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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 CLASS
외가에서 인간 경영의 진수를 배운다
누구나 한 번쯤 외가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무작정 울었고, 엄마가 전부였던 그 시절에 엄마의 손을 잡고 외가에 갔을 것이다. 늘 따뜻하게 반겨주시던 외할머니.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날들을 생각하면 잠시 눈망울이 젖어들고 가슴이 따스해진다. 외가는 유년의 공간을 떠올릴 때 늘 마음속에 온기를 전해주는 그런 곳이다.
그런 추억이 없다면 어쩌면 유년을 기억할 부분이 텅 빈 것 같을 것이다. 그래서 외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 다시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 주는 공간으로도 작용한다.
든든한 후원자로서의 외가 또는 외할머니
“율곡은 복을 타고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첫째는 어머니를 잘 만났고, 정 깊은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다. 서울에 살면서도 자주 강릉 외가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안식을 찾으며 새로운 삶의 의욕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이종호의<율곡>에서)
과거에서 9번 장원을 차지해 ‘구도 장원’ 으로 불린 조선 최고의 ‘공신’ 율곡 이이를 삶의 위기 때마다 지탱해준 버팀목은 다름 아닌 외가라는 공간이었다. 외가에서 태어나 6 세까지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율곡에게 외가는 ‘인큐베이터’와 같은 곳이었다. 외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그 어떤 사랑에 비견할 수 없었다.
율곡은 4세 때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골목길을 돌아 나오다가 이웃집 담벼락에 석류가 빨갛게 열린 것을 보고 이렇게 시를 지었다고 한다.
"석류 껍질 안에 빨강 구슬이 부서져있네(石榴皮裏碎紅珠). ”
율곡은 16세 때 어머니를, 26세 때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죽기 전에 사임당은 남편에게 재혼을 만류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원수는 부인인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첩을 들였는데, 새어머니가 자주 분란을 일으키자 율곡은 상심한 나머지 금강산으로 들어가 한때 승려가 되려고 했다.
1 년 후에 마음을 돌려 금강산에서 하산한 율곡이 맨 먼저 간 곳은 다름 아닌 강릉의 외가였다. 외할머니에게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율곡은 공부에 정진해 이듬해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신사임당에게도 외할머니가 든든한 후원자였다. 16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란 사임당은 어려서 그림에 재능을 보이자 외할머니가 이를 알아보고 종이를 사다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외할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속에서 자란 사임당과 율곡의 성장 배경을 보면, 때로 사랑은 무서우리만큼 대물림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사임당과 율곡에게 외가라는 공간이 없었다면 예술과 학문적 성취가 나올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사임당과 율곡이 외가에서 받은 사랑은 말하자면 ‘외가의 인간 경영학’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가에서 받은 무한한 사랑은 사임당과 율곡이 거친 세파를 헤쳐나가는 데에서 인생의 카운슬러이자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외가와 430년 동안 지속해 온 인연
43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대구포를 사 들고 외가를 찾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한두해 도 아니고 무려 4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러한 전통을 이어가기란 인간사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 주인공들은 안동의 의성김씨 집안과 전주 류씨 집안의 450년을 뛰어넘은 인연에서 비롯한다.
안동에 살고 있는 전주 류씨의 그 옛날의 외가가 영남의 명문가로 손꼽히는 의성김씨 청계 김진 가문이다.
전주류씨가 안동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 유성이라는 사람이 청계의 사위가 되는데, 지금으로부터 460여 년 전의 일이다. 청계가 1580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로부터 지금까지 무려 430년째 청계의 기일에 맞춰 유성의 후손이 그 옛날의 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대구포는 안동 일대에서 제사상에 꼭 올려야 하는 필수품인데, 그 대구포를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먼 옛날의 외가를 매년 찾는 것이다.
안동의 무실(수곡)과 박실, 삼산, 한들 일대에서 살아온 전주 류씨는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수재 집안’ 으로 통한다. 그런데 그 배경에는 의성김씨와의 혼사를 통해 가풍을 재정립한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대대로 한양에서 살던 전주 류씨가 안동 무실에 살기 시작한 것은 강릉 판관을 지낸 유식의 손자인 유성(1533~1560) 때부터인데, 유성이 바로 청계의 사위다. 결혼 후에 안동 무실에 정착한 류성은 당시 학문이 높은 처가의 가풍을 벤치마킹해 자녀 교육에 나서 인재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계 김진은 5형제를 두었는데, 인근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어 모두 과거에 합격해 ‘오자등 가택’으로 회자되었다.
자녀교육에 성공해 명문가의 초석을 쌓은 청계 김진의 가풍은 혼인과 계를 통해 전주 류씨 가문에 ‘접목’된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말이 ‘천김수류(川金水柳)’다. 안동의 전주 류씨는 청계 김진가의 학풍과 가풍을 수용해 안동의 명가로 도약해 ‘천김수류’ 라는 말이 나왔다. 이는 청계가 살던 내 앞마을, 즉 천전(川前)의 의성김씨와 수곡의 전주 류씨가 혈연적·학문적 동질감을 통해 안동의 명문가로 우뚝 섰다는 것이다.
대대로 전주 류씨가 살던 곳은 안동시 임동면 수곡(무실)으로 여기서 6km 정도 떨어진 ‘돌고개’ 너머에 청계가 살던 내 앞마을이있다.
전주 류씨는 의성김씨와 수백 년간 혈연과 학연을 이루면서 명문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유성에서 시작한 수곡 파는 ‘가격(家格)’ 이 높은 처가의 학문과 문화를 수용하면서 일대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독자적인 기술 능력이 부족한 기업이 원천기술을 소유한 기업과의 합작으로 비즈니스 관계를 활용해 새로운 부를 창출한 경우로 비유할 수 있다.
외가의 학문과 가풍을 벤치마킹하다
의성 김씨 청계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유성은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28세에 요절했다. 이때 김씨 부인은 친정의 예법에 따라 어린 두 아들인 류복기 형제를 가르쳤다. 그런데 부인은 남편의 3년상을 마치고 자결하고 말았다. 고아가 된 유복기 형제는 외할아버지인 청계 김진이 데려가 양육했다. 이때 두 형제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외숙부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이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학문적 명성이 높았던 학봉은 생질을 자식처럼 여기며 지극정성으로 가르쳤다. 외삼촌이 생질들의 멘토가 되어 학문에 힘쓰도록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유복기 형제에게 전해진 ‘학봉 가법(學峯家法)’이다. 이 학봉 가법으로 조선말까지 의성 김씨와 전주류 씨가 학문적·혈연적·지역적 연대성을 유지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삼촌 학봉의 가르침을 받은 유복기는 분가할 때도 큰 도움을 받았다. 학봉은 장가를 드는 생질에게 살림을 차려준 것이다. 이러한 도움에 힘입어 전주 류씨는 나중에 인재의 산실이 될 수 있었다.
2007년 여름, 학봉의 14대 종손 김시인옹(2008년 작고)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전주 류씨 종손은 학봉의 기일에 맞춰 대구포를 가져와 학봉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라고 전했다.
청계와 학봉에게 학문을 배운 유복기는 1615년에 후손을 가르치기 위해 안동 무실에 기양서당을 건립했다.
기양서당은 안동에 정착한 전주 류씨(수곡파)가 의성 김씨의 학문적 영향을 받고 학문 토론과 교육을 담당하는 정신적 전당의 역할을 했다. 기양서당이 있었기에 전주 류씨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가문의 격을 높일 수 있었다.
전주 류씨는 조선시대에 문집이 가장 많은 ‘빅 5(의성 김씨, 안동 김씨, 진성 이씨, 반남박씨)’가문으로 꼽힌다. 또 외가를 딛고 학문의 명가로 도약해서인지 유복기의 후손에서 유독 학자가 많이 나왔다. 유안진 서울대 교수 등 해방 이후 교수를 지낸 이들만 수십 명을 헤아린다. 학문의 DNA가 400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외가를 ‘딛고’ 명가로 도약하다
전주 류씨의 유복기처럼 외가나 처가와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성공한 또 다른 가문으로는 여강 이씨를 대표하는 회대 이언적(1491~1553) 가문을 들 수 있다.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데, 무첨당에는 아직도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원래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 일파가 살던 곳으로 종가인 서백당이 있다. 회재는 외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나 중종 때 청백리로 이름난 외조부 우재 손중돈의 가르침을 받았고, 여강 이씨는 월성 손씨의 학문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가문 번성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전남 담양의 창평고씨 고인후 가문(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선 아버지와 함께 왜병과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순직했다)도 예외는 아니다. 창평 지역은 원래 언양김씨와 함평이씨가 터줏대감이었지만, 고인후의 후손이 창평에 정착한 이후에는 고씨의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는‘상월정(上月亭)’이라는 창평 고씨 가문의 공부방이 있다. 고인후 종가 뒤에 있는 월봉산 중턱에 자리 잡은 상월정은 처음에는 언양김씨 가문의 공부방이었지만, 함평 이씨로 넘어갔다가 다시 창평 고씨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세 가문이 번갈아 공부방의 주인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외손이 주인공이었다.
상월정은 1,000년 전에는 대자암이라는 절이었다. 언양 김씨의 공부방 역할을 한 대자암을 1457년 강원 감사를 지낸 김응교가 상월정으로 바꾸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이 건국했기 때문이다. 상월정은 이어 언양김씨 사위가 된 함평이씨 가문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함평이씨의 사위가 된 장흥 고씨로 넘어왔다. 모두 외가에게 소유권을 넘겨준 것이다.
고인후의 종손인 고영준 씨는 “언양김씨 와 함평이씨가 각각 300년씩 600년을 경영하다가 이어 창평 고씨가 17세기부터 주인이 되었다. 창평은 외가의 기세가 센 지역이다"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가문의 역사는 마치 사계절의 변화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엄격하 게 진행된다. 그리고 그 단계마다 때로 벤치마킹을 하면서 창조적 진화를 이끈 주역이 있었기에 새로운 가문의 역사가 쓰이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때로 ‘외가’ 라는 공간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 ‘위대함’으로 이끌어준 ‘멘토’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고 다음 세대로 세의(世誼: 대대로 사귀어온 정)를 이어간다면 이 또한 삶의 숭고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HUMANITIES CLASS| 인문학 산책
모든 길은 ‘수불석권’으로 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공한 이들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이른바‘ 수불석권(手不釋卷)’의 자세를 실천하며,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인생관과 세계관을 넓혀갔다. 책을 많이 읽고 틈틈이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향기가 난다는 뜻의 ‘문자향 서권기(文字香書卷氣)’ 의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 독서왕 이덕무와 김득신을 만나본다.
신분 차별을 날려버린 ‘책만 읽는 바보’
조선시대에 독서로 불우한 삶을 이겨내고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로 실학자 이덕무(1741~1793)를 꼽을 수 있다.
이덕무는 스스로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 했을 정도로 책을 끔찍이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은 인물이다. 그는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과 빈곤한 생활, 허약한 체질 등을 극복하고 확고한 학문관으로 독서에 힘써 정조 임금의 신임을 얻어 규장각 검서관에까지 올랐다. 그는 항상 소매 속에 책과 필묵을 넣어 다니면서, 보고 듣고 생각나는 것을 그때그때 적어 두었다가 저술할 때 참고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서 독서가 바로 삶의 일부분이었던 조선시대 지식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풍열로 눈병이 걸려 눈을 뜰 수 없는 중에도 어렵사리 실눈을 뜨고서 책을 읽은 책벌레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열 손가락 모두 동상에 걸려 피가 터질 지경에서도 책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덕무는 독서에 4가지 유익함이 있다고 했다.
첫째, 속이 비면 책 읽는 소리가 더 낭랑하고, 낭랑한 소리 속에 담긴 뜻을 음미하느라 몰두하게 되어 배고픈 걸 잊게 해주고,
둘째, 소리내어 읽다 보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와 편안해져 추위를 막아주며,
셋째, 책을 읽으면 눈은 글자에 고정되고, 마음은 이치에 몰두하므로 다른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어 근심과 번뇌를 없애주며
넷째, 기운이 통하여 막힌 것을 뚫어주어 기침까지 낫게 해 준다는 것이다.
책을 억만번 읽고 ‘억만재’ 를 짓다
조선시대 독서광이라면 숙종 때 시인 김득신(1604~1684)을 들 수 있다. 김득신은 어려서는 머리가 좋지 않아 겨우 열 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할 정도로 부족한 아이로 늘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사곤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글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노력을 통해 그 이치를 터득해 나갔다. 그리하여 뒤늦은 나이인 59세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입학, 조선시대 한학자 최고의 명필이며, 오언절구와 칠언절구의 대가로서 이름을 남긴다.
비록 어린 시절 은둔하고 재능이 없었지만 꾸준한 노력과 독서를 통해 한 풍미하는 시대적 위인이 된 것이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에 자리하고 있는 김득신의 옛집의 취묵당에 걸려있는 독수기(讀數記)에는, 그가 평생 1만 번 이상 읽은 글 36편의 목록이 가득 적혀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문장가 한유의 것이 20편으로 가장 많았고, 사기의 <백이정> 을 무려 1억 1만 3천 번이나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은 그의 서재 이름도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물론 조선의 선비들은 대나무 가지에 횟수를 표시하면서 독서할 정도로 글을 반복해 읽고 외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김득신처럼 1만 번 넘게 글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독서한 글과 횟수로 따지자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다산 정약용조차 김득신의 독서 열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글자가 생겨난 이후로 상하 수천 년과 종횡 3만 리를 통틀어 독서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당연히 백곡(김득신의 호)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김득신은 죽기 1년 전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나는 애써서 터득한 사람이다. 결국에는 성공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뜻과 소원을 다 이루었다" 라고 회고했다.
뒤늦은 출사로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조선시대 8대 문장가의 반열에 오른 그야말로 ‘가지고 있는 재능이 비록 부족하다 할지라도 노력하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주기에 충분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궁합이 맞는 책은, 곧 삶의 에너지
글은 단순히 문자의 나열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인데, 이것을 문체라고 한다. 사람으로 치면 고유의 인품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작가의 생명은‘문체’에 있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득신은 양기(陽氣)는 보약이나 보신 음식이 아닌 자신과 궁합이 맞는 문체의 책을 읽을 때 생긴다며, 이를‘성기(聲氣)’라고 주장했다. 개인의 성정이 작가의 문체와 잘 어우를 때 독서를 통해 양기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김득신이 말하는 책의 기운은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책을 읽을 때 문체에서 기운이 느껴지면 그것이 바로 책의 기운을 경험하는 것이다. 필자는 박경리의<토지>나 <김약국의 딸들>과 같은 작품을 읽을 때면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그에 반해 어떤 소설가의 작품은 아무리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다. 이는 바로 문체가 개인의 성정과 맞지 않은 까닭이다. 김득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기’가 맞지 않는 것이다.
평생 ‘독신’ 으로살아라!
이덕무와 김득신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바로 “평생 ‘독신’으로 살아라!” 가 아닐까.
여기서 ‘독신’ 의 의미는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사는 그런 독신(獨身)이 아니다‘.
독신 (讀神)’, 즉‘독서의 신’을 뜻한다.
21세기 우리 사회는 이른바 공부의 신, 즉 ‘공신(工神)’이 우상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 '공신’은 명문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이상형이라고 회자되지만 장기적으로는 ‘독신’을 이길 수 없다.
요즘처럼생존의필수무기로‘평생독서’가강조되는사회 적분위기에서는‘독신’이야말로학창시절뿐만아니라사 회에나와서도승승장구할수있을것이다. 평생책을가까 이하는‘독신’으로살아간다면설령학교공부에서‘꼴찌’ 를한다고해도마지막에는승자가될수있기때문이다. 모든길은‘수불석권’으로통한다!
요즘처럼 생존의 필수 무기로 ‘평생 독서’ 가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독신’ 이야말로 학창시절뿐만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 책을 가까이 하는 ‘독신’ 으로 살아간다면 설령 학교 공부에서 ‘꼴찌’를 한다고 해도 마지막에는 승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길은 ‘수불석권’으로 통한다!
글 최효찬
일러스트 이영림
글쓴이 최효찬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비교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매체 미학을 강의하고, 자녀 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 자녀교육과 자기계발, 문화연구분야에서 활발한 글쓰기와 강연을 하고 있으며, 여러 매체에서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우리나라 명문가의 자녀교육법을 다룬<5백 년 명문가의 자녀교육>에 이 어, 외국 명문가의 역사와 전통, 독특한 교육관을 면밀하게 분석한<세계 명문가의 자녀 교육>을 펴내 아이 키우는 부모에게 큰 교훈을 전해주었다. 그밖에<5백 년 명문가, 지속 경영의 비밀>, <세계 명문학교 1% 인재들의 공부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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