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이야기

[스크랩] 윗사람에게는 안심을,친구에게는 믿음을 , 아랫사람에게는 사랑을 !!

강나루터 2016. 10. 13. 03:22

 

가장 이상적인 사람

이인우 2013.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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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논어 명장면]<3> 

 


공자 뒷모습.jpg

사진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에서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노자안지 붕우신지 소자회지)

   -<논어> ‘공야장’ 편 25장

  

  윗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친구들에게는 신뢰받고 

  젊은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이고 싶구나.  

  


     1. 무차별의 공자 학당


  공자 일행을 따라 궐리에 온 나는 공문(孔門)의 일꾼이 되었다. 학당 안팎을 청소하고 문도들의 신발을 정리하는 한편 공자와 주요 제자들의 수발도 거드는 일이었다. 공자의 주유천하 시절 나를 짐꾼으로 채용했던 자공(子貢·공자의 제자, 이름 단목사, 기원전 520?~456?)이 오갈 데 없는 내 처지를 딱하게 여겨 특별히 배려해준 일자리다. 나는 학당에서 부지런히 몸을 놀려 금세 새 문도들에게도 성실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다. 쉬는 시간엔 귀동냥으로 들은 공부를 문도들에게 질문해 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친숙해진 젊은 문도들은 이런 나를 특별히 이생(李生)이라 불러주었다. 떠돌이 이방인 출신인 나로서는 과분한 호칭이었다.

  사실상 제2의 개교를 맞이한 학당에는 가르침을 청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공자는 이미 맹희자(孟僖子·노나라의 대부, 공자의 제자 남궁경숙의 아버지)와 같은 귀족 계층으로부터 자식 교육을 맡길 만한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은(<사기> ‘공자세가’) 사람이다. 그런 일급 교사가 유수한 제자들을 이끌고 귀국했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지자 노나라는 물론 이웃나라에서도 천리길을 마다치 않고 학생들이 궐리의 학당으로 몰려든 것이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교문 앞을 쓸면서 죽간 보따리를 짊어지고 손에는 정성스레 준비한 예물을 든 청운의 젊은이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이처럼 찾아오는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자, 학당의 부교장이자 학생회장 격인 자로(子路·공자의 수제자, 이름 중유, 기원전 542~480)는 신이 나서 온 궐리가 떠나가도록 소리치기도 했다.

  

  “누가 노나라에 현자가 없다고 하는가? 천하의 준재들이 모두 궐리에 모이고 있지 않은가!”

  

  일찌기 공자는 “육포 한 꾸러미를 들고 오는 정도의 예를 갖춘다면 모두 가르치겠다”(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술이’편 7장①)고 했다. 이러한 공자의 계급을 초월한 교육 방침은 신분의 굴레에 묶여 있던 많은 젊은이들을 자극해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 공문의 명성이 높아지자 하루는 미개하여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 호향(互鄕)이란 마을에서 한 소년이 찾아왔다. 그때 몇몇 제자들이 이 야만족 소년을 내쫓으려 했으나 공자는 그를 만나 따스한 말로 격려해주었다. 제자들이 호향 풍속의 야만성을 들어 공자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옳은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 선함을 받아들이고, 옳은 길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사람은 그 불선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뿐인데, 굳이 사람에게 심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다가오면 그 깨끗함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허물은 따지지 말자.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而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술이’편 28장②)

   

  유가(儒家)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최종적인 사상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공자 사상의 보편성에 있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다른 문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고, 스승에 대한 믿음도 그 어떤 학파보다 강했다. 그런 유능하고 충성스런 제자들이 공문에서 많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교무류’(有敎無類③)라는 시대를 앞선 공자의 혁신적 교육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승, 공자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진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기준으로 이끌어주셨다.”

  

  2. 만세사표(萬歲師表)의 첫 출발


  공자는 30살 무렵 본격적인 전업 교사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서른에 자립(三十而立④)한다고 하는 공자의 말은 실제로 그 무렵 학인으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독립적인 행보를 본격화했던 자신의 체험을 직접 술회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서 온 속인(俗人)으로서 나는 무려 2500여 년 전에 어떻게 공자가 전업 교사로 나설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것도 철저한 귀족 중심의 신분사회에서 일반 서민계급을 상대로 한 교육을 말이다. 설사 민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시설을 구상한다 해도, 집단으로 사람을 교육하려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 내용과 교수 방법, 시설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부유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사(士) 계급의  젊은이가 사실상 최초로 그것을 실현시켰다는 것이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느날 나는 공자의 가장 오랜 제자로서 젊은 시절의 공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로를 붙잡고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자로님, 저는 이 학교의 일꾼이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중국에 나라가 세운 관학(官學) 말고 이렇게 큰 사학이 또 있을까요?”

  “단언컨대 없다.”

  “우리 선생님은 어떻게 젊은 나이에 이런 멋진 학교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요? 자로님은 오래전부터 선생님과 함께 하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자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은 공경대부(公卿大夫)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셨기 때문이다.”

  “?”

  “선생님은 부유한 귀족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관학에 들어가 배울 수 없었다. 선생님은 배움을 원하고 배울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학교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이 가지셨다.” 

  “그런 차별을 선생님만 겪은 건 아닐 텐데요?”

  “선생님은 홀어머니 봉양을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일하는 틈틈이 예악과 역사, 시를 공부했다. 선생님은 따로 스승이 없으셨다. 그저 모르는 게 있으면 각 분야의 여러 전문인들을 찾아가 예를 갖춰 질문하기를 누구보다 즐기셨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단지 옛것을 좋아해 배우기를 누구보다 부지런히 했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술이’편 19장⑤)는 선생님의 회고는 이때의 학구열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해 점차 선생님의 학문이 깊어지자 이번에는 거꾸로 선생님에게 질문하러 오는 전문인들이 생겼다. 선생님은 이들과 효율적으로 문답하기 위해 날과 장소를 정해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약간의 예물을 가지고 참석하기를 청하면서 자연스레 학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 그것이 선생님이 전업 교사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사람들이 선생님에게 예물을 바친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세금을 걷으러 갔었으니까.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자 자로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말했다.

  “이보게 이생.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괜히 나의 옛 과거를 들춰보고 싶은 건가?”

  자로의 과거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는 속이 뜨끔했지만, 자로의 입을 통해 공자의 젊은 시절을 듣고 싶었다.

  “세금을 걷다니요? 정말 몰라서 묻습니다.”

 

 3. 자로초견(子路初見)


  자로는 직정적이면서 용감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자의 애제자 안연(顔淵·이름 회, 기원전 521?~482))과 마찬가지로 최하층 출신이었다. 집안이 가난해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 야인(野人)으로 생활했다. 자로는 돈이 모이면 쌀을 사서 백리 길을 짊어지고 가서 부모를 봉양했다고 한다.(<설원>(說苑) ‘건본’편)

  자로는 10대 후반에 곡부 시장의 무뢰한이 되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동네 건달 두목쯤 되었는데, 자로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를 자임했다. 그는 훗날 사마천이 <사기열전>에 담은 유협(遊俠·완력과 무공을 갖춘 자로서 의리와 정의를 중시하는 협객)의 원형질 같은 인물이었다.

  자로는 어느날 궐리에 사는 한 남자가 자기 초옥에 학당 간판을 내걸고 사람 가르치는 일로 먹고산다는 소문을 들었다. 알아보니 공구라는 장인(長人·키다리)인데, 나이가 자기보다 불과 9살 밖에 많지 않았다. 

  “어떤 놈이 내 허락도 없이 이 동네에서 영업을 하는가?”

  자로는 부하들을 이끌고 공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겁을 줘서 이른바 ‘세금’을 뜯을 작정이었다. 자로는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대뜸 칼을 뽑아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떠냐? 키만 뻘쭘하게 큰 위선자야. 내 칼춤 솜씨에 기가 팍 죽지?

 

 자로가 의기양양하게 공자를 노려보며 칼춤을 끝내자, 공자는 태연하게 한번 웃은 뒤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 그대가 잘한다는 것이 그것입니까?”

  “그렇다. 긴 칼이었다면 더 잘했을 거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닙니다. 칼 솜씨에 학식을 갖춘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네 눈엔 내가 우습게 보이냐? 공부? 그딴 거 없어도 날 우습게 여기는 놈은 이 바닥에 아무도 없다.”

  “사람은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들은 것조차 잃게 됩니다. 나무도 먹줄을 받은 뒤라야 비로소 반듯해지고(木受繩則直), 사람도 충고하는 말을 받아들여야 성스러워지는 법입니다(人受諫則聖). 그러므로 무릇 공부에는 묻는 것이 중요하며(受學重問), 군자라면 배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君子不可不學).”

    

  무식해서는 골목대장 노릇조차 쉽지 않다는 걸 체험으로 알고 있는 자로는 공자의 말에 번개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라, 이건 뭐지? 저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고, 굽은 듯하면서도 탄력 있게 뿜어나오는 저 강기(剛氣)는?  앎이란 저런 기품을 얻기 위함인가?  머리는 이리저리 안갯속인데 말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나간다.

     

  “웃기고 있네. 남산의 대나무는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고, 그것을 잘라 쓰면 물소의 가죽도 뚫을 수 있다. 굳이 배워야 할 필요가 무엇이람?”

    

  자로의 퉁명스런 대답에 공자는 이미 자로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시겠습니까? 화살 한 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 쪽에 촉을 갈아서 박는다면 깊이가 더욱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굳이 배움을 마다할 게 무엇입니까?”(이상 <공자가어>(孔子家語) 자로초견⑥)

  

  자로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거 참, 번지르르하게 말은 잘하네.” 휑하니 돌아서서 나오고 말았다. 그날 이후 한동안 자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저잣거리에서는 자로가 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길을 가고 있는 공자 뒤에서 웬 젊은이가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뒤따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주먹대장 자로였다. 

 “그날 이후 나는 한시도 선생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중유(仲由)는 나의 수제자요, 경호대장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암, 수석 자리가 아니면 누가 우리 선생님을 지킬 것인가? 어떤 놈도 하늘 같은 우리 선생님의 털끝 하나 손대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랬지, 그때는. 하하하.”

  

  나는 예순이 코앞인 할아버지 자로가 어린아이처럼 으시대며 옛일을 추억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고 부럽기도 하던지, 슬그머니 그를 좀 놀려주고 싶은 심술이 일었다. 자로의 유협 기질이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래도 제가 볼 때는 안연님이야말로 공자님의 수석 제자인 것 같습니다만.”

  나는 자로가 무슨 소리냐고 되받을 틈도 주지 않고 잽싸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안연님을 보실 때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을 보는 듯 합니다. 어떨 때는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모를 것 같은 눈빛으로 안연님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로님이 수석 자리를 자처하셔도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안연님이 으뜸 제자가 아닐까요?”

  자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이놈. 네가 나를 시험하려 드는구나, 허허. 이생아. 너는 내가 회(回)를 질투하는 것 같으냐? 그래, 말해주마. 사실 나는 회가 싫을 때가 있다. 나는 회처럼 어디 하나 허물할 데가 없는 그런 완벽한 사람은 솔직히 정이 안 간다. 그러나 나는 회를 미워할 수 없다. 이유는 한 가지, 네 말대로 선생님이 그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선생님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내가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느냐?”

  

  4. 진정한 기쁨


  해가 바뀌어 궐리 학당에 봄꽃이 만발할 무렵, 자로에게서 전갈이 왔다. 안연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다과를 나눌 테니 준비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얼마 전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공자의 아들 리의 자)가 병으로 죽었다. 자로는 스승이 아들처럼 사랑하는 제자 안연을 앞장세워 아들을 잃은 스승을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위안의 자리가 은근히 기다려졌다. 모처럼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며 세 군자가 나누는 대화를 직접 들을 기회가 어디 흔한가 말이다! 나는 다과는 물론이고 선생님을 위해 지난 가을 빚어서 고이고이 모셔둔 술을 꺼내 따뜻하게 데워 놓았다.

  세 사람은 학당 후원의 누각에 나란히 앉았다. 연지 옆에 세워진 이 대(臺)에서는 학당 안의 여러 교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스승과 두 제자는 서로 차를 따라주며 학교 일에 관해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과에 이어 준비한 술상을 내어가자 공자께서는 미소로 반기시며 “자네가 빚은 술은 특히 맛이 좋으이. 조선의 술인가?”라고 물어주셨다. 이윽고 자로가 선생님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다. 자로의 연주 실력은 별로였지만 공자께서는 즐겁게 들으셨다. “유(자로)의 금(琴) 실력은 언제나 늘꼬? 허허.” 뒤이어 안연이 특유의 섬세함으로 거문고를 켜자 숲의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고 연주를 듣는 듯했다. 

  

  “오랜만에 너희들과 함께 금을 연주하니 연못의 잉어들도 춤을 추는 듯 하구나.”

  

  연지를 내려다보면서 혼잣말 하듯 하는 공자의 목소리에서 문득 처연함이 묻어났다. 자로는 ‘아차’ 싶었다. “공리의 이름 ‘리(鯉)’는 잉어라는 뜻이 아닌가. 백어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가 하필이면 잉어가 헤엄치는 연지라니, 나도 참 한심한 사람일세….” 자로가 울상을 감추며 안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회야, 네가 좀 분위기를 바꿔보려무나.’ 안연이 자로의 뜻을 눈치채고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마당 맨 앞 교실을 보십시오. 신입생 교실인데 어느해보다 글 읽는 소리가 청아합니다.”

  자로가 거들었다.

  “저들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불원천리한 인재들이 아닙니까! 으하하!”

  공자께서도 웃으시며 말했다.

  “유는 늘 들통날 아첨만 하는구나.안 그러냐, 회야?”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안연은 더욱 진지하다.

  “선생님. 사형의 말이 지당합니다. 선생님이 아니 계시면 노나라, 아니 천하에 어찌 저런 소리가 울려 퍼지겠습니까? 들어보십시오. 제가 처음 선생님께 배우러 왔을 때 해주신 바로 그 말씀이 아닙니까?” 

  

  안연이 선창(先唱)한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이 어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자로가 흥에 겨워 큰 소리로 화창(和唱)한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안연이 단정하게 무릎 자세로 고쳐 앉아 공자에게 읍(揖)하고, 자로는 일어서서 읍한 뒤 오른팔을 공손하게 앞으로 펼친다. 가운데 앉은 공자께서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제자들에게 답례하신다. 세 사람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합창(合唱)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함이 없으니 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온(원망할 온) 不亦君子乎) 

  (이상‘학이’편 1장⑦)

  

  5. 그 스승의 그 제자


  감격에 겨운 듯 자로가 공자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 제게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신입생들이 공부하는 교실 이름을 지금부터 학습당(學習堂)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들어가는 문은 학이문(學而門)이라 하고, 나오는 문을 시습문(時習門)이라고 하고요. 하하, 그러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찌 잊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유의 말이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하지만 배움이란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교실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유야, 회야, 나는 이제 늙었으니 저 학생들의 교육을 너희 제자들에게 맡기고 싶구나. 너희들은 우리를 찾아와 문행충신(文行忠信⑧)을 연마하고자 하는 저 갸륵한 젊은이들을 장차 어떻게 이끌어줄 생각이냐?”

  자로가 먼저 대답한다. 

  “외람되지만 제가 저자의 왈패에서 조그만 고을의 읍재까지 해봤습니다만, 사람은 일정한 물산(物産)이 있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물질은 선비로서 구할 바가 못됩니다. 그래서 저는 저들에게 먼저 이런 모범을 보일까 합니다.“ 

   자로가 숨을 고른 뒤 엄숙한 표정으로 말한다.

  

   저는 제가 타고 다니는 수레, 제가 입는 좋은 갖옷을 저들과 나눠 써서 그것이 낡고 헐어서 못 쓰게 되더라도 하나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다.(願車馬 衣輕구(갖옷 구) 與朋友共 폐(헤질 폐)之而無憾)

   

   공자가 그 말씀을 듣고 흐뭇해 하셨다. 

  “훌륭하다, 나의 유. 자고로 자기 가진 것을 남과 나누면서 조금도 아쉬움이 없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로는 물질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구나.”

  안연의 차례다.

  “저는 가난해 나눌 재산이 없습니다만, 지식이 약간 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솔선할까 합니다.”

   

    저는 남들보다 학문이 높아져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깔보지 않겠으며, 공로와 업적이 넘치도록 쌓여도 그것을 함부로 자랑하지 않겠습니다.(願無伐善 無施勞) 

  

  공자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흡족해 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나의 회. 높은 경륜과 지식을 갖고도 오만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회는 지극히 겸손하여 지식으로서 남을 차별하지 않는구나.”

  공자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들으시고는 내가 올린 술잔을 또 비우셨다. 

  이윽고 자로가 공손히 말했다.

  “선생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뭔가 빠진 듯합니다. 선생님이 저희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연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형과 더불어 감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공자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말씀하셨다.

  “유야, 회야. 내가 무엇을 더 새롭게 말하겠느냐? 나는 그저 저들에게 이런 사람이면 족하다.”

  

    윗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직하며,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이상‘공야장’편 25장⑨)

  

  정적이 흘렀다.

  뭔가 특별한 말씀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자로는 순간 무엇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던 안연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말씀을 마친 공자께서는 글 읽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학당 쪽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셨다. 몇 초의 정적이 더 흘렀을까,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일어나 스승에게 절을 올리고는 한참을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스승이 전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가르침 속에서 두 제자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두드려오는 깊고 깊은 울림을 들었던 것이다.

   

  6. 열락대 아래서 귀를 세우다


  나는 누각 아래서 술을 데우며 세 사람의 대화를 잇따라 들었다. 진리란, 아름다운 사제간이란 과연 저런 것이 아닐까? 물질로서도 지식으로서도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고귀한 이상(理想)을 가슴에 지니고, 윗사람에게는 편안한 사람, 친구들에게는 신의로운 사람, 후배들에게는 진실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도대체 더 이상 무슨 말로 인간의 도리를 요약할 수 있을까? 또한 이 간명한 명제가 실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던가…. 

  훗날 자로와 안연에게서 이날의 말씀을 전해 들은 여러 제자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날의 대화를 스승의 어록에 담은 것은 이 문답이 내포한 인(仁)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한 결과였다. 현장을 지켜본 나로서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인(仁)과 안으로 깊이 감추는 인(仁)의 화음을 그들도 분명 들었던 것이라고.

  나는 그날부터 연지의 누각을 열락대(說樂臺)라 불렀다. 세 군자의 이날 대화를 기념하고 그것을 직접 들은 기쁨을 자축하는 의미였다.그리고 그날 밤 나는 도필(刀筆)을 갈아 죽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새기고 먹을 넣었다. 

   

  孔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小者懷之 

  子路顔淵聞說樂臺 下臺李生立耳溫酒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배나 윗사람에게는 뭘 맡겨도 안심이 되는 사람

  친구와 동료에게는 뭘 같이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

   후배와 부하들에게는 진심으로 이끌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한다.

  

  자로와 안연이 이 말씀을 열락대에서 듣다. 

  이생, 대 아래에서 술을 데우며 귀를 세우다.

   

 



 

 [원문 보기]

  

   *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논어> 원문의 한글 번역은 <논어집주>(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편)와 <안티쿠스 클래식6-논어>(한필훈 옮김)를 나란히 싣는다. 각각 신구 번역문의 좋은 사례로 생각되어서이다. 표기는 집(논어집주)과 한(한필훈 논어)으로 한다. 이와 다른 해석을 실을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술이편 1장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포 한 속(10개-지극히 적은 예물을 뜻한다) 이상을 가지고 와 집지(폐백)의 예를 행한 자에게는 내 일찌기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면 모두 제자로 받아들였다.”

  

  ②술이편 28장

  互鄕 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집-호향 사람과는 더불어 말하기 어려웠는데, 호향의 동자가 찾아와 공자를 뵈니, 문인들이 의혹을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몸을 가다듬어 깨끗이 하고서 찾아 나오거든 그 몸을 깨끗이 한 것을 허여할 뿐이요, 지난날의 잘잘못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찾아옴을 허여할 뿐이요, 물러간 뒤에 잘못하는 것을 허여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심하게 할 것이 있겠는가?

  한-호향이라는 마을 풍속이 고약해서 그 마을 사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그 마을에 사는 한 소년이 공자를 만나러 왔다. 제자들이 매우 당혹스러워 하자 공자가 말하였다. “옳은 길로 나아가려 하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퇴보하는 사람과는 함께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그렇게 심하게 굴 필요가 있느냐?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다가오면 그 깨끗함을 받아들이고, 과거의 잘못은 묻지 말도록 하자.”  

  

  ③위령공편 38장

  有敎無類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침이 있으면 종류가 없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교육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④위정편 4장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고, 마흔 살에 사리에 의혹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도 법도에 넘지 않았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세계관이 확립되었다. 마흔이 되자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쉰 살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예순 살에는 무엇이든 한 번 들으면 저절로 통달하게 되었고, 일흔 살이 되니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⑤술이편 19장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가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급급(汲汲)히 그것을 구하는 자이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천재가 아니다. 단지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탐구하는 사람일 뿐이다.”

  

  ⑥<공자가어(孔子家語)>(임동석 역주) 권5‘자로초견’ 

  子路見孔子 子曰 汝何好樂? 對曰 好長劍. 孔子曰 吾非此之問也 徒謂以子之所能 而加之以學問 豈可及乎? 子路曰 學豈益哉也? 孔子曰 夫人君而無諫臣則失正 士而無敎友則失聽 御狂馬不釋策 操弓不反경(도지개 경) 木受繩則直 人受諫則聖 受學重問 孰不順哉? 毁仁惡仕 必近於刑 君子不可不學. 子路曰 南山有竹 不柔自直 斬而用之 達于犀革 以此言之 何學之有? 孔子曰 괄(도지개 괄)而羽之 鏃而礪之 其入之不亦深乎? 子路再拜曰 敬而受敎.

  자로가 처음 공자를 뵈었을 때 공자가 말하였다. “너는 무엇을 좋아하느냐?”자로가 대답하였다.“저는 긴 칼을 좋아합니다.”공자가 말하였다.“나는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다. 한갓 네가 능한 것만 말하는구나. 그 위에 학문을 더한다면 누가 어찌 여기에 따라오겠느냐?”자로가 말하였다. “배움에 무슨 유익함이 있습니까?”공자가 말하였다. “무릇 임금으로서도 간언해 주는 신하가 없으면 곧음을 잃게 되고, 선비로서 가르쳐 주는 친구가 없으면 들은 것을 잃게 된다. 길들지 않은 말을 다루려면 그 손에 채찍이 떠날 수 없고 활을 잡자면 활 조정하는 도구에 반대로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나무도 먹줄을 받은 뒤라야 비로소 반듯하게 되며 사람도 간하는 말을 받아들여야 성스러워지는 것이다. 학문에는 묻는 것이 중요한데 누가 이에 순종하지 않겠느냐? 만일 어진 사람을 헐뜯거나 벼슬하는 자를 밉게 여긴다면 틀림없이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군자는 배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로가 말하였다. “남산에 대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잡아 주지 않아도 저절로 반듯하게 자라며 그것을 잘라서 쓴다면 물소의 가죽도 뚫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말한다면 꼭 학문을 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공자가 말하였다. “화살 한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 쪽에 촉을 갈아서 박는다면 그 박히는 깊이가 더욱 깊지 않겠느냐?” 자로가 재배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공경하여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⑦학이편 1장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온(성낼 온) 不亦君子乎

  집-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동지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한-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은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⑧술이편 24장

  子以四敎 文行忠信

  집-공자께서는 네 가지로써 가르치셨으니, 문(文)·행(行)·충(忠)·신(信)이었다.

  한-공자는 네 가지를 가르치셨다. 학문, 실천,성실, 신의가 그것이다.

  

  ⑨공야장편 25장

  顔淵季路侍 子曰 합(어찌아니 합)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衣輕구(갖옷 구) 與朋友共 폐(해질 폐)之而無憾.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집-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께서 “어찌 각자 너희들의 뜻을 말하지 않는가?”하셨다. 자로가 말하였다. “수레와 말과 가벼운 갖옷을 친구와 함께 쓰다가 해지더라도 유감이 없고자 하옵니다.”안연이 말하였다.“자신의 잘하는 것을 자랑함이 없으며, 공로를 과시함이 없고자 하옵니다.”자로가 “선생님의 뜻을 듣고자 하옵니다”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고, 붕우에게는 미덥게 해주고, 젊은이를 감싸주고자 한다.”

  한-안회와 자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는데 공자가 말하였다. “너희들의 포부를 듣고 싶구나.”자로가 말하였다.“저는 좋은 수레와 말, 그리고 고급스런 털가죽 옷을 친구들과 나누어 쓰고도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이어서 안회가 말하였다. “장점을 자랑하지 않고 공로를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자로가 말하였다.“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하고, 친구들에게 신뢰받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구나.”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평신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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