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元己未冬에 先生文公이 令沈으로 作書集傳하시고 明年에 先生이 沒커시늘 又十年에 始克成編하니 總若干萬言이라.
嗚呼라. 書豈易言哉리요.
二帝三王의 治天下之大經大法이 皆載此書로되 而淺見薄識으로 豈足以盡發蘊奧며 且生於數千載之下하여 而欲講明於數千載之前하니 亦已難矣라.
然이나 二帝三王之治는 本於道하고二帝三王之道는 本於心하니 得其心이면 則道與治를 固可得而言矣리라. 何者오. 精一執中은 堯舜禹相授之心法也요 建中建極은 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요 曰德曰仁曰敬曰誠은 言雖殊而理則一이니 無非所以明此心之妙也라.
至於言天則 嚴其心之所自出하며 言民則 謹其心之所由施니 禮樂敎化는 心之發也요 典章文物은 心之著也요 家齊國治而天下平은 心之推也니 心之德이 其盛矣乎인저.
二帝三王은 存此心者也요 夏桀商受는 亡此心者也요 太甲成王은 困而存此心者也라.
存則治하고 亡則亂하나니 治亂之分이 顧其心之存不存如何耳라.
後世人主 有志於二帝三王之治인댄 不可不求其道요 有志於二帝三王之道인대 不可不求其心이니 求心之要는 舍是書하고 何以哉리요.
沈이 自受讀以來로 沈潛其義하고 參考衆說하여 融會貫通일새 逎敢折衷微辭奧旨는 多述舊聞이요 二典禹謨는 先生이 蓋嘗是正하사 手澤이 尙新하시니 嗚呼惜哉라.
集傳은 本先生의 所命故로 凡引用師說은 不復識別하고 四代之書를 分爲六卷하니 文以時異하고 治以道同이라.
聖人之心이 見於書는 猶化工之妙가 著於物이니 非精深이면 不能識也라.
是傳也 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心에 雖未必能造其微나 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書에 因是訓詁하면 亦可得其指意之大略矣리라.
嘉定 己巳 三月 旣望에 武夷 蔡沈은 序하노라.
<역문>
경원(慶元) 기미(1199)년 겨울에 선생 문공(저자 채침의 스승인 주자)께서 저(침)에게 명하여 서경의 집전을 지으라 하시고 그 이듬해에 돌아가시거늘 10년 만에 비로소 책을 완성하니 모두 약 만 자라. 아! 서경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으리요. 2제3왕(堯,舜,禹,湯,文王,武王)의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이 이 책에 다 실렸으되 나의 얕은 식견과 얇은 학식으로 어찌 족히 그 심오한 이치를 다 드러낼 것이며 또 수천 년 뒤에 태어나 수천 년 전의 일을 밝히려 하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로다. 그러나 2제3왕의 다스림은 도(道)에서 근본하고 2제3왕의 도는 마음에 근본을 둔 것이니 바로 그 마음을 알면 도와 다스림을 진실로 말할 수 있으리라. 어째서 인가? 오직 일심을 갖고 중용의 도를 잃지 않음은 요(堯), 순(舜), 우(禹)가 서로 전한 심법이요 중용의 도를 세워 만민의 삶의 푯대를 세움은 상의 탕왕과 주의 무왕이 서로 전한 심법이니 무릇 덕(德)과 인(仁)과 경(敬)과 성(誠)은 말이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이치는 곧 하나이니 이 마음의 묘함를 밝힌것이다. 하늘을 말함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유래한 바를 공경하는 것이요 백성을 말함에 이르러서는 그 마음이 행할 데를 삼가는 것이다. 예악과 교화함은 마음에서 나온것이요 온갖 문화와 제도는 마음의 드러남이요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화롭게 함은 마음이 미루어 확장 된것이니 마음의 덕이 성대하도다. 2제3왕은 이 마음을 잘 보존한 사람들이요 하의 걸과 상의 수는 이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태갑과 성왕은 애써서 이 마음을 보존한 사람들이다. 마음을 간직하면 다스려지고 잃어버리면 혼란하니 다스려짐과 혼란함의 나누임이 돌아보건대 마음을 간직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후세의 군주가 2제3왕의 다스림에 뜻을 두려한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2제3왕의 도에 뜻을 두려 한다면 그 마음을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마음을 구하는 요체는 이 책 이외에 무엇으로 하겠는가? 나(침)는 서경을 읽은 이래로 그 뜻을 깊이 침잠하고 여러 학설을 참고하여 자세히 이해하고 관통하고서 이에 감히 자세한 뜻과 깊은 뜻을 절충하되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은 대부분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요 이전(堯典,舜典)과 대우모(大禹謨)는 선생이 일찍이 바로잡으시어 손때가 아직도 새로우니 아! 애달프도다. 집전은 본래 선생의 명인 까닭에 무릇 선생의 설명을 인용한 것은 다시 식별하지 않고 4대(虞,夏,商,周)의 책을 여섯 권으로 나누니 글은 시대에 따라 다르나 도로써 다스림은 한가지니라. 성인의 마음이 책에 드러남은 화공의 묘한 재주가 물건에 드러나는 것과 같으니 깊이 궁구하지 않으면 능히 알 수 없느니라. 이 집전은 요순우탕문무주공의 마음에까지 비록 은미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요순우탕문무주공의 글에 있어서는 이 집전에서의 훈고를 따른다면 역시 그 대략의 뜻을 얻을 수 있으리라.
가정 기사(1209)년 삼월 기망(3.16)에 무이사람 채침이 머리말을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