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동춘당 송준길

강나루터 2020. 1. 13. 16:51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이야기

(한숭동의 슬로스쿨로 가자 편집)

조선 중기 격동의 시대에 명신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있었다면, 대전에는 우암과 동춘이 있다. 대전 회덕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은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다. 두 분은 문묘에 오른 동국 18현에 속한다. 사계 김장생과 아들 신독재 김집도 나란히 18현에 올랐다.

 

동국 18현이란 우리나라 역사상 문장과 도덕이 가장 뛰어난 큰선비다. 4성(聖) 6현(賢)과 더불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어, 전 국민이 그 위업과 공적을 추모하고 숭앙하는 훌륭한 나라의 스승이다. 그러므로 가문에서 현인이 나오게 되면 직계, 방계를 가릴 것 없이 더없는 영광이었다.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는 공자(孔子)를 정위(正位)로 증자(曾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4성(聖)과 송조육현(宋朝六賢), 우리나라의 십팔현(十八賢)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대전 선비정신의 뿌리는 동춘(同春堂 宋浚吉; 1606~1672)과 우암(尤庵 宋時烈; 1607~1689)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도 대전에서는 광산 김씨 ‘광김(光金)’과 회덕의 은진 송씨 ‘은송(恩宋)’이라면 알아준다.

 

은진 송씨 본관은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논산시 은진면. 대전에서는 대덕구 송촌동에 모여 살았다. 송씨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 송촌동이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 대덕문화원 자료로는 이 고장의 인물 74명 중 송씨가 37명이나 된다. 이곳이 은진 송씨의 본거지임을 짐작케 한다.

 

은진 송씨의 상징성은 지명에 반영됐다. 송준길의 종가가 있는 곳은 행정지명도 송촌동이요, 주변아파트 단지도 ‘선비마을’이다.  법동과 송촌동을 잇는 ‘동춘당로’가 생겼고, 송준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동춘당 생애길’도 조성됐다. 두 길은 ‘동춘당’에서 교차한다.

 

대전 대덕구의 원래 이름은 회덕(懷德). ‘덕을 품은 곳’이라는 뜻이다.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 (대인회덕 소인회토; 大人懷德 小人懷土)란 공자의 논어에서 따왔다.

 

현재의 대덕은 일제강점기 1935년, 대전과 회덕을 병합하면서 한 자씩 따 붙인 지명이다. 회덕은 대전의 뿌리이고 회덕의 근간은 선비정신이다. ‘회덕구’로 개명하면 더 좋을 것 같다

.

원래 송준길이 태어난 곳은 회덕·송촌동이 아니다.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인걸은 지령(地靈)인가. 송준길이 태어난 집은 뒷날 선생의 스승이 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송준길의 어머니는 사계선생의 아버지 김계휘의 사촌인 광주목사 김은휘의 딸이었다. 친정에 가서 몸을 풀었던 것. 그가 태어날 때 부친 송이창은 46세, 모친 광산김씨는 42세였다. 세살때 조부 송응서가 돌아가시자 부친을 따라 회덕으로 내려왔다.

 

동춘의 인물됨은 유별났다. 선생을 한번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감탄했다. “정신은 가을 물결 같고 모습은 옥으로 다듬어 놓은 듯하다.” 동춘은 뒤늦게 9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글을 읽기 시작했다. 영민한 아들이 공부로 몸을 버릴까 염려한 아버지의 헤아림 때문이었다.

 

동춘과 우암은 형제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먼 숙질간이자 두 사람의 할머니 또한 자매간이었다. 집안이 가난했던 우암이 어린 시절 동춘당의 집에 와서 공부하기도 했다. 한 살 위인 동춘에게 우암은 ‘춘형(春兄)’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동춘이 어려서부터 우암과 동문수학하며 사계 김장생 (1548~1631)의 예학(禮學)을 계승하게 됐다. 하지만 둘의 성격만은 너무나도 달랐다. 동춘당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양보가 없었고, 우암은 의(義)를 벗어나는 문제를 참지 못했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른 인물이다. 무려 3,000번이나 거론된다고 한다. 조선 후기 모든 논쟁의 진원지였으며 사후에도 공과(攻過)가 거론될 만큼 화약고였다.

 

그에 반해, 동춘은 온화한 성격으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예학을 아우른 인물이다. 아호인 동춘(同春堂) 그대로 항상 봄바람같이, 늘 상대를 따뜻하게 배려했다. 평생 자기중심을 지키고 산분이었다. 생전에 동춘은 대사헌을 스물여섯 차례, 참찬을 열두 차례, 이조판서를 세 차례 제수 받았다.

 

우암과 두 사람은 마치 한 나무에서 뻗은 두 가지처럼 나란히 세상의 물길을 헤쳐 갔다. 후대의 역사와 학문세계에서조차 두 사람은 흔히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한 사람처럼 바라보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양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정통을 한 몸에 갖고 있던 송준길

 

동춘은 1624년에 진사(進士)에 오른 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거의 취임하지 않았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후 자신의 스승이었던 우암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면서 당시 이조판서였던 김집의 천거로 동춘도 출사했다.

 

이후 우암은 인조대의 간신 김자점이 영의정에 오르자 거기에 항의해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동춘 역시 1649년에 김자점을 탄핵하고 낙향했다. 동춘은 10여 년 후 대사헌과 병조 판서를 거쳤다.

 

조선 선비 사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서 치열하게 맞붙기 시작한 시기가 율곡 당대이다. 율곡은 우계 성혼, 송강 정철과 같은 서인에 속하였지만, 반대파인 동인 인사들과 소통하고자 많은 노력을 한 인물이다.

 

동춘은 당파가 뚜렷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 예학을 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했다. 이 바탕에는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영남 예학의 거유인 우복 정경세의 막내 사위가 된 영향이 컸다. 정경세는 당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임금이 혼수를 내렸다.

 

동춘도 동서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동춘은 갈등 조정과 화해의 명수였다. 자기주장만을 고집하거나 남을 이기려는 맘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벌의 방법론에서도 효종과 차이가 있었다. 동춘은 ‘내수외양(內修外樣)’을 주장했다. 먼저 안으로 닦은 뒤 밖으로 물리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처럼, 먼저 내치의 안정을 이룬 다음에 그 힘으로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동춘은 영남 남인의 거목 정경세(鄭經世)의 사위였던 탓에 영남학파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항상 분쟁의 중심에 선 우암과 조정자 역할에 바빴다.

 

지금은 우암-동춘으로 우암을 우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대에는 동춘의 이름을 앞세웠다고 한다. 스승 사계를 닮아 성리학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사의 절차를 그에게 물어 시행할 정도였다.

 

 

 

대전시가 보유한 유일한 ‘보물’ 건축물 동춘당

 

동춘당은 대전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옛 건축물이다. 송준길의 호 동춘은 별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송준길의 아버지 청좌와 송이창(宋爾昌; 1561~1627)이 처음 세웠던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다. 고택은 그 전에 건립되었으나, 별당인 동춘당은 1643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후학들에게 강학하기 위해 정침 앞쪽에 지었다.

 

한옥은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이다. 따라서 집주인의 인품이나 성향이 건물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동춘당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요란한 장식이나 호화로움이 없는 절제된 아름다움, 자연과 동화하려는 건물구조는 송준길의 단아한 인품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듯하다.

 

건축학적으로도 지역 사대부가의 별당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동춘당 뒤편 고택에는 동춘의 국불천위(國不遷位)가 별묘(別廟)에 따로 모셔져 있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가문에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 종가,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종가 등이 있다.

 

동춘당 생애 길은 송준길의 출생과 학업, 향촌 활동 등 전 생애를 길과 연계해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다. 전체 구간은 5㎞에 달하나 동춘당~옥류각 구간이 진수다. 계족산 쪽으로 길을 잡아 계류를 따라 20여 분 올라가면 바위에 쓴 선생의 글씨가 나타난다. ‘초연물외(超然物外).’ 세속의 바깥에 있고, 인위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비래사 입구에 석주를 세워 건립한 옥류각이 있다. 정(亭)은 자연 속에 지은 그냥 간단한 집, 누(樓)는 이 층으로 떠 있는 집, 각(閣)은 이에 사랑채나 온돌방이 더해진다. 옥류각은 송준길을 기리기 위해 1693년(숙종 19)에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 1630~1709)이 중심이 되어 세운 누각이다. 이곳에서 송준길은 우암 송시열, 송애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다. 우암이 남간정사를 지은 것이 1683년이니까 옥류각은 남간정사에서 영감을 받아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춘당 집안에는 두 명의 여성이 유명하다. 하나는 동춘의 외손녀 인현왕후이고, 하나는 호연재 김씨(浩然齋; 1681~1722)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동춘의 둘째 사위다. 명성황후가 존경했던 인물도 동춘이었다. 동춘의 차녀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생모이며,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호연재는 동춘의 증손자 송요화의 부인이다. 당시 허난설헌을 비롯한 몇 안 되는 사대부 출신 여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생 출신들이 여류문학의 한 주류를 이뤘던 당대를 비추어볼 때 보석 같은 인물이다.

 

동춘과 우암, 두 사람이 우리 역사에 새겨 놓은 궤적은 선명하다. 효종의 북벌정책을 비롯한 두 차례 예송 사건을 거쳐 기호학파의 학문을 완성하고 마침내 문묘에 배향되기까지,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었다.

 

세상은 늘 인(仁)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의(義)만 가지고도 안 된다. 두 가지를 잘 조화시켜야 한다. 동춘과 우암은 바로 그런 점에서 잘 조화를 이뤘다. 동춘은 평생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지 않는 등 백성을 살피고 배려한 대학자이자 큰 선비였다.

동춘당 이야말로 송준길 선생의 분신이다. 지금은 아파트 숲 속에 있는 탓에 분위기가 많이 퇴색했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도 고택엔 예학(禮學)의 깊이와 여러 문인의 시향이 감돈다.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이야기

(한숭동의 슬로스쿨로 가자 편집)


조선 중기 격동의 시대에 명신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있었다면, 대전에는 우암과 동춘이 있다. 대전 회덕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은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다. 두 분은 문묘에 오른 동국 18현에 속한다. 사계 김장생과 아들 신독재 김집도 나란히 18현에 올랐다.

 

동국 18현이란 우리나라 역사상 문장과 도덕이 가장 뛰어난 큰선비다. 4성(聖) 6현(賢)과 더불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어, 전 국민이 그 위업과 공적을 추모하고 숭앙하는 훌륭한 나라의 스승이다. 그러므로 가문에서 현인이 나오게 되면 직계, 방계를 가릴 것 없이 더없는 영광이었다.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는 공자(孔子)를 정위(正位)로 증자(曾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4성(聖)과 송조육현(宋朝六賢), 우리나라의 십팔현(十八賢)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대전 선비정신의 뿌리는 동춘(同春堂 宋浚吉; 1606~1672)과 우암(尤庵 宋時烈; 1607~1689)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도 대전에서는 광산 김씨 ‘광김(光金)’과 회덕의 은진 송씨 ‘은송(恩宋)’이라면 알아준다.

 

은진 송씨 본관은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논산시 은진면. 대전에서는 대덕구 송촌동에 모여 살았다. 송씨들이 모여 살던 동네라 송촌동이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 대덕문화원 자료로는 이 고장의 인물 74명 중 송씨가 37명이나 된다. 이곳이 은진 송씨의 본거지임을 짐작케 한다.

 

은진 송씨의 상징성은 지명에 반영됐다. 송준길의 종가가 있는 곳은 행정지명도 송촌동이요, 주변아파트 단지도 ‘선비마을’이다.  법동과 송촌동을 잇는 ‘동춘당로’가 생겼고, 송준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동춘당 생애길’도 조성됐다. 두 길은 ‘동춘당’에서 교차한다.

 

대전 대덕구의 원래 이름은 회덕(懷德). ‘덕을 품은 곳’이라는 뜻이다.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 (대인회덕 소인회토; 大人懷德 小人懷土)란 공자의 논어에서 따왔다.

 

현재의 대덕은 일제강점기 1935년, 대전과 회덕을 병합하면서 한 자씩 따 붙인 지명이다. 회덕은 대전의 뿌리이고 회덕의 근간은 선비정신이다. ‘회덕구’로 개명하면 더 좋을 것 같다

.

원래 송준길이 태어난 곳은 회덕·송촌동이 아니다.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인걸은 지령(地靈)인가. 송준길이 태어난 집은 뒷날 선생의 스승이 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송준길의 어머니는 사계선생의 아버지 김계휘의 사촌인 광주목사 김은휘의 딸이었다. 친정에 가서 몸을 풀었던 것. 그가 태어날 때 부친 송이창은 46세, 모친 광산김씨는 42세였다. 세살때 조부 송응서가 돌아가시자 부친을 따라 회덕으로 내려왔다.

 

동춘의 인물됨은 유별났다. 선생을 한번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감탄했다. “정신은 가을 물결 같고 모습은 옥으로 다듬어 놓은 듯하다.” 동춘은 뒤늦게 9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글을 읽기 시작했다. 영민한 아들이 공부로 몸을 버릴까 염려한 아버지의 헤아림 때문이었다.

 

동춘과 우암은 형제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먼 숙질간이자 두 사람의 할머니 또한 자매간이었다. 집안이 가난했던 우암이 어린 시절 동춘당의 집에 와서 공부하기도 했다. 한 살 위인 동춘에게 우암은 ‘춘형(春兄)’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동춘이 어려서부터 우암과 동문수학하며 사계 김장생 (1548~1631)의 예학(禮學)을 계승하게 됐다. 하지만 둘의 성격만은 너무나도 달랐다. 동춘당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양보가 없었고, 우암은 의(義)를 벗어나는 문제를 참지 못했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른 인물이다. 무려 3,000번이나 거론된다고 한다. 조선 후기 모든 논쟁의 진원지였으며 사후에도 공과(攻過)가 거론될 만큼 화약고였다.

 

그에 반해, 동춘은 온화한 성격으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예학을 아우른 인물이다. 아호인 동춘(同春堂) 그대로 항상 봄바람같이, 늘 상대를 따뜻하게 배려했다. 평생 자기중심을 지키고 산분이었다. 생전에 동춘은 대사헌을 스물여섯 차례, 참찬을 열두 차례, 이조판서를 세 차례 제수 받았다.

 

우암과 두 사람은 마치 한 나무에서 뻗은 두 가지처럼 나란히 세상의 물길을 헤쳐 갔다. 후대의 역사와 학문세계에서조차 두 사람은 흔히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한 사람처럼 바라보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양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정통을 한 몸에 갖고 있던 송준길

 

동춘은 1624년에 진사(進士)에 오른 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거의 취임하지 않았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후 자신의 스승이었던 우암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면서 당시 이조판서였던 김집의 천거로 동춘도 출사했다.

 

이후 우암은 인조대의 간신 김자점이 영의정에 오르자 거기에 항의해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동춘 역시 1649년에 김자점을 탄핵하고 낙향했다. 동춘은 10여 년 후 대사헌과 병조 판서를 거쳤다.

 

조선 선비 사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서 치열하게 맞붙기 시작한 시기가 율곡 당대이다. 율곡은 우계 성혼, 송강 정철과 같은 서인에 속하였지만, 반대파인 동인 인사들과 소통하고자 많은 노력을 한 인물이다.

 

동춘은 당파가 뚜렷했던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율곡 이이와 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 예학을 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했다. 이 바탕에는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영남 예학의 거유인 우복 정경세의 막내 사위가 된 영향이 컸다. 정경세는 당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임금이 혼수를 내렸다.

 

동춘도 동서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동춘은 갈등 조정과 화해의 명수였다. 자기주장만을 고집하거나 남을 이기려는 맘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벌의 방법론에서도 효종과 차이가 있었다. 동춘은 ‘내수외양(內修外樣)’을 주장했다. 먼저 안으로 닦은 뒤 밖으로 물리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처럼, 먼저 내치의 안정을 이룬 다음에 그 힘으로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동춘은 영남 남인의 거목 정경세(鄭經世)의 사위였던 탓에 영남학파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항상 분쟁의 중심에 선 우암과 조정자 역할에 바빴다.

 

지금은 우암-동춘으로 우암을 우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대에는 동춘의 이름을 앞세웠다고 한다. 스승 사계를 닮아 성리학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사의 절차를 그에게 물어 시행할 정도였다.

 

 

 

대전시가 보유한 유일한 ‘보물’ 건축물 동춘당


 



동춘당은 대전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옛 건축물이다. 송준길의 호 동춘은 별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송준길의 아버지 청좌와 송이창(宋爾昌; 1561~1627)이 처음 세웠던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다. 고택은 그 전에 건립되었으나, 별당인 동춘당은 1643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후학들에게 강학하기 위해 정침 앞쪽에 지었다.

 

한옥은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이다. 따라서 집주인의 인품이나 성향이 건물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동춘당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요란한 장식이나 호화로움이 없는 절제된 아름다움, 자연과 동화하려는 건물구조는 송준길의 단아한 인품을 그대로 구현해 놓은 듯하다.

 

건축학적으로도 지역 사대부가의 별당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동춘당 뒤편 고택에는 동춘의 국불천위(國不遷位)가 별묘(別廟)에 따로 모셔져 있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가문에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대표적으로 퇴계 이황 종가, 하회마을 서애 류성룡 종가 등이 있다.

 

동춘당 생애 길은 송준길의 출생과 학업, 향촌 활동 등 전 생애를 길과 연계해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다. 전체 구간은 5㎞에 달하나 동춘당~옥류각 구간이 진수다. 계족산 쪽으로 길을 잡아 계류를 따라 20여 분 올라가면 바위에 쓴 선생의 글씨가 나타난다. ‘초연물외(超然物外).’ 세속의 바깥에 있고, 인위적인 것을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비래사 입구에 석주를 세워 건립한 옥류각이 있다. 정(亭)은 자연 속에 지은 그냥 간단한 집, 누(樓)는 이 층으로 떠 있는 집, 각(閣)은 이에 사랑채나 온돌방이 더해진다. 옥류각은 송준길을 기리기 위해 1693년(숙종 19)에 제월당 송규렴(霽月堂 宋奎濂, 1630~1709)이 중심이 되어 세운 누각이다. 이곳에서 송준길은 우암 송시열, 송애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다. 우암이 남간정사를 지은 것이 1683년이니까 옥류각은 남간정사에서 영감을 받아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춘당 집안에는 두 명의 여성이 유명하다. 하나는 동춘의 외손녀 인현왕후이고, 하나는 호연재 김씨(浩然齋; 1681~1722)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동춘의 둘째 사위다. 명성황후가 존경했던 인물도 동춘이었다. 동춘의 차녀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생모이며,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호연재는 동춘의 증손자 송요화의 부인이다. 당시 허난설헌을 비롯한 몇 안 되는 사대부 출신 여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생 출신들이 여류문학의 한 주류를 이뤘던 당대를 비추어볼 때 보석 같은 인물이다.

 

동춘과 우암, 두 사람이 우리 역사에 새겨 놓은 궤적은 선명하다. 효종의 북벌정책을 비롯한 두 차례 예송 사건을 거쳐 기호학파의 학문을 완성하고 마침내 문묘에 배향되기까지,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었다.

 

세상은 늘 인(仁)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의(義)만 가지고도 안 된다. 두 가지를 잘 조화시켜야 한다. 동춘과 우암은 바로 그런 점에서 잘 조화를 이뤘다. 동춘은 평생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지 않는 등 백성을 살피고 배려한 대학자이자 큰 선비였다.

동춘당 이야말로 송준길 선생의 분신이다. 지금은 아파트 숲 속에 있는 탓에 분위기가 많이 퇴색했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도 고택엔 예학(禮學)의 깊이와 여러 문인의 시향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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