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세상

[스크랩] 한국의 서예가와 그 작품들 (2)

강나루터 2017. 5. 11. 05:31

 

   

 한국의 서예가와 그 작품들 (2)

 

소전 이후 가장 빛나는 서예가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중은 어떤 면에서는 소전과 쌍벽을 이룰만한 서예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본인과는 타협하지 않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4세 될 때까지 학교를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지도 아래 한문과 서예 공부를 했다. 
1938년 중동중학교 1학년 때(17세)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서예로 5개 부문을 통틀어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다음해 〈동아일보〉에 '궁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데뷔는 1941년경으로 본다. 1942년 일제의 눈을 피해〈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저서를 
냈고, 그후 〈중등 글씨체〉·〈중학 서예〉·〈고등 서예〉 등을 출간하면서 서예활동을 전개했다. 
애초부터 한글로부터 서체(書體)를 시작한 그는 고체(古體)를 현체(現體)로 쓰는 법의 개발에 몰두했는데 
이는 서예가 비록 한자문화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고, 1954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58년 동방연서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국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문교부 검인정 교과서 편찬위원을 지냈다. 그는 반세기에 걸쳐 주로 교육계와 저서를 통해 서예 교육에 
전념해왔다. 1981년 회갑을 맞아 비문 등 모두 200여 점이 수록된 서집을 출간했다. 

일중은 한글 서예를 쓰게 된 연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내가 한글 글씨를 쓰게 된 것은 두 가지 연유가 있었다. 먼저 내 일은 내가 해야겠다는 것이고 
그 다음엔 우리 집에 전해오는 궁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말하기를, 글씨에 있어서 
우리는 힘이 갑절 든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 
……쓰다 보니 어떠한 체계를 세워야 공부하기에 편리한 것을 깨닫게 되어 약관의 나이로 모든 것이 
미숙하지만 책을 하나 엮었다.『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책이었다."(『藝에 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藝에 살다』) 

"서예의 근원과 필법의 정통이 한자에 있느니 만큼 이 글씨를 배우지 않고 서예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국문은 우리의 고유문자이니 이 글씨를 우리가 배워 익히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藝에 살다』) 

이렇게 일중은 궁체 작품활동과 더불어 국내 유명기념물의 글씨를 많이 써서 남기는 등 국내외에 
그의 한글 궁체의  금석문이 많이 있다. 또 한편 한자 예서체 느낌의 판본체를 최초로 창안하여 
보급하여 초중등 교과서의 모범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래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 이동국의 글을 인용한다.

"일중의 글씨는 한마디로 서예사에서 손꼽는 명서가들이 그래왔듯이 ‘옛 것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가학(家學)을 바탕으로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자 노력한 결과 안진경체로 필력을 얻고 장천비(張遷碑)와 예기비(禮器碑) 
등의 한예(漢隸)를 조종으로 삼아 한글 고체의 필법인 전서체를 가미하여 소위 ‘일중체(一中體)’를 
만들어 낸 것이 그 것이다. 
이러한 일중의 예술은 그 형성 과정을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Ⅰ期 : 立志와 한글에의 관심(1934년 중동학교 입학 이후 1945년까지)
Ⅱ期 : 축적(蓄積)과 개발(開發)(1945년에서 1962년까지)
Ⅲ期 :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서(1962년에서 1969년 일중묵연(一中墨緣) 설립까지)
Ⅳ期 : 예서(隸書)와 행초서(行草書)의 융합(融合)(1969년에서 1980년까지)
Ⅴ期 : 예술가로서 소요(逍遙)(1981년 이후 현재)

이 중에서 일중의 한글서예는 이미 Ⅰ기 때인 22세(1942년)부터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일생을 두고 궁체 중심의 한글의 조형적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한글 고판본의 글씨체를 토대로 하고, 
한자의 전예 필법을 융합하여 ‘한글고체’를 제시하였다는 데에서 그 위대성이 있다. 
그 대표작으로는 <枾葉山房八詠(시엽산방팔영, 1978년작)>, 
<月印千江之曲(월인천강지곡, 1988년작)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일중의 한자 서예는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역대 비 , 첩을 동시에 소화하여 
가장 고전적인 입장에서 전 , 예 , 해 , 행 , 초는 물론 국 , 한문 혼용 등의 각 체를 구사하였다는데 
특장이 있다. 특히 전예의 획법이나 결구가 해 , 행 , 초에 구사되면서 이들의 필법과 조형이 
융합된 파서체(破書體)는 일중 예술의 득의처(得意處)라 자리매김할 수 있는데,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 나선 일중 예술의 Ⅲ기와 Ⅳ기에 해당하는 60년대 말기에 시작되어 
7, 80년대에 꽃을 피웠다. 
이러한 파서체는 <淸陰群玉所記(청음군옥소기, 1979년작)>,<守素明德開物成務(수소명덕개물성무, 
1980년작)>, <寸陰是競(촌음시경, 1980년작), <弘慶寺碑詩(홍경사비시, 1980년작)>, 
<歸舟(귀주, 1987년작)>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중 특유의 원만(圓滿)하고 둥글둥글한 
원필(圓筆)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방필(方筆)의 혼용으로 예법(隸法)을 가지고 
행초(行草)를 구사하거나 결구(結構)를 만드는(또는 그 반대) 쪽으로 진행되었다. "

ㅡ2004. 11.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



일중 김충현 선생의 작품 '정읍사'(1960). 한자와 한글의 다양한 서체를 하나의 작품에융합했다.


                            

 

 

 

일중  김충현 작
-명대연경(銘帶硏經) [명대는 공손함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가고, 연경은 늘 겸손할 수록 더하여지네] 









그리하여 일중은 소위 '일중체'라는 서쳬를 확립하였고 사회 일반의 인기를 얻어 70~80년대에는
삼성그룹을 비롯하여 유수의 대기업체의 사명을 쓰는 회사 로고로도 많이 쓰였다.
그는 교육자답게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우려 문하에 초정 권창륜 (艸丁 權昌倫) (1943 ~ ) ,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1948~ )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여기서 잠시 본론에서 벗어나는 감이 있지만 역사를 통해 관찰하면 훌륭한 스승은 뛰어난 제자를
양성 배출하지만 반대로 훌륭한 제자들은 그의 스승을 빛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추사나 소전같은 분들은 그들의 제자가 스승의 위상을 높혔듯이 오늘 날에는 초정이나 소헌 같은 
한창 잘 나가는 서예가가 있어 그들의 스승 일중을 빛나게 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 ,1927~2008)의 경우는 일중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여초는 형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동생인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과 함께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는 서예가 집안 출신이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맥을 이은 소전 손재형(1903-1981), 검여 유희강(1911-1976) 이후 
형 일중 선생과 함께 우리 서예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려왔다.
1927년생인 여초는 휘문고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50-1960년 국회보 주간을 맡았고, 
국회 도서관 1호 직원이 되기도 했으나 붓을 놓지 않아 1956년에는 동방연서회 설립회원으로 참여했고 
1969년부터 이사장을 맡아 수천명의 제자들을 길러왔다.
한국전각학회 회장, 사단법인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도 지냈으며 저서로 '동방서예강좌', 
'동방서범', '서연기인' 을 내는 등 서법 연구에도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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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는 대전, 소전, 예서, 해서, 초서 등에 통달하고 전각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만의 독특한 글씨체 즉 '여초체'라는 것을 내놓지는 못한 체 2008년 생을 마감했다. 3, 오늘의 서예가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서예 주변 환경의 변화에 관해 언급해야 할 것 같다.
60년대 이후 놀라운 한국경제의 성장, 사회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서예 인구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정확한 통계는 알지못하나 한자, 한글 공히 서예 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 났고 특히 중국의 대외개방 이후 
한문, 한자문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요즈음은 서예 학원을 비롯하여 전문 서예가들의 서실이 
동네 마다 들어와 있으며 서예를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더구나 1980년 국전이 폐지된 이후에는 이에 대채할만한 규모의 전시회도 3~4개 생겨 오히려 등용문도 
넓어져 서예애호가의 수는 날로 늘어나고 서예가 계층도 두터워져 유명 서예가가 상당 수 포진하고 있어 
옥석을 가리기도 힘들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 계열의 소전, 검여 등과 일중, 여초 계열로 대별되는 양대 산맥의 맥을 잇는
몇 몇 서예가를 중심으로 지금의 한국 서예계를 대표하는 서예가를 뽑을 수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첫번 째 인물이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이다.
초정 권창륜(1943- )은 1943년 경북 예천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에 일중 김충현선생에게 사사하여 국전 입선 10회, 특선 4회의 기록을 세우고
국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서예가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상의 화려한 경력에서 보듯 그는 여초 타계 이후에 한국을 대표할만한 서예가로 평가 받는듯 하다.
그는 5서(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를 다 섭렵하고 사군자, 문인화, 전각 등 다양한 분야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 그의 이름은 중국, 일본 등 동남아 서예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중국 북경에서 개인전을 열어 한중 문화교류의 장을 마련했고 
고향인 경북 예천군 용문면 능천리에 대규모 서예체험관을 건립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서예를 계승 발전시키고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건립된 전통서예체험관에는 대규모의 작품전시실, 
유물전시실, 이론 강의실,  실기체험실, 교육시설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초정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서예가는 초민(艸民) 박용설(朴龍卨)이다.
초민 박용설(1947~ )은 서울의 경동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대 체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 그는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학남 정환섭의 문하에 들어가 서예수업을 했다.
학남 정환섭은 소전 손재형의 제자이므로 계보로 본다면 박용설은 소전의 계보를 잇는 셈이다.
초민은 미술대전에서 8번의 입선과 2번의 특선을 거친 뒤 1986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
그는 이화여고에서 15년간 교편을 잡았고 1990년 9월부터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금까지 지도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그는 5체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습(博習)에 대한 신념을 지금까지 견지해 오고 있고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예컨대 제자들이 고윤서회(古胤書會)를 결성하고 작품전을 할 때 
그들에게 중국의 최신 자료를 제공하며 각 서체별로 연찬해 나가도록 지도하고 있다.
고윤서회의 회원 중의 한사람인 시헌(是軒) 남두기(南斗基, 1953~ )는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도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다음으로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을 들어야 하겠다.
194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정도준은 10살 때 처음 붓을 잡았다. 
그의 부친은 해인총림 현판을 쓴 유당(惟堂) 정현복(1909~1973) 선생이다. 
그는 상경하여 건국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친의 소개로 일중 김충현 선생에게서
본격적인 서예수업을 받으며 대학 공부보다 서예 공부에 전념했다.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작품 `조춘(早春)`으로 대상을 차지했고,
199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전을 시작으로 한국 서예의 깊고 은은한 멋을 유럽에 알려왔다. 
2000년 독일 KIST 유럽 초대전, 2001년 프랑스 파리 미로갤러리 초대전, 
2002년 프랑스 레임 초대전 등 지금껏 25차례 해외전을 여는 등 해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2001년에는 경복궁의 흥례문 현판 휘호를 비롯해유화문 현판과 창덕궁의 진선문 숙장문 현판, 
규장각 그리고 덕수궁의 덕홍전 중수기 등 숱한 문화재를 복원하며 그의 글씨를 남겼다.
그는 한글서예에도 독창적인 필치를 구사하여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으며
90년 9월부터 초민 박용설과 함께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도교수를 맡고 있다.
그의 제자 한얼 이종선도 서예아카데미에서 한글부문 서예 지도교수로 활동 중이다.
        
          
                       
                         

네번째로 한사람을 더 뽑는다면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학정 이돈흥은 1947년 담양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송곡 안규동 선생을 사사하고,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등 한국서예의 전통을 계승한 호남계열의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나름대로 독창적 서체인 鶴亭體를 이뤄내는 등 한국 서단에서 활약중이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광주시립미술관 초대 ‘학정 이돈흥 서예술 40년전’을 열었다.  
그도 2005년 5월부터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주 1회 강의중이다.
     
 
 
 
끝으로 정통 서예가는 아니지만 쇠귀(牛耳) 신영복(申榮福, 1941~ )을 들고 싶다.
신영복은 오랜 기간 영어생활을 한 극적인 인생체험을 통해 독특한 서예관을 터득한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서예가로 불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우선 그의 이름은 한국서예가협회에 등록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연유로 해서
웬만한 서예가 이상으로 활발한 서예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어려서 조부에게서 한문과 글씨을 배웠고 20여년에 걸친 교도소 생활을 하는 동안
교도소측에서 주선해준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선생과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선생
두 분으로 부터 서예교육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두 분 중에도 정향 조병호(1914~ )는 일중, 여초에게서도 존경을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서예가로
알려져 있는 분인데, 전서로 부터 예 해 행 초에 이르기까지 5체를 7~8년에 걸쳐 지도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글 서예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우려 궁체, 고체를 토대로 탐구하여 그 나름대로
한글체를 개발하여 한자와 한글을 겸용한 독창적인 '신영복체'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글씨외에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즐겨 서화를 함께 구사하고 있다.
하여간 그는 정통 서단의 작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실제적인 영향력면에서는 대단한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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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랑하는사람들의 인생
글쓴이 : .만리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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