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감상

어머니 여한가(餘恨歌)

강나루터 2023. 9. 1. 01:46

어머니 여한가(餘恨歌)

 

 

 옛 어머니들의 시집살이, 자식 거두기, 질 박한 삶을 노래한 글, 이 <여한가(餘恨歌)>가 불효자의 가슴을 후벼 팝니다. 누가 한국 여인들의 결혼 후 시집살이에서 생기는 한(恨)을 이야기한 이 시를 읊었을까요?

 

 아마 작자는 청은 구자옥(1887~1950)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감상하며 만분의 일이라도 불효자식의 한을 풀어 보면 좋겠네요!

 

< 어머니 여한가(餘恨歌)>

 

열여덟살 꽃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세살씩 터울두고/

일곱남매 기르느라/ 철지나고 해가는줄/ 모르는채 살았구나.

 

봄여름에 누에치고,/ 목화따서 길쌈하고/ 콩을갈아 두부쑤고,

메주띄워 장담그고/ 땡감따서 곶감치고,/ 배추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육포 유밀등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높이 간직하네.

 

찹쌀쪄서 술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박아 제일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술로 떠낸다음

청수붓고 휘휘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일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걸고/ 소주내려 묻어두네.

 

피난나온 권속들이/ 스무명은 족하온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보리쌀로 절구질해/ 연기불로 삶아건져

밥도짓고 국도끓여/ 두번세번 차려내고/ 늦은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풀솜/ 천근만근 무거웠네.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돌려 실을뽑아/ 날줄들을 갈라늘여

베틀위에 걸어놓고/ 눈물한숨 졸음섞어/ 씨줄들을 다져넣어

한치두치 늘어나서/ 무명한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내려 삶아내서/ 햇볕으로 바래기를/ 열두번은 족히되리.

 

하품한번 마음놓고/ 토해보지 못한신세/ 졸고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꿰어/ 무거운눈 올려뜨고/ 한뜸두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끝이/ 손톱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자식들 헤진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수발 어찌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는데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안차/ 맵고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들어/ 방내부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가득/ 차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녀석 세워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어르리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시키면/ 일할엄두 사라지고/ 한숨만이 절로난다.

 

학식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제사들은/ 여나무번 족히되고

정월한식 단오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해도

거들사람 하나없고/ 여자라곤 상전같은/ 시어머니 뿐이로다.

 

고추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매워라/ 큰아들이 장가들면

이고생을 면할건가/ 무정스런 세월가면/ 이신세가 나아질까

이내몸이 죽어져야/ 이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토끼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없이/ 어느틈에 자랐는지

짝을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쌍같이/ 영감하고 둘만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것이/ 지지리도 복이없는

내마지막 소원인데/ 마음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않네.

 

안채별채 육간대청/ 휑ㅡ하니 넓은집에/ 가문날에 콩나듯이

찾아오는 손주녀석/ 어렸을적 애비모습/ 그린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짧은/ 제어미를 택했는지/ 곶감대추 유과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주어볼 틈도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명절이나 큰일때는/ 객지사는 자식들이/ 어린것들 앞세우고

하나둘씩 모여들면/ 절간같던 집안에서/ 웃음꽃이 살아나고

하루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땐/ 푸성귀에 마른나물

간장된장 양념까지/ 있는대로 퍼주어도/ 더못주어 한이로다.

 

손톱발톱 길새없이/ 자식들을 거둔것이/ 허리굽고 늙어지면

효도보려 한거드냐/ 속절없는 내한평생/ 영화보려 한거드냐

꿈에라도 그런것은/ 상상조차 아니했고/ 고목나무 껍질같은

두손모아 비는것이/ 내신세는 접어두고/ 자식걱정 때문일세.

 

회갑진갑 다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채비

늦기전에 해두려고/ 때깔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든해 손없는날/ 대청위에 펼쳐놓고/ 도포원삼 과두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늙은이 수의일습/ 내손으로 다지었네.-<하략>

 

 어떻습니까?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이 <여한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는 조금 수월했을지 모르지만 늙어가는 우리 아내들도 어느 정도 그런 삶을 이어 왔다는 생각입니다. 6 남매의 맏이에다 딸만 둘 둔 제 ‘아내의 여한가’는 어찌 모르고 살아왔는지 생각하면 할 수록 마음이 아프네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9월 1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