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스크랩] 黃鶴樓(황학루)- 崔顥(최호 唐.704-754)

강나루터 2018. 10. 5. 19:54




黃鶴樓(황학루)- 崔顥(최호 唐.704-754)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땅에는 쓸쓸히 황학루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한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 년을 유유히 떠 있네.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력한양수)  맑은 냇가에는 한양의 나무그늘 무성하고
芳草萋萋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앵무주 모래톱에는 봄풀들만 우거졌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해는 저무는데 고향이 어디던가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하사인수)  강 위의 물안개에 시름만 깊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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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鶴樓는 북송 시대부터 20 세기 5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교의 명산성지로 이용되었으며

또한 역대의 저명한 시인 최호(704~754), 이백, 백거이(772~846),

가도(779~843), 육유(1125~1210), 양신(1488~1559), 장거정 등의

작품으로 인해 천하절경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 중 당대 최호()의 작품인 황학루로 인해 더욱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천보 3년에 이백이 황학루에 올라 즐기고 있다가

최호의 시를 발견하고 찬탄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장강의 그림 같은 풍경을 시로 쓰고자 하였으나 최호의 경지를 뛰어넘지

못함을 탄식하며 붓을 씻어 버리고 배를 타고 강남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黄鶴楼送盂浩然之广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李白(이백)

                    黃鶴樓에서 맹호연을 광릉으로 전송하며

 

故人西辞黄鶴楼(고인서사황학루)

친구는 서쪽에서 황학루를 떠나


烟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안개 자욱한 꽃핀 삼월에 양주로 내려가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외로운 돛 먼 그림자는 푸른 허공으로 사라져가고


唯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오직 보이는 건 장강이 하늘가로 흐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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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鶴樓의 유래
장강 가에 신씨(辛氏)가 운영하는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와서 술을 외상으로 달라고 했다고 한다.
마음씨 좋은 주인은 술을 주었는데,
그 노인은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이렇게 와서 외상술을 마시고 갔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 노인이 와서
오늘은 그동안의 외상값을 갚겠다고 하면서 먹던 귤 껍질로

주막의 벽에다 학(황학)을 그렸다.

다 그리고 난 후 노인이 손뼉을 치자

그림의 학이 밖으로 나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러자 노인이 앞으로 이렇게 나처럼 학을 춤추게 하면 손님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몰려들 것이니, 그것으로 외상값을 갚는 셈 치자고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이 떠난 후 주인이 손뼉을 치니

역시 황학이 벽에서 나와 춤을 추었다.
이에 소문이 퍼져 손님이 끊이질 않았고, 신씨는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 노인이 다시 찾아와 외상값을 갚았으니
학을 데려 가겠다고 하면서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에 신씨는 노인이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고,
주막을 그만 두고 그 자리에 노인을 기리는 누각을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黃鶴樓라고 한다.



출처 : 마음의 보물창고
글쓴이 : 華谷.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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