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알렉산드르 푸시킨

강나루터 2023. 7. 29. 13:45

알렉산드르 푸시킨

최근 수정 시각: 2023-07-27 14: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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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알렉산드르 푸시킨|Alexander Pushkin
 
본명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1] (러시아어)
Alexander Sergeyevich Pushkin (영어)
국적
출생
사망
1837년 1월 19일 (향년 37세)
직업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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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반2.2. 중반2.3. 결혼과 죽음
3. 평가4. 주요 작품 5. 기타

1. 개요[편집]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Не печалься, не сердись.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ирись,

기쁜 날이 오리니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ёт,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Настоящее уныло.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Всё мгновенно, всё пройдет,

지나간 것 그리움이 되리라
Что пройдёт, то будет мило.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러시아 소설가이자 시인.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의 국민 시인.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맨 처음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푸시킨의 시를 꼽으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일 것이다.[3]


니콜라이 1세와 아내 나탈리야와 푸시킨.

2. 생애[편집]

2.1. 초반[편집]

1799년 모스크바에서 명문 귀족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푸시킨의 초상화를 보면 외모가 독특한데, 푸시킨의 외증조부가 아프리카 출신 흑인으로 러시아 제국의 귀족이 된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1696~1781, 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이다.[4] 간니발은 에티오피아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갔다가 러시아 대사 때문에 러시아로 오게 된 인물인데, 표트르 대제가 직접 대부(godfather)로 서 주었을 정도로[5] 러시아의 귀족 자제들과 함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간니발 가문은 러시아의 명문가가 되었다. 즉, 흑백혼혈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당시의 관점으로는 빼박 흑인이다. 이후 간니발은 표트르 대제의 총애로 노예 신분에서 면천된 후 프랑스 유학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많은 학자/철학자들과 교류하게 되며, 볼테르로부터 '계몽주의의 검은 별'이라는 어마어마한 찬사를 들을 정도로 학문적 성과를 이룬 사람이다. 푸시킨은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 했다. 푸시킨에게 자신의 뿌리는 그저 그런 노예출신이 아닌 자랑스러운 학자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미인이었지만 흑인의 유전자를 강하게 타고 났는데 알렉산드르는 피부색 말고 미모는 물려받지 못해서 상단 초상화는 초상화답게 150% 정도 미화한 것이고(...) 실제로는 미남과 거리가 멀고 남아있는 스케치 등에서는 생김새도 흑인에 가까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는 가족들에게도 다소 낯선 존재였고 다른 사람들은 곱슬 머리에 키 작은 루저라고 놀려댔지만, 여자들에게는 인기 대폭발이라 평생 여자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었다고 한다. 말빨, 글빨 등 외모보다 매력으로 어필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지만 결혼 후엔 감시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먹고 사느라 그럴 틈도 없었던 듯.

일반적으로 푸시킨의 외증조부 가니발 장군은 에티오피아 혹은 현대 에리트리아 출신으로 알려졌고 한동안 정설이었지만, 현대 근세사학계에서는 그 당시에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이 제한적이었던 유럽, 그것도 러시아에선 사하라 이남 흑인들을 그냥 습관적으로 '어비스니아인', 즉 에티오피아로 부르다 보니 생긴 오해로 본다. 무엇보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문학사학자로서도 활동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비롯한 현대 관련 학자들은 오히려 만년에 간니발 장군 본인이 스스로 고향은 "라곤"이라 말했던 점을 빌어 중서부 아프리카 차드 호 현대 카메룬 북동부 끄트머리에 있는 로고네-비르니 지방이었다 본다. 게다가 간니발 에리트리아 출신설을 처음 공식화했던 인류학자 드미트리 아누친의 주장은 열등한 '완전 흑인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이 푸시킨 같은 천재를 배출했을 리는 없으니 그나마 지중해 '문명화된 세계'와 역사적으로 가까웠고 '완전한 흑인'은 아닌 햄계 민족 에티오피아인일 거란 19세기말 우생학적 유사과학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간니발 장군이 러시아 정부에게 귀족 작위를 받을 때 요청하여 하사받은 문장이 있는데, 여기에 중간엔 코끼리가 있었고 아래엔 라틴 알파벳으로 FVMMO라 적혀있는데 라틴어의 "Fortuna Vitam Meam Mutavit Oppido" (행운이 이 도시에서 나의 인생을 변하게 했다)의 머리 글자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러시아 문화학자이자 간니발 전기 저자인 휴 반즈에 따르면 이는 차드 호수 근처 코토코인들의 언어로 '고향'이란 뜻이라고. 간니발은 동거하다가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1736년에 결혼한 두번째 아내인 귀족 혈통의 크리스티나 레지나 세베르크(Christina Regina Siöberg)[6]와 매우 금슬이 좋았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총 10명 낳았고 그 중 하나인 오시프가 푸시킨의 외할아버지였다.

군대에서 퇴역한 후 문필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개인 서재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고전 문학들을 접하며 책을 많이 읽었고 삼촌도 시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유모로부터 러시아의 여러 민담과 민요들을 배웠다. 이런 성장 배경은 푸시킨이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된 동시에 훗날 푸시킨이 러시아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러시아 민중들을 동정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이미 10살 때 프랑스어로 자작시를 지었고 12살 때 중고교 과정이 통합된 러시아 귀족 자제 교육기관인 리쩨이(лице́й)에 입학했다. 리쩨이에서 교육받는 동안 130편의 시를 지었고 15세 때 처음으로 시집을 냈다.



일리야 레핀의 그림.<리체이 시험장에서의 푸시킨>(1911)[7]

17살 리쩨이에서 진급 시험을 칠 때 '차르스코예 셸로[8]의 추억'이라는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왔던 문학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푸시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2.2. 중반[편집]

리쩨이를 졸업한 후에는 당시 귀족 자제들의 출세 코스에 맞게 외무성에 들어가 10등 문관 신분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워낙 전형적인 생활이었기 때문에 곧 이 공무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이때부터 3년간 향락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자유주의적 사상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당대의 혁명적 자유주의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에 동참했다. 유명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Руслан и Людмила)'를 발표한것도 이 무렵. 푸시킨은 이 무렵 러시아의 농노제와 전제 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 때문에 당국의 눈 밖에 나 1820년 러시아 남부로 전근 당한다.[9] 오데사에 머무르며 외국 문학을 공부하던 푸시킨은 오데사 총독과 불화를 일으켜 영지인 미하일롭스꼬예로 추방당한다. 1825년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귀환이 허용될 때까지 남부지방에서 짱박혀 있었고 1824년에는 외국 망명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거기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숙청당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시기였으나 예술적으로는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시기였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와 보리스 고두노프를 이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1825년에 자유주의자들이 일망타진된 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도 좋다는 황제의 허가가 있었으나 푸시킨은 이미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된다. 황제의 검열 없이는 작품 발표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 것.[10] 사적인 여행도 일일이 허가받아야 했다. 때문에 귀환한 후 얼마간은 서정시나 연애시를 적으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다녔다.[11] 그리고 1830년부터 다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는데 1831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결 짓고 여러가지 시와 소설들을 발표했다.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12]등 푸시킨의 대표 소설들도 이때 발표된 것들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으로 설정한 희곡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도 썼고, 그것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898년에 오페라화를 했다. 이후 1979년에 쓴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에도 영향을 미쳐 연극으로도 반향을 일으키고, 1984년 영화화되어 더욱더 알려지게 된 것이다.[13]

2.3. 결혼과 죽음[편집]

1831년, 푸시킨은 러시아 상류층에서 미인으로 소문났던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Гончарова, 1812년 ~ 1863년)에게 청혼했다. 곤차로바는 당시 18살이었는데 이미 자신보다 13살 연상이었던 남성과 사별한 경험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곤차로바는 미인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해 친정에서는 그녀를 결혼시켜 사위에게 빨대 꽂을 생각으로 재산 많은 남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 쪽 집안이나 푸시킨의 어머니는 모두 그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푸시킨은 곤차로바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이 무렵 푸시킨은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둘 사이에서는 아들 알렉산드르, 그리고리, 딸 마리야, 나탈리야가 태어났다. 나중에 막내딸 나탈리야의 손주들이 왕가의 후손과 결혼하게 된다.

곤차로바는 결혼 후에도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고 자연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녔는데 그 중에는 니콜라이 1세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1834년에 푸시킨은 차르의 시종보가 되었는데 이게 사실 곤차로바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니콜라이 1세의 음흉한 속셈 아니냐는 소문이 당대부터 돌았다.[14] 푸시킨은 이런 소문에 처음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사실 푸시킨 본인도 남말할 처지는 못 되는 게 문란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오데사에 짱박혀있을 때부터 유부녀, 귀족 여성, 발레리나, 창녀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방탕한 행적을 벌였고, 총독 부인도 건드리다 들켜 그 남편에게 깨지고 쫓겨나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사랑한 여성과 육체적으로 사랑한 여성을 분리하여, 자기가 만난 여성들을 그 두 분류로 나누어 보관했다고 한다. 한편, 엄청난 노름꾼이자 결투광이기도 했다고.[15] 본인도 도박하는 와중에 아내까지 사치를 좋아하니 빚도 크게 늘어났다.

1836년 11월, 푸시킨과 그의 동료들은 아내 곤차로바가 염문을 일으키고 다니고 있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는다. 푸시킨은 당시 곤차로바와 가까워진 프랑스인 귀족인 근위대 장교 조르주 샤를 드 헤케렌 당테스(Georges-Charles de Heeckeren d'Anthès) 남작이 범인이라고 확신했고 당테스에게 결투 신청을 한다. 하지만 당테스와 처제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결투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나 곤차로바와 당테스를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았고 푸시킨과 당테스는 결국 결투를 했다.[16]


그러나 결투에서 푸시킨은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당테스에게 반격해 부상을 입혔지만 그는 가벼운 부상에 그쳤고, 푸쉬킨은 이틀 후 병원에서 사망했다.애초에 직업이 장교라 총으로 먹고 사는 당테스에게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깡으로 청한 결투이니 결과는 뻔할 뻔

푸시킨은 자신의 서재에 꽂혀있던 수천 권의 책을 생각하며 "안녕,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책이 곧 친구라는 말. 이로써 곤차로바는 만 24살에 결혼과 사별은 두 번이나 했다. 푸시킨은 병원에서 곤차로바에 대해 처음에는 용서할 수 없다고 무시했으나 다음 날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곤차로바를 마지막으로 만나 "나의 죽음 때문에 자책하지 마. 이것은 나 혼자 저지른 일의 대가라고 생각해... 그러니 자유롭게 살아... 그리고 다음에는 실수하지 말도록 해..."라는 말을 했다. 이후 쿨럭거리며 "끝장이야... 내 목숨..."이라고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

푸시킨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니콜라이 1세는 일반인들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하고, 신문에 과도한 추모 기사 작성을 금지한다 명했으며 장례식에 군대까지 보냈다.[17] 이런 정황을 볼 때 당시 많은 사람들이 푸시킨의 죽음은 국민 작가인 그의 인기나 영향력을 걱정한 귀족들이 판 함정이고 푸시킨이 거기 빠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푸시킨과의 결투에서 이기고 국민적 시인을 죽인 당테스도 끝이 좋지 않았다. 금지된 결투에서 살인까지 했는데 처벌 받지 않고 그대로 프랑스로 도망가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후 프랑스에서 고위직을 역임해 당당하게 러시아 궁정에 사절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축출된 후엔 지방에 은둔하며 비참하게 살다가 1895년에 사망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딸인 나탈리야 푸시키나는 당대의 뛰어난 재녀로 이름을 날리고 룩셈베르크의 대공 아돌프의 동생인 나사우의 니콜라스 공과 결혼했다. 나탈리야가 왕공족과 결혼할 신분이 아니였기 때문에[18] 니콜라스 공과 나탈리야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받아들여졌고 나탈리야는 메렌베르크 여백작의 지위를 받았다.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니콜라스와 나탈리야의 자녀들은 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에, 기욤 4세가 딸만 6명을 낳았음에도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계승하지 못했다.[19] 이후 메렌베르크 백작가는 1965년 남계가 단절되었지만 나탈리야의 딸 조피가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인 러시아의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20] 귀천상혼해 영국에 정착했다. 이를 통해 영국 등 유럽에도 간니발과 푸쉬킨의 혈통을 약간이나마 받은 높으신 분들도 몇몇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밀포드 헤이븐 후작[21], 제7대 웨스트민스터 공작, 애버콘 공작의 후계자, 댈하우지 백작의 후계자들이 있다.

3. 평가[편집]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한국에서 러시아 문학하면 떠올리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서유럽식도, 러시아식도 아니고 비슷한 작가가 다시 안나오는 자기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다운 작가를 꼽으라면 푸시킨이 첫손에 꼽힌다.

낭만주의 문학가인 동시에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이 인지도를 얻게 된 것도 푸시킨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와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적절히 배합하여 러시아의 국민성과 혼을 문학으로 잘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모든 작가들은 푸시킨이 개척한 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후대 러시아 문학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미래파와 마야콥스키는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푸시킨을 지목하기도 했지만 마야콥스키는 후에 자신의 입장을 바꿔 푸시킨을 옹호했다. 사실 푸시킨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것 자체가 푸시킨이 러시아 문학계에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4. 주요 작품[편집]

1999년 열린책들에서 고려대 석영중 교수와 손잡고 소설, 시, 희곡, 서사시 등등 푸시킨의 대표작들을 1권에 모은 전집이 발간했으나 지금은 절판되었고, 엄밀히 말해 전집도 아니다. 영어로 번역된 푸쉬킨 전집이 하드커버판으로 15권 분량인데 한역이 영역보다 분량이 늘어난다는걸 감안하면 이건 문학 선집이지 절대 전집일 수가 없다. 미완성 작품들이 모두 빠지고, 수백편의 서정시들도 거의 다 뺐다. 이 자칭 전집은 재간 계획도 없어 중고 시장에서 기본 10만원에 심하면 20만원에 육박하는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는데 전집도 아니고, 따로따로 출간된 그의 대표작들은 지금도 모두 손쉽게 구해볼 수 있으니 굳이 비싼 돈주고 살 필요가 없다.

4.1. 소설[편집]

4.2. [편집]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시베리아에 보내는 시
  • 자유의 찬가
  • 카프카즈의 포로
  • 집시들
  • 악령 - 참고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맨 처음을 장식한다. 일부가 나오는데 내용은 "악령이 마부와 마차를 탄 귀족을 저 먼 들판으로 끌고 간다"는 부분이다.
  •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4.3. 희곡[편집]

4.4.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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