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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의령 망우당 곽재우 생가(忘憂堂 郭再祐 生家)

강나루터 2014. 10. 31. 22:35

 

곽재우생가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맨 먼저 민중의병을 일으켜 왜구을 무찌른 곽재우 의병장의 생가를 복원한 건물이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출생하였다. 남명 조식(趙植)선생의 외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1585년(선조 18)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같은 달 22일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군세는 더욱 커져 2천에 달하였고, 5월에는 함안군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9일째 되는 날 이곳 곽재우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장군을 비롯한 17장령들과 함께 책과 붓을 던지고 가재를 던지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곳 생가는 조선중기 사대부의 사저로서 전형적인 구조를 본떠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양반가의 집으로 2005년 복원하였다.

안채가 명당지로서 임진왜란 7년 중에도 왜병이 그의 목숨을 수없이 노렸지만 생명을 건지고 살아났으며

그의 유골이 왜병에게 손상을 당할가 우려한 나머지 후손에게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그의 무덤은 유골이 없는 가묘지(假墓地)로서 아직도 그의 유골을 후손들이 찾지 못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493호인 ‘의령 세간리 현고수’가 있다.

현고수(懸鼓樹)는 수령 52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로 나무 높이 20m, 나무둘레 8.4m 동서 16m,

남북으로 15m정도의 가지가 뻗어있는데 ‘북을 매던 나무’라는 뜻인데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이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고 한다.

 

생가 바로 앞에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라는 명칭으로 천연기념물 제302호로 지정된 수령 600년이 넘으며

나무 높이 20m, 나무 둘레 8.4m, 동서로 16m, 남북으로 15m정도 가지가 뻗어있다.

남쪽 가지에서 자란 두 개의 짧은 가지가 여인의 유방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가

찿아와 정성들여 빌면 젖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출처 : 바람 통신
글쓴이 : 문화 탐험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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