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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國立扶餘博物館

강나루터 2011. 8. 11. 20:11

 

 

 

 

 

(國立扶餘博物館)

 

 

백제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던 사비시기 수도 부여에 위치하며 당시의 문화재를 연구조사하고 전시교육하는 백제전문박물관 입니다. 국보3 점과 보물 5 점등 총 25,0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약 1,000여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읍니다. 특히 매년 백제문화를 중심으로 한 특별전 개최를 통해 관람객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읍니다. 

 

 

 

 

 

 

 

 

 

 

 

 

 

 

 

 

 

 

 

 

 

 

 

 

 

 

 

 

 

 

 

 

 

 

 

 

백제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爐)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12일백제 나성과 백제왕릉원 중앙칸 서쪽의 한구덩이에서 출도된 이 향로는 높이 61.8 cm 무게 11.8kg의 대형향로로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위에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며 뚜껑에는 피리와 소비파,현금,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무인상,기마수렵상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용을비롯한 동물을이 표현되어있다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종교,사상,제조기술까지도 파악케하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국보제287호) 

 

 

 

 

 

 

 

 

 

 

 

 

 

 

    

 

  

 

 

 

 

 

 

 

 

 

  

 

 

 

 

 

 

 

 

 

 

 

 

 

 

 

 무늬벽돌

부여외리에서 출토된 무니벽돌은 산경치,용.봉황,연꽃,구름,도깨비등 여덟가지 무늬로 구성된다. 벽돌에 표현된 무늬는 백제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자연과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여덟가지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백제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러한 상징은 백제의 예술작품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가 가장 예술적으로 집약된 아닌 백제금동대향로이다.  

 

 

 

 

 

 

 

  

부여석조 (扶餘石槽)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工" 자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 형태의 석조가 오려져 있다.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사용한것으로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되어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감각을 잘보여주고있다. 석조의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세로줄을 새기고 그 사이에 글을 새겨 넣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보인다. 글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으로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 (국보5호)의 1층 탑 몸돌에 새긴것과 같은것이다.

 

 

 

 

동사리석탑 (東寺里石塔)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석탑이다. 2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 몸돌이 올려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면에는 각면마다 무늬를 얕게 새겼고 위층 기단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모퉁이 마다 돌출된 꽃조각을 두었다. 탑의 몸돌은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 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는 큰차이를 보이고있다. 꼭대기 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지금의 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탑 양식이다. 

 

 

 

 

지붕돌

고려시대 의 것으로 추정됨 

 

 

 

 

비석받침

고려시대 의 것으로 추정되며 서천 군사리에서 출토 

 

 

 

비머리

비머리는 니무기를 새긴 비석의 머릿돌로 이수 라고 부른다 비머리는 일찍이 중국 한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 하였으며 당나라에 이르러 절정기를 이룬다. 이 성주사터 발견 비머리는 반룡 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조각 되어 있는데 석비를 들어올리는 형상이다. 중앙 상단부에는 원형으로 된 제액 이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각이 섬세한 작품이다.  

 

 

 

 

비석받침

비석받침은 거북 모양의 돌비석 받침돌을 가리킨다. 거북이 잔등에 장방형의 비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우는 것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등 모양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조각되어 있다. 상부에는 비신을 꽃을수 있게 비좌가 마련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석받침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연꽃무늬석등받침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부여 석목리에서 출토 

 

 

 

 

석탑

통일 신라시대 의 것으로 추정되며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에서 출토 

 

 

 

 

동남리석탑 (東南里石塔) 

부여 석목리 논절마을의 고려시대 절터에 있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2층의 기단위에 5층 의 탑 몸돌을 올린 석탑이 었으나 아래층 기단의 일부만 남아 있고 탑몸돌의 4층 석탑이었으나 아래층 기단의 일부만 남아있고  탑 몸돌의 4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은 탑몸돌의 1층 몸돌을 괴어주는 부분 주위에 넓게 테두리를 두른 뒤 연꽃무늬를 장식하엿다. 2층 몸 돌부터는 갑자기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 큰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쳐주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고려시대 후기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석탑이다.

 

 

 

 

모든 여행은 즐겁다. 그래, 여행은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거야. '살까 말까 망설이는 물건이 있으면 사지 말아야 하고, 갈까 말까 망설이는 여행이 있으면 가야 한다' 라는 말은 언제나 명언이다.  - 박혜란의《다시, 나이듦에 대하여》중에서
     
 

 

' 위의 학교'


나는 여행이란
길 위의 학교라고 굳게 믿는다.
그 학교에서는 다른 과목들도 그렇지만
단순하게 사는 삶, 돈이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삶에 대한 과목을 최고로 잘 가르친다.
한번 배우면 평생 쓸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수업이니
필히 수강하시길 바란다.


- 한비야의《그건, 사랑이었네》중에서 -


* '길 위의 학교'.
여행은 길 위의 움직이는 학교입니다.
운명과도 같은 새로운 만남과 사람과 삶을 배웁니다.
서로 사랑하는 법, 감동을 나누는 법을 배웁니다.
나를 용서하는 법, 화해하는 법도 배웁니다.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는 기술을 배우고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배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여행을 떠납니다.

출처 : 密城 朴 善 泳
글쓴이 : 峰移 朴先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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