈다. 배필 없음을 슬퍼하던 중에 부처와 저포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 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간 궁벽한 곳에 묻혀서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관계를 맺고 며칠간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여기서 양생은 자기와 사랑을 나눈 여자가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의 혼령임을 알았다. 여자는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생은 홀로 귀가했다.
어느날 밤에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은 타국에 가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 양생은 여자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지냈다.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었다.
평가
「만복사저포기」가 실린 『금오신화』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문소설집으로 소설사적 가치가 있어 「만복사저포기」는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과 함께 그 주제상 전기(傳奇)성을 띠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특히 남원시 왕정동에 있는 ‘만복사지’로 인해 현실성을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은 조선시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쓴 한문 소설로 조선 때 개성에 살던 이생(李生)이 주인공이다. 한글의 자유를 주장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강조한 작품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간의 사랑을 다룬 명혼소설(冥婚小說)이라는 점에서 《금오신화》 중에 김시습의 다른 작품인 만복사저포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소설집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려 있다. 국내의 것으로는 김집(金集, 1574 ~ 1656)의 수택본 한문소설집에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와 더불어 필사된 것이 있다.
줄거리
고려 때 개성에 살던 이생(李生)이라는 열 여덟 살의 수재(秀才)가 서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선죽리(善竹里)에 사는 대귀족의 딸인 최처녀를 보게 되었다. 최처녀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설렌 이생은 시를 적은 종이를 최처녀가 사는 집 담 안에 던졌고 최처녀 또한 이에 화답을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생은 최진사의 집을 찾아 정략결혼을 맺기로 약속을 했다. 며칠간 최처녀와 시간을 보낸 이생은 그 이후에도 매일같이 최처녀의 집을 드나들었지만 아버지가 이를 알고 크게 꾸짖으며 다른 곳으로 쫓아버렸다.
최처녀를 이생이 개성을 떠난 지 여러 달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해 몸져 누웠고 최처녀의 부모는 딸이 이생과 주고받은 시를 보고서야 병의 원인을 짐작했다. 최처녀의 부모는 이생의 집에 중매를 보내 자식들을 맺어주자고 청하고 이생의 부모도 이를 받아들여 두 사람은 혼례를 치렀다.
이생은 높은 벼슬에 올라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신축년에 홍건적의 난으로 양가 가족이 모두 흩어지고 그 와중에 최처녀도 순결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 도적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난리가 끝난 후 집에 돌아온 이생이 죽은 아내를 다시 만나 그녀와 함께 죽은 부모의 유해를 수습하고 전과 같이 금슬좋게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최처녀는 더 이상 이승에 머무를 수 없다고 말한 뒤 슬퍼하는 이생을 남겨두고 종적을 감추었다. 이생 또한 아내를 장사지낸 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절개를 칭찬하였다.
응용 작품
국립창극단 김시습의〈금오신화〉중 ‘이생규장전’(1993년)
국립국악원의 정가극 '영원한 사랑 이생규장전' (2012, 2013년)
이생규장전(Lee-Saeng's Story, 2006, 한국), 애니메이션 6분, 감독 김인웅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김시습이 지은 한문 소설집인 금오신화 중의 한 편으로 개성의 상인인 홍생이 주인공이다. 내용은 평양의 부벽루에서 선녀가 된 기자(箕子)의 딸을 만나 나라의 흥망과 서로의 사랑에 대하여 시로써 화답하며 놀았다. 새벽에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자 홍생은 앓아 누웠고 나중에 기자의 딸의 도움으로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줄거리
개성의 상인 홍생(洪生)이 달밤에 술에 취하여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가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는 시를 지어 읊었더니 한 아름다운 처녀가 나타나 홍생의 글재주를 칭찬하면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홍생이 처녀와 시로써 화답하며 즐기다가 신분을 물었더니 처녀는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의 딸로서 천상계에 올라가 선녀가 되었는데, 달이 밝자 고국생각이 나서 내려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기씨녀는 홍생의 청을 받고 긴 시 한 수를 더 읊었는데, 그 내용은 자기들의 사랑의 아름다움과 고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것이었다. 그뒤 기씨녀는 천명을 어길 수 없다며 사라지고 홍생은 귀가하여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병이 들었다.
어느날 홍생은 기씨녀의 주선으로 하늘에 올라가게 된다는 내용의 꿈을 꾸고 세상을 떠났다.
평가
<취유부벽정기>는 평양을 배경으로 하고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토속적인 성격 및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제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자의 작품인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및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과 동일하다. 정신적인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구별된다.
<취유부벽정기>는 불의와 폭력에 의하여 정당한 삶과 역사가 좌절되는 아픔을 표현한 작품이어서 짙은 우수가 서려 있다. 귀가한 주인공이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죽는 것으로 되어 있어 작품이 비극적 성격을 지니나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그러한 성격이 다소는 약화되어 있다.
<취유부벽정기>의 해석과 평가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엇갈려 있다. 작품에 나타난 사건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역사적 사건의 우의(寓意)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선녀와의 연애 및 선계로의 승화를 현실도피로 보고 그것은 작자의 현실주의적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기에 작품은 결국 작자의 정신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모순에 찬 세계를 개조해서 세계와 화합하려는 자아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대결을 통하여 소설적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다.
<취유부벽정기>를 도가적(道家的) 문화의식의 투영으로 해석하여 작품에 나타난 갈등을 동이족(東夷族)의 문화적 우월감과 함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극렬한 반존화적(反尊華的) 민족저항의 분한(憤恨)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김시습이 지은 한문 소설집인 금오신화 중의 한 편으로 경주에 사는 박생(朴生)이 주인공이다. 내용은 주인공이 꿈속에서 겪은 일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몽유구조의 소설로서 작자의 철학사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줄거리
경주에 사는 박생(朴生)은 유학(儒學)으로 대성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뜻이 높고 강직한 데다 인품이 훌륭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귀신 · 무당 · 불교 등의 이단에 빠지지 않고자 유교경전을 읽기도 하고, 세상의 이치는 하나뿐이라는 내용의 철학논문인 <일리론(一理論)>을 쓰기도 하여 뜻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어느날 꿈에 저승사자에게 인도되어 염부주(炎浮州)라는 별세계에 이르러 염왕(閻王)과 사상적인 담론을 벌었다.
유교 · 불교 · 미신 · 우주 · 정치 등 다방면에 걸친 문답을 통하여 염왕과 의견 일치에 이름으로써, 자신의 지식이 타당한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염왕은 박생의 참된 지식을 칭찬하고 그 능력을 인정하여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위문(禪位文)을 내려주고는 세상에 잠시 다녀오라고 하였다. 꿈을 깬 박생은 가사를 정리하고 지내다가 얼마 뒤 병이 들었는데 의원과 무당을 물리치고 조용히 죽었다
.
평가
남염부주지에서 작품에 나타난 염부주와 염왕은 작가 김시습이 자신의 사상이 타당한 것임을 입증해보이기 위하여 설정한 가상적인 존재이다. 이것을 매개로 하여 그 타당성이 입증된 사상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이다.
첫째는 유교가 불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유교사상은 주인공의 기본사상이자 작자의 기본입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불교의 미신적 타락상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둘째는 세계에는 현실세계만 존재할 뿐 천당·지옥·저승 같은 별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세상의 이치도 하나일 뿐이라는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다. 즉, 미신적·신비주의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현실적·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폭력과 억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에 대하여, 백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경고하는 정치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남염부주지>는 이같은 사상의 타당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사상에 투철한 유능한 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릇된 세상을 은연중 비판하고 있다. 작자의 깊은 사상을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사상을 밀도짙게 다룬 최초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는 김시습이 지은 한문 소설집인 금오신화 중의 한 편으로 고려 때 개성에 살고 있던 한생(韓生)이 주인공이다. 내용은 주인공이 꿈속에 용궁으로 초대되어 가서 겪은 일을 주된 내용으로 한 작품으로서 구조유형상 몽유소설(夢遊小說)이라 부른다.
줄거리
글에 능하여 그 재주가 조정에까지 알려진 한생(韓生)이 어느 날 꿈속에서 용궁으로 초대되어 간다. 용왕의 청을 받고, 새로 지은 누각의 상량문을 지어주었더니 용왕은 그 재주를 크게 칭찬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접한다.
잔치가 끝난 뒤 한생은 용왕의 호의로 궁궐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물건들을 골고루 구경한다. 하직할 때는 용왕으로부터 구슬과 비단을 선물까지 받는다. 꿈에서 깬 한생은 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고 명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
평가
용궁부연록의 작품은 비극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현실과 이상의 대립을 하나의 문제로 제기한다. 자신은 지적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자 하나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데에서 오는 작자의 불만을 나타낸 작품이다. 김시습은 어릴 때에 탁월한 글재주를 인정받아 조정에 초대되어 가서 세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작자의 전기적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으로 흔히 해석되고 있다. 작품의 기본적인 성격은 『금오신화』에 실린 다른 작품들의 경우와 유사하나 문제의식은 비교적 깊지 않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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