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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위패를 모신 도정서원(道正書院) 에서

강나루터 2014. 10. 31. 19:10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위패를 모신 도정서원(道正書院) 에서

(2011/06/06 현재)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 있는 조선 선조때 임진왜란을 수습한
명재상 약포(藥圃) 정탁(鄭琢)의 위패를 모신 도정서원(道正書院) 전경 입니다 


 

 

 

 

 

 

 

 

 

 

 

 

 

 

 

 

 

 

 

 

 

 

 

 

 

 

 

 

 

 


◈도정서원 및 약포사당(道正書院 및 藥圃祠堂)

 

-소 재 지 :  호명면 황지리 447
            (원소재지 :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447)
- 건 축 주 :  청주정씨 문중
- 건축시기 :  1640년
- 훼철시기 :  1866년
-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2호, 1985. 08. 05. 지정
 

 
도정서원(道正書院)은 도정골의 울창한 산림 속에 사당과 강당, 관리사 등이 앞쪽으로 강을 내려다보며 자리 잡고 있다. 자연석으로 높이 축대를 쌓은 대지 전면 오른쪽에 강당이, 뒤쪽 높은 곳에 방형의 토석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놓여 있다. 강당의 왼쪽에는 관리사가 있으며, 강당의 오른쪽으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아주 가파른 경사면을 정지하여 ‘읍호정’이란 정자가 서 있다.

 
도정서원(道正書院)은 1640년에 사당을 건립하여 약포(藥圃) 정탁(鄭琢)을 제향해오다, 1697년에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1866년에 훼철된 후 사당과 강당, 읍호정(揖湖亭)만 남아 있던 것을, 1997년에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사당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풍판이 딸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사방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간소한 오량가이다. 전면 3칸은 전돌을 깔았으며, 뒷면 3칸은 우물마루를 놓아 위패를 봉안토록 하였다. 강당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난간을 돌려 누각 형식을 취하였다. 정면 중앙 2칸은 통간의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양쪽 1칸은 온돌을 놓았다.
대청 전면과 후면 모두 두 짝 널문을 달아 폐쇄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고, 대청 오른쪽 앞의 1칸은 온돌방, 뒤의 1칸은 마루방으로 되어 있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고, 오량가로 매우 간소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97년 동재․서재, 전사청, 누각, 화장실 등 5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약포선생(藥圃先生)은 임진왜란때 진충보국(盡忠輔國)한 재상(宰相)이며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을 구출(救出)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위급한 국가 민족의 운명(運命)을 부지(扶持)한 재상으로 이와 관련한 도정서원(道正書院)의 개략(槪略)을 알아보기로 한다.

 

  1980년에 준공된 정충사(精忠祠)는 선생의 영(影)과 유품(遺品)을 소장하였고 도정서원(道正書院)은 선생의 위패를 봉안(奉安)하여 재향(祭享)을 받들기 위해 인조(仁祖)18년(1640)에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醴泉郡 虎鳴面 黃地里)에 건립 되였다.

 

그후 정조(正祖)10년(1786)에 선생의 제삼자(第 三子)휘(諱) 윤목(允穆) 청풍자 선생을 배향(配享)하였고 고종(高宗)3년(1866)에 훼철되어 180년 동안 복원(復院)되지 못했다가 1989년 정부의 보조(補助)로 사당(祠堂) 3간과 강당(講堂) 4간만 중건(重建) 되었고 기타 부속건물과 앞으로 향예(享禮)를 받들기 위해 위토 매입은 후손의 성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어 1988년 서원복원추진위원회(書院復院推進委員會)를 구성하여 자금조달을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여 후손들의 노력의 성과로 지금 은 말끔히 완성 되였다.


▶정탁(鄭琢)

 

정탁(鄭琢, 1526~1605)은 용궁면 하금곡리 금당실에서 태어나 예천읍 고평리 고사평으로 옮겨 살았다.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본관은 청주다. 정이충(鄭以忠)의 아들이며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1568년 교리로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1581년과1589년 두 번이나 사절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 가서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에 힘썼다.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이 사형을 선고받자 상소를 올려 구제하였다.

 

정탁은 1600년(선조 33)에 좌의정에 올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등록되면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사평에서 머물 때 왕이 충훈부(忠勳府)의 화사(畵師)를 보내어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화상축을 하사하였다. 죽은 후 위성공신에 등록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호명면 황자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과 예천읍 서본리의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고, 유품으로 영정은 물론 유고와 문서 12종류, 관, 벼루, 석금강산 등이 보물 제494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0년에는 예천읍 고평리에 정충사(靖忠祠)를 창건하여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정탁은 성품과 기질이 맑고 밝아 신의를 지키고, 50년간 조정에 있으면서도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동인인 정탁은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어느 파에서도 모함을 하지 못하였다. 학문에서는 유학과 역사는 물론 천문, 지리, 상수(象數), 병법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여 박학다식하였다. 류성룡, 노수신과 더불어 ‘영남 3대가’라 불렸다. 매사 신중하였고, 국사를 논할 때는 언제나 큰 테두리를 바라보았다. 정탁은 예천읍 고평리에 터를 잡고 고평동계(高坪洞契)를 만들어 예천군민을 교도했으며, 새 질서와 새 생활 실천에 힘을 기울였고, 고평들을 개척하여 향토 주민의 복지를 증진하는 데에 정성을 쏟기도 하였다.
 
정탁선생 관련 유물인 영정(影幀)은 물론 유고와 문서 12종류, 관, 벼루, 석금강산 등 정탁의 영정(影幀)은 물론 유고와 문서 12종류, 관, 벼루, 석금강산 등이 보물 제494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0년에는 예천읍 고평리에 정충사를 창건하여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청풍자(淸風子) 윤목(允穆)

 

청풍자선생 (淸風子 先生)은 선조(宣祖)4년(1571)에 출생하여 인조(仁祖)7년(1629)에 졸(卒)하였다.  한강 서애 양선생의 문하(門下)에서 학업을 닦아 성리연원(性理淵源)의 심오한 경지에 이르러 천품(天品)이 상천설월(霜天雪月)과 같이 고결(高潔)하여 불의를 보면 자신이 오염된 것처럼 여기셨다. 광해조(光海朝)에서 여러 차례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다가 마침내 찰방(察訪)으로 잠시 부임하였으며 특히 필법(筆法)이 초서에 뛰어난 명필로 정편(定評)이 높았다.

 
▶황지리 마을 이야기

 

도정서원(道正書院) 및 약포사당(藥圃祠堂)은 호명면 황지리에 있다. 호명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 하나로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예천군으로 본포리에 있는 범우리의 뜻을 따서 호명면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본동’, ‘원곡’, ‘송곡’, ‘금릉’, ‘한어’, ‘본동’, ‘형호’, ‘오천’, ‘산합’, ‘백송’, ‘직산’, ‘황지’, ‘월포’, ‘종산’, ‘내신’, ‘담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명면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안동시 풍산읍, 서쪽으로는 지보면과 개포면, 남쪽으로는 지보면과 안동시 풍천읍, 북쪽으로는 예천읍과 보문면에 접한다.

황지리는 호명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7.5㎞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예천군 양산면(陽山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황지리라 하여 예천군 호명면에 편입되었다. 황지리는 ‘논실’, ‘백골’, ‘소망실’ 등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논실은 ‘논곡(論谷)’이라고도 불린다. 황지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 마을에 처음 입향한 이들이 동서 당론을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느티나무를 심어 마을을 보호했다고 하여 ‘논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골은 ‘백곡(白谷ㆍ栢谷)’이라고도 불린다. 처음 이곳에 화전을 이룰 때 흰돌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백곡(白谷)’이라 했다고 한다. 또 잣나무 숲이었다고 하여 ‘백곡(栢谷)’이라 했다고 한다. ‘논실’의 남동쪽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소망실은 ‘소망동(所望洞)’이라고도 불린다. 사람은 살아도 마을 이름은 없었는데, 마을 주위의 산이 높고 험준하며 호랑이가 많이 살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줌으로 그 호랑이의 피해를 막고자 궁리하다가 범이 도망가라고 ‘호망곡(虎亡谷)’ 곧 ‘호망실’이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굳어진 마을 이름이라고 하였다. ‘논실’의 북쪽 골짜기에 있다.

 

 

출처 : sonsang48 daum column
글쓴이 : 백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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