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 완전정복(2박 3일, 1월 27일~29일)
이번 남산9차답사에 참여하였던 오영석입니다.
2박 3일 동안 강행군이었지만
제게는 무척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부족하나마 간단하게라도 인사겸해서 후기를 올립니다.
모두 소개해드리기에는 시간관계상 어렵고
또 9차에 걸쳐 많은 분들이 다녀오셨기 때문에
사진만 올리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둘째날 오전에 답사했던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대한 부분만 올립니다.
둘째날(1월 28일, 토요일)1. 독락당(獨樂堂)첫째날 답사를 마치고 경주시내에서 저녁식사 후 숙소인 독락당으로 이동하다. 경주에서 30분 정도 포항쪽으로 달려가 만나다.
보물 제 413호인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인근에 있는 정혜사지 13층석탑을 만나다보물 제413호인 독락당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년 ~ 1553년)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 다시 정계에 복귀하기 까지 7년간 은거하였던 집이다. 옥산정사라고도 한다. 여주 이씨의 종가집이기도 하다.
회재는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밀려나 1531년 낙향하였다. 낙향 이듬해인 1532년 독락당을 건축했으니 이때가 중종 27년이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다시 정계에 나서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명종때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推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李芑)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회재는 동방5현이자 문묘 18현으로 배향되었다.
경청재
![]()
행랑채인 경청재
경청재 옆 담장 안으로 별채인 공수간이 있는데 우리는 이 별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옛날에는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독락당은 회재가 낙향하여 세운 사랑채이지만 그러나 이 곳의 건물 전체를 독락당이라고 일컫는다. 옥산정사라는 편액은 퇴계 이황의 글씨이고 독락당의 편액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이다.
독락당은 사진으로 보면 왼쪽은 맞배지붕, 시냇가쪽은 팔작지붕이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런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즉, 양쪽 모두 팔작지붕으로 하면 안채와 겹치기 때문에 안채쪽은 맞배지붕으로 지은 것이다.
지금은 왼쪽 한칸만 방이고 나머지는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원래는 오른쪽에도 방이 한칸 있어서 가운데만 대청이었던 듯 하다. 마루의 청판이 가운데 대청과 직각으로 깔리고, 앞뒤 기둥 한 가운데 네모기둥이 서 있어 칸을 막았던 흔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냇가쪽으로 벽면 전체가 쌍여닫이 띠살문으로 된 것이 이해가 된다.
대청의 시냇가쪽 문을 열어젖히면 바로 시냇가가 보일 수 있도록 담장이 살창으로 처리되어 있다. 여름에는 살창을 통해 시냇가의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시원했을 것이고 흐르는 냇물을 바라볼 수 있어서 또한 시원했을 것이다. 이렇듯 독락당은 자연과 하나되고자 하는 선조들의 정신이 곳곳에 배어있다.
![]()
이 곳을 드나드는 문인들의 시와 글씨가 독락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文字香 그윽하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를 향해 분연히 반대하고 나섰던 사대부의 결기가 느껴진다.
![]()
![]()
![]()
2. 독락당(獨樂堂) / 계정(溪亭)한석봉의 글씨이다.
사진의 정면으로 보이는 공간이 원래는 회재의 아버지가 쓰던 초가였으나
회재가 기와를 얹고 왼쪽 양진암이라는 현판이 붙은 두칸을 지어 붙였다.양진암(養眞庵) 퇴계 이황의 글씨이다. 회재는 어릴 때 부터 집 바로 뒤에 있는 정혜사를 자주 들락거렸다. 어린 시절에는 여기서 글을 읽었고 정혜사의 승려와 친교가 깊어 정혜사와 독락당을 서로 자주 찾았으며, 죽은 뒤에는 그의 글씨와 서책들이 정혜사에 가득했다고 한다. 양진암은 그 정혜사의 승려가 아무 때나 스스럼없이 찾아와 머물게 하려는 회재의 배려에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숭유억불정책을 시행했던 조선시대에 미천한 신분이었던 승려와 조선 최고의 유학자였던 회재가 양진암에서 신분을 초월하여 교류하였던 아름다운 인연이 맺어진 곳이다. 그 후 약 300년 후 전라도 강진땅에서 비슷한 미담이 전해진다. 다산 정약용과 아암 혜장스님이 그들이다.
계자난간으로 처리하여 자계(紫溪) 쪽으로 최대한 접근하였다. 자옥산 자락을 흐르는 시냇가여서 회재가 이 시냇가를 자계라 칭하였다. 이언적의 호는 회재라는 주자의 호를 딴 것도 있지만 자계옹이라는 호도 자주 사용하였다.
계정(溪亭) 부분이 담장보다 한칸 더 시냇가 쪽으로 돌출되었고 난간으로 더욱 다가섬으로 난간에 기대어 앉으면 시냇가가 송두리채 시야로 들어온다. 시냇가가 계정 안으로 완전하게 들어오는 훌륭한 차경(借景)수법이다.
![]()
계정(溪亭)에서 바로 시냇가로 내려서기 위하여 작은 문을 달아놓았다. 이 문이 없으면 담장을 돌아나와야 하기 때문에 이 문으로 인하여 계정공간과 계곡이 더욱 하나되는 것이다. 작은 부분에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계정(溪亭)이 담장보다 더욱 돌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암반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였다. 암반의 크기에 따라 기둥의 길이를 다르게 처리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전통조경의 수법은 자연과의 合一 즉,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세계관을 추구하였다.
계정(溪亭)을 받치고 있는 너럭바위(세 여자분들이 서계시는 바위)가 사산오대 중의 하나인 관어대(觀漁臺)이다. 워낙 시냇가에 다가섰기 때문에 난간에 기대앉아서도 물속의 고기가 다 들여다 보이겠다.
자연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가 계정과 계곡이 하나의 풍경으로 보인다.
회재는 사랑채인 독락당 마루에 앉아 책을 읽다가 독락당 바로 옆 약쑥밭(사진을 찍어오지는 못했으나 바로 옆에 있다)에서 나는 약쑥향기에 머리가 맑아지고 담장의 살창을 통해 불어오는 시냇가의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다가 지인이 찾아오면 계정에 앉아 잘익은 술한잔을 주고 받으면서 정담을 나누다가 흥이 나면 쪽문을 열고 관어대로 내려가 맑은 계곡물을 바라보면서 학문과 인생을 논했으리라.....
3. 독락당(獨樂堂) / 나무들아침에 정혜사지 산책을 다녀오다가 담장너머에서 바위 위에 올라가 찍은 사진이다. 나무가 키가 매우 컸다. 외관상으로는 잘 자라고 잘 생겼지만 나무 바로 앞에서 보니 속이 모두 썩어서 파내고 보형물로 채워놓았다. 나무 수령이 450년이라니 제 수명보다 훨씬 더 장수하고 있는 나무가 대견스럽다.
콩과식물로 중국원산이며 줄기에 가시가 있고 6월에 흰꽃이 핀다. 약용으로도 쓰이는 이 나무는 회재가 중국 사신으로 다녀온 지인으로 부터 종자를 얻어 키운 것으로 추측된다.
천연기념물 제 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각자나무는 중국주엽나무라고도 하는데 조각자라는 말은 皁角刺(쥐엄나무의 가시), 皁角子(쥐엄나무 열매의 씨)라는 뜻이다. 주엽나무를 지방에 따라서는 쥐엄나무라고도 한다.
주엽나무의 잎이다. 아카시나무의 잎과 비슷하게 생겼다. 겹잎으로 자란다. 주엽나무의 잎은 사진에서 보듯이 짝수이다. 그러나 조각자나무는 홀수이다.
주엽나무의 가시. 가시를 자르면 단면이 약간 넓적하다.
그러나 조각자나무는 가시의 단면이 둥그렇다. 천연기념물인 조각자나무는 줄기에 가시가 없었다. 이 사진은 청경채 앞쪽에 있는 어린 조각자나무의 가시를 촬영한 것이다. 즉, 주엽나무든, 조각자나무든, 오래되면 가시가 없어진다. 이 가시는 나무의 보호본능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나이들어 뿌리가 단단히 내리면 안심할 수 있으니 가시가 사라지는 것이다. 열매는 같은 콩과식물인 등나무 열매처럼 꼬투리로 생기는데 콩꼬투리의 길이가 20센티로 아주 크고 길다. 주엽나무는 비틀어지고 조각자나무는 꼬투리가 반듯하다. 주엽나무는 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지만 조각자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이 곳 독락당 밖에 없다. 저도 이번에 독락당에 가서 처음 보았다.
조각자나무가 있는 마당 담장 옆에 서있는 향나무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관어대로 나가는 길목에 서있는 향나무. 향나무를 배려하여 담장을 쌓은 건축자의 넉넉한 마음이 전해진다.
독락당의 향나무를 보니 비슷한 이미지의 남사예담마을(경남 산청) 회화나무가 생각난다.
4. 독락당(獨樂堂) / 회재유물관![]()
![]()
![]()
이해철 선생의 배려로 선생의 설명과 함께 회재유물관 내부를 돌아볼 수 있었다.
5. 옥산서원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을 제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서 조선 선조 5년(1572년)에 회재 사후 20년만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선조 7년(1574년)에 임금에게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이다. 그 이름은 논어의 첫머리,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 "벗이 있어 멀리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訪來 不亦樂乎) "남들이 날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치 않는다면 나 또한 군자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에서 따온 것으로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이 지은 것이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무변루를 만나는데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에 작은 도랑이 있다. 서원 옆의 계곡에서 물을 끌어들여 앞쪽으로 흘려보냈는데 이는 명당의 조건을 맞추기 위함이다. 명당수인 셈이다.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 직전인 54세(1839년)에 쓴 것이다. 관지(款識)를 보면, "萬曆甲戌(만력 갑술) 賜額後二百六十六年(사액 후 266년) 失火改書(실화개서) 宣賜(선사)" 라고 적혀 있다. 즉, 만력 갑술년 선조 7년(1574년)에 사액 후 266년이 되는 기해년 헌종 5년(1839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고쳐 써서 베풀어 준 편액(扁額)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설립당시의 현판은 이산해가 썼는데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할 때 추사 김정희가 다시 쓴 편액이다.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의 현판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년)의 글씨이다. 이렇듯 옥산서원은 아계 이산해, 추사 김정희, 석봉 한호 등 명필들의 전시장이다.
구인당(求仁堂) 안쪽에 또 하나의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있는데, 관지(款識)를 보면 옛날 현판 글씨를 베껴 써서 걸었다는 뜻의 舊額摹揭(구액모게)라는 글이 적혀 있다.
동재(東齋)인 민구재(敏求齋) 인(仁)을 구함에 민첩해야 한다(好古敏以求之)뜻이다.
서재(西齋)인 암수재(闇修齋) 드러나지 않게 나날이 새롭게 스스로를 닦는다(闇然自修)란 뜻이다. 신독(愼獨)의 의미이다. 구례 운조루의 작은사랑채도 암수재이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바로 무변루(無邊樓)를 만난다. 처음에는 이 문루의 이름을 납청루(納淸樓)라 하였으나 소재 노수신이 무변루로 바꾸었다. 납청루라는 뜻은 맑다는 것(淸)은 기(氣)를 말하고, 기는 양(陽)을 가리킨다. 이 누각에 오르면 맑음을 받아들여(納淸) 양을 기르게 된다는 뜻이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밝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라는 뜻의 현판 왼쪽의 작은 관지(款識)에서 무변루라는 뜻을 헤아려볼 수 있다.
누하진입하게 되어 있는 무변루 무변루는 구인당에서 공부하고 민구재와 암수재에서 생활하던 학생들이 쉬던 휴식공간이다. 서원의 구조가 무변루로 인하여 상당히 폐쇄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곳이 공부하는 곳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면학분위기에 일조를 하는 것이다. 물론 공부하다 휴식을 취할 때는 무변루의 문을 모두 열면 앞쪽의 자옥산과 서원 바로 앞의 울창한 계곡이 성큼 다가와 아름다운 자연을 누릴 수 있어 물아일체를 추구하는 우리나라 전통 조경의 정신을 어느 정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심대와 폭포, 그리고 울창한 계곡 등 역락문 바로 앞의 경승지를 감안하면 이를 누리지 못하는 공간 구성에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규범적인 성리학에서 어느 정도 자유스러운 조선 중기에서도 전기에 가까운 시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사진 왼쪽의 관솔불을 밝혔던 정료대는 인근의 정혜사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사액 당시 정혜사가 옥산서원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절에서 석등으로 사용되었을 법한 정료대 윗부분 앙화무늬가 사찰 물건임을 말해주고 있다.
![]()
문묘 18현 중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의 신도비각.
![]()
![]()
이수에 새겨진 두 마리 용에는 누른빛과 푸른빛의 단청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이렇듯 예전에는 석조물에도 단청을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이 신도비는 건립 당시에는 옥산서원 앞 계류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해서 서원 안으로 옮겨졌다.
회재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체인묘(體仁廟) 전학후묘양식에 따라 체인묘는 구인당 뒤에 있다.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마음을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니, 회재가 행한 실천철학의 요체라고 할수 있다.
경각(經閣)
서원 옆 계류의 폭포 폭포 이름은 용추(龍湫)이다.
폭포 옆에 용추(龍湫)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
세심대(洗心臺) 회재는 자계계곡 중심부에 독락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산봉우리를 골라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도덕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자계계곡의 중요한 너럭바위를 골라 관어대, 영귀대, 탁영대, 징심대, 세심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른바 회재의 4산5대로 일컬어지는 경승으로 이 곳 너럭바위가 그 중의 하나이다.
2012년 2월 1일 오 영 석 출처-나홀로 테마여행 Daum카페
출처 : 시 숲 길
글쓴이 : 소연 원글보기
메모 :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 마음요법(보화탕) 무엇인가? ≫ 모든 질병에 신효 마음요법 (0) | 2014.06.25 |
---|---|
[스크랩] 채채홍우화(采采紅藕花) (0) | 2014.06.23 |
[스크랩] 갖은 자(字) (0) | 2014.06.20 |
[스크랩] 밤 한톨에 울고 웃는 것 (0) | 2014.06.14 |
[스크랩] 임종을 부인 모르게 하다(일본편) (0) | 2014.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