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蕩平)의 교지(敎旨)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동생인 금(昑)이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영조(英祖)이다. 영조가 즉위한 초기에는 소론파(少論派)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왕은 붕당의 폐해를 깊이 느껴 붕당의 대립을 중지하고 융화시키려는 뜻이 있었다. 원년 정월에 빛나는 탕평(蕩平)의 교시를 내려, 마땅히 붕당의 습성을 버리고 공평함에 힘쓰며 불편부당하게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와 왕실을 보전해야 한다고 유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인무옥(壬寅誣獄)의 진상이 폭로되어 왕은 그 수괴 【소론】 인 김일경(金一鏡) 및 목호룡(睦虎龍)을 주살하고 소론 무리들을 귀양 보내고 노론 사람들을 채용하였다. 그렇지만 원래 왕은 당파의 조정과 융화를 주요한 것으로 삼았으므로, 한 당파에 오랫동안 정권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즉위 3년에 다시 소론의 우두머리인 이광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등을 등용하고 노론의 무리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김일경의 잔당인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켰다가 평정되었으며, 이후 그 당파들이 여전히 여러 차례 준동을 부렸으므로, 왕은 점차 소론의 불평한 무리들을 주살하여 제거하고 많은 노론 인사들을 채용하였다. 31년에 【소론】 윤지(尹志), 【김일경의 당파인 윤취상(尹就商)의 아들】 이하징(李夏徵) 등이 반역을 꾀하자 그들을 모두 주살하였으며, 아울러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켰다고 주장되는 소론의 우두머리 및 【소론】 이광조, 조태억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국은 대체로 노론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처럼 영조의 치세 중에도 붕당의 해악은 그칠 때가 없었으며, 그의 탕평의 교지에도 “붕당의 폐해가 근래에 더욱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또한 일찍이 영조는 국가의 처지를 송나라 말기에 비유하면서 세손(世孫) 【정조】 을 훈계하였다. 무릇 송나라는 붕당 때문에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정조가 뒤를 이어 즉위하자, 전 왕의 뜻을 계승하여 당파를 조정하는 데 힘을 다하였으며,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도 대부분 그들의 재능에 의거하였고, 결코 당파가 무엇인가에는 관계하지 않았다. 스스로 침실의 명칭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탕탕평평(蕩蕩平平)’이란 상서대전(尙書大傳) 홍범(洪範) 가운데에 말한 “무편무당 무당무편 왕도평평(毋偏毋黨 毋黨毋偏 王道平平)”에서 나왔으며,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는 뜻이다. 혹은 ‘탕평(蕩平)’이라고도 한다.】 붕당의 다툼은 이전과 같이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그 재앙은 이미 오랫동안 국가의 고질(痼疾)이 되어 쉽게 뿌리 뽑을 수 없었다. 이들 당파는 최근 이 태왕(李太王) 때에 이르러 크게 타격을 받아,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사색(四色) 【노론, 소론, 남인, 소북(小北)을 말한다.】 이라고 부르면서 그 구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제5과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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