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전라도 어메의 독백
참 세상이 요지경 속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혼인도 기피하고, 혹, 혼인하더라도 자식도 안 낳으며, 평생을 길러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잊어버리는 혼자만의 낭만과 쾌락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변해 가는 모양입니다.
우스갯소리에, 아들을 낳아도 품에 있을 때만 내 자식이고, 장가가면 사돈의 팔촌, 돈 잘 벌면 사돈 아들, 잘난 아들 국가 자식, 빚진 아들 내 아들! 아예 길러준 부모님 생각은 잊어버리는 이 세태(世態)를 어찌하면 좋겠는지요?
그 어미의 심정을 장성군 북하면 월성리에 사시는 ‘용강댁’ 윤순덕(78) 어르신의 독백(獨白)을 ‘남인희’님이 받아 쓰신 글이 가슴을 울려 전해 봅니다.
친근하고 구수한 전라도 어메의 그냥 독백하듯이 뱉어내는 말이 어떤 시보다 언어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보다 인생의 지혜가 뛰어납니다. 또한 어느 도인(道人) 법문보다도 진리가 깊고, 또 어떤 개그맨보다 해학이 넘쳐, 여간 감동적이 아니네요.
【아가, 어매는 시방 꼬추 밭이다. 해가 참말로 노루꼬랑지만큼 남았다야. 뭔 급헐 일 있겄냐. 오늘 허다 못허믄 낼 허믄 되제. 낼도 행이나 비오믄 놀아서 좋고, 빛 나믄 일해서 좋고. 요새는 복분자 따러 댕겨야. 돈 삼만완씩 생기는 것도 오지다.
아, 일헌 사람은 내 일에 재미를 붙이고 살아야제. 나 혼차만 된(힘든) 시상이 어딨다냐. 내가 일헌다, 허고 내 자신헌티도 생색내지 말고, 노는 것 맹키로 살아라. 어매도 새 각시 때 사 일이 좋았가디. 내가 일헌 대로 애기들 입에 밥들어간게, 일허믄 어쨌든간에 믹인게, 일에 재미를 붙였제.
꼬추가 참말로 잘 컸어야. 올해는 600주 숭궜다. 이 놈이믄 니그들 칠 남매 짐장허고 양님헐 꼬칫가리는 맹글겄제. 봐라, 촌에 산게 어매는 이라고 재미를 본다. 일곱 마지기 농사 지서서 니그들 끄니에 양석 대는 것도 재미지다.
밥이 보약이어야. 밥을 많이 묵어라. 아그들도 배가 뽈깡 인나게 잘 믹이고, 어른들도 밥심 나게 묵고 살아라. 어매는 항시 잘 챙겨 묵는다. 요새는 묵은지가 질로 개안허니 맛나드라. 어매 혼자 있다고 거석헌 생각 말어. 나는 한나도 안 심심허다. 밭에 나오믄 천지가 다 내 벗이여. 항!
밤으로는, 어짤 때믄 니그 아부지 사진 쳐다본다. 지비는 거그서 핀안허요 어짜요, 물어본다. 생전 넘 괴롭게 안허고 산 냥반인디 핀안허시겄제. 앞으로 옆으로 우애허고 살아라. 어매는 이날 평상 넘허고 다툴 일이 없드라. 저 사람이 조깨 거석허믄 내 맘을 쪼깨 접으믄 되야.
혹간에 나쁜 맘이 들라 그러믄 ‘꿀떡’ 생켜불어라. 그라제, 꿀떡 묵는 것맹키로. 내가 좋으믄 저 사람도 좋은 것이여. 내가 웃으믄 저 사람도 웃는 뱁이다. 앞에, 옆에가 모다 내 거울이여.
그라고 아가, 여그 잔 봐야. 여그가 내 금고다. 시숫대야 속에다 중헌 것을 다 너놓고 댕긴다. 빈 몸으로 후적후적 밭에 댕긴께 참말로 핀해야. 늙어진께 요라고 꾀가 는단마다. 머리가 더 좋아진개비여. 하이고, 참말로. 내가 말해놓고 내가 우솨 죽겄네.】
어떻습니까? 이 시골 어머니의 독백이! 자식 공부시켜 장가보내 놓고도 어머니의 한없는 자비(慈悲)가 가슴에 넘칩니다. 한문의 ‘친(親)’자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親)’은 ‘어버이 친’ 자입니다. 어머니(母親), 아버지(父親), 어버이는 다정하고 사랑이 많습니다. 어버이는 나와 제일 가까운 분입니다. 옛날 옛적 어떤 마을에 어머니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멀리 볼일을 보러 가면서 저녁 다섯 시에는 꼭 돌아온다고 약조하였지요.
그런데 다섯 시 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여섯 시가 되었는데도 아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왜 안 돌아올까. 걱정이 태산 같아서 동구 앞까지 나가 보았지만,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요. 아들이 오는 것을 멀리까지 보려면 높은 데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큰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아들이 오는가 하고 눈이 빠지도록 바라보았고 마침내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정성스러운 광경을 글자로 표시한 것이 친(親)자입니다.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아들이 오기를, 바라보고[見] 있다.
이 3자가 합하여서 친(親)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무 위에 올라가서 아들 오기를 바라다보는 부모님의 지극한 마음! 그것이 바로 친(親)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친구(親舊), 친절(親切), 친밀(親密), 친목(親睦), 친화(親和), 친애(親愛), 친숙(親熟), 친근(親近)이란 낱말이 생겼습니다. 또 절친(切親)이니 간친(墾親)이니 하는 다정한 말도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친(親)’자 밑에 붙은 말 중에 나쁜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서로 친하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인간관계에 필시 있어야 할 기본원리, 근본 감정은 ‘친(親)’이 아닐까요?
요즘 세상이 너무 삭막합니다. 그건 아마 사회를 맑고 밝고 훈훈하게 하지는 못할지 언정 서로 물어뜯기만 하는 정치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관계가 이 ‘친’자와 같이 사이가 없는 관계로 이루어지면 참으로 좋겠네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10월 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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