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세상

[스크랩] 당 해서의 확립, 안진경 서 안근례비-한자의 발생과 형성(33)

강나루터 2018. 4. 17. 19:21

유구한 중국 역사를 더듬어 문자예술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발전시킨 한자의 발생과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저의 기획물 <한자의 발생과 형성> <당 해서의 확립-안진경 서, 안근례비>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여태까지 한자의 발생과 더불어 서예술의 근원을 탐색해 보고자 고심하면서 올렸던 글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한자(漢字)의 발생(發生)과 형성전(形成展) 기획

 

1. 원시의 골짜기 甲骨文의 세계

  1-1. 은 무정왕 갑골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194

  1-2. 은 부호왕비 갑골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197

  1-3. 은 말기의 갑골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0

  1-4. 갑골문 작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12

 

2. 그림에서 태동하기 시작하는 殷 金文 

  2-1. 양마천시부정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1 

  2-2. 제기차정부계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4

  2-3. 삼첩자의 탄생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4

  2-4. 소신여희존 금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7

  2-5. 극정 금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30

  2-6. 금문 작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03

 

3. 청동기에 새겨진, 철밥통 만큼 둔탁한 周金文

  3-1. 무왕 대풍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36

  3-2. 성왕 대보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39

  3-3. 주공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42

  3-4. 사송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46

  3-5. 대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49 

  3-6. 대우정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55

  3-7. 국차첨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58

  3-8. 모공정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62

  3-9. 주 금문 작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67

  

4. 大篆에서 小篆으로 가는 길목에 돌로 북을 만들어 石鼓文을 새기다.

   석고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70

 

5. 어지러운 세상 만큼이나 다양한 춘추전국시대 문자들

  古文 金剛經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98

 

6, 소전으로 문자 통일

   6=1. 秦 驛山刻石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09

   6-2. 소전체로 쓴 반야심경 작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30

 

8. 隸書의 꽃을 피우는 한나라 석비들

   8-1. 을영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11

  8-2. 예기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13

  8-3. 조전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17

  8-4. 장천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19

 

9. 위대한 書聖 王羲之의 출현과 行書, 草書 

  9-1. 행서- 난정서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22

  9-2. 초서- 17첩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24

  9-3. 초결가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28

 

10. 唐 諧書의 확립 

  10-1. 구성궁 예천명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34

  10-2. 안탑성교서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49

  10-3. 안근례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70

 

<안근례신도비 제액-비문에서 집자>

 

 

 

 

당 해서의 확립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에 이어 저수량의 안탑성교서를 언급하고는 초당 삼대가인 우세남의 공자묘당비를 훌쩍 뛰어넘어 안근례비로 대미를 장식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해서체를 더욱 발전시킨 유공권이나 조맹부의 송설체에 끼친 영향을 살펴볼 때 안근례비로 대표되는 소위 안진경체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공권(778~865)의 경우 당 말기에 활약한 인물로 <용필재심 用筆在心 심정즉필정 心正則筆正 용필은 마음에 있으며, 마음이 바르면 용필도 발라진다.>는 서예사상 천고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가 쓴 글씨로 대표되는 것이 현비탑비와 신책군비가 꼽히고 있는데, 골기가 강하고 세력이 맹렬하다는 구양순의 장점과 육질이 풍부하고 세력을 감추고 있다고 평가받는 안진경체의 장점을 살려 두 대가의 심미적 특징을 기초로 하여 필획에 예리함과 힘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송대에 이르러 목판인쇄자의 범본으로 사용될만치 해서의 전형으로 널리 보급되게 됩니다.

 

<유공권의 해서체>

 

 

 

 

 

 

조맹부(1254~1322)의 경우 송나라 말기에서 원나라에 걸쳐 활약한 인물로 그의 해서체를 특별히 송설체 또눈 한림원체라 하여 원, 명, 청대에 이르기 까지 판본에 널리 송설체가 사용되었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쳤고, 특히 고려 말, 충선왕이 세자 시절 북경에 볼모로 있을 때 그를 수행한 이제현과 이암을 통해서 고려에 전파되었고, 조선조에 이러러서는 안평대군이 송설체에 정통하여 몽유도원도 발문을 남겼으며, 조선 중기까지 송설체가 대 유행을 하게 됩니다.

 

<조맹부의 해서체>

 

 

 

 

 

 

안근례비를 언급하면서 조맹부의 송설체를 거론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서풍의 변화를 이야기하고자 함입니다.

초당 3대가가 해서체를 확립시켰으나 이 때 까지 왕희지의 서법에 기초하여 서예가 발전되어 온 것을,

안진경에 이러러 왕희지 계열에서 보았을 때는 이단이라고 배격할 정도로 극단적인 해서체가 나타나 이것이 유공권의 활약에 힘입어 송대까지 대 유행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달이 차면 이지러지는 철리와 같이  원대의 조맹부는 왕희지체의 복귀를 강렬히 추구하면서 다시 초당의 해서체를 발전시켜 송설체를 유행시키게 됩니다.

사실상 송설체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금속활자본의 정통서체로 계승 발전되게 됩니다.

 

<조선조에 사용된 안진경체의 일 례> 

 

 

 

 

<안근례비 탁본>

 

 

 

 

 

<탁본의 부분 글씨들>

 

 

 

 

 

 

 

 

 

 

 

 

 

<비석 이면의 첫머리와 ? 부분>

 

 

 

 

 

<비문의 해석>

 

 

 

 

 

 

 

<안근례비의 재발견과 안진경의 생애 및 서학>

 

이 비문의 주인공 안근례는 안진경의 증조부가 되는 분으로 안진경이 이 비문을 쓴 연대는 확실하지가 않으나 그의 필력이 최고조에 달하여 마고선단기를 쓴 시기가 63세인 서기 771년 전후로 추정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송대에 이미 유실되어 송탁본이 몇 점 희귀하게 존재했을 뿐 번각본 조차도 유포되지 않아 수 백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근세에 이르러 청조가 망하면서 중국이 내전으로 극심한 혼란기에 처해 있던 중화민국 11년인 1922년에 장안의 어느 관청 창고 건물의 뒷편 땅 속에서 비신이 동강나고, 한면이 마멸된 체 재발견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글씨체의 상태는 오랫동안 땅 속에 매몰되어 있었던 관계로 위 탁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극히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총 1,600여자 가 수록되어 있어 안진경체를 연구하는데 더 없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안진경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그가 27세 때 진사에 급제한 이래 평생동안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특히 안록산의 반란에서 방비를 잘한 공로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만년에는 태자를 교육하는 태자태사의 직위에 까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75세의 노령임에도 마다 않고, 반란군을 회유하러 적진으로 갔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후당에서는 그를 당나라를 위하여 분골쇄신한 공신으로 충신의 반열에 올려 숭상했으므로 그의 인품과 더불어 그의 글씨 또한 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적 때문에 그의 글씨는 후대 구양수가 <안진경의 글씨는 충신열사, 도덕군자와 같아서 그 단정하고 장엄하며 존귀하고 중후함 때문에 사람들이 처음 보고서는 두려워 하나 이를 오래 두고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다>고 칭찬해 마지 않았습니다. 

또한 송대를 대표하며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인 소동파도

<시는 두자미(두보), 문은 한퇴지(한유), 서는 안노공(안진경), 화는 오도자(오도현)>라고 칭송하면서 안진경의 서에다 최고 최상의 찬사를 붙여 주었습니다. 

역대의 서가들이 안진경의 서를 평하기를,

안노공의 서법은 점과 획이 하나같이 그 위치와 방향에 따라 적소에 필세가 느껴지고, 또한 선은 두터움의 중간으로 한눈에 보아 강철같은 준경한 선인데도 윤택한 생기가 넘치며, 자형은 부드럽고 우아하여 보면 볼수록 친근감과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그 구성이 규범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서체는 충신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후일 유공권에게 계승되어 한층 발전하면서 송대에는 목판활자체로 사용되는 등 일세를 풍미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독특한 해서와 더불어 행서를 잘 썼으며, 그의 작품 제질문고는 왕희지의 난정서가 천하제일행서로, 안진경의 제질문고는 천하제이행서로, 소동파의 한식첩은 천하제삼행서로 꼽힐만치 유명합니다.

이 외에도 안진경의 글씨로 대표적인 것은

천복다보탑비(752), 동방선생화찬비(754), 제백부문고(758), 쟁좌위첩(764), 마고선단기(771), 안씨가묘비(780) 등이 있습니다.  

 

<인물탐구>

 

안진경 (顔眞卿)

 

 

태어난 때 709
태어난 곳 경조(京兆) 만년(萬年: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
죽은 때 785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당(唐)
직업 서예가

(병) Yan Zhenqing (웨) Yen Chench'ing. 709 경조(京兆) 만년(萬年: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 785.

중국 당대(唐代)의 서예가.

자는 청신(淸臣). 안사(安史)의 난과 이희열(李希烈)의 난 때 큰 공을 세웠으나 난중에 순국했다. 공훈과 예술적인 재능으로 인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남북조시대 이래로 그의 선조 가운데 안등지(顔騰之)·안지추(顔之推)·안사고(顔師古)·안근례(安勤禮) 등이 모두 고문자학(古文字學)을 연구했고 서예에도 뛰어났었다. 인척관계에 있던 은영명(殷令名)·은중용(殷仲容) 부자도 또한 당대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였다.

안진경은 "집안이 가난하여 종이와 붓이 없었으므로 담벽에다 황토로 연습하여 서예를 익혔으며, 해서(楷書)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벼슬길에 나간 후에는 장욱(張旭)에게 배워 서예에 더욱 진전이 있었다. 그후 남북을 두루 다니며 관리생활을 하면서 유명한 석각(石刻)을 많이 보았다. 예컨대 한대(漢代)의 여러 비(碑), 타이산 산[泰山]에 있는 북제(北齊) 때의 〈금강경 金剛經〉, 남량(南梁) 때의 〈예학명 ?鶴銘〉 등을 두루 보면서 시야가 넓어져 필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안진경은 해서·행서(行書)·초서(草書)에 모두 능했다. 그의 해서는 장엄하고도 웅장하며 기세가 툭 트여서 마치 단정한 선비를 보는 것 같다.

평론가들은 〈중흥송마애 中興頌磨崖〉·〈원차산비 元次山碑〉·〈송광평비 宋廣平碑〉·〈안씨가묘비 顔氏家廟碑〉 등과 같은 만년의 작품을 높이 친다. 〈제질문고 祭侄文稿〉의 필적, 〈제백부고 祭佰父稿〉·〈쟁좌위 爭座位〉·〈채명원 蔡明遠〉·〈송류태충서 送劉太沖敍〉 등의 첩(帖)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면서도 급작스럽게 꺾이는 등 변화무쌍하며 전서체(篆書體)와 주문(?文)을 겸비했다. 또한 스스로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어 한 획도 2왕(二王:王羲之·王獻之 부자)의 필체와 비슷한 것이 없었다. 소동파(蘇東坡)는 안진경의 서예와 두보(杜甫)의 시, 그리고 오도현(吳道玄)의 그림을 최고의 모범이 된다고 평했다. 안진경의 서예는 후대의 유공권(柳公權)·양응식(楊凝式)·소식·황정견(黃庭堅)·미불(米?)·채경(蔡京)·조병문(趙秉文)·동기창(董其昌)·왕탁(王鐸)·유용(劉墉)·전풍(錢?)·하소기(何紹基) 등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안진 경의 가문에서 만들어놓은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대부터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과거시험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다. 명(明)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 이르러서는 간행된 서책의 글자체가 모두 안진경체로 되었는데, 이른바 '노송체자'(老宋體字)로서 수백 년 동안 성행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33회에 걸쳐 <한자의 발생과 형성>이라는 제목으로  서예술의 근본이 되는 한자가 언제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으며,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예 5체가 형성되게 되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앞으로 이 자료들을 보완하여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으로 준비를 해 나갈 계획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아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때마침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이라 일찌감치 투표를 끝내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 자료까지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홀가분 합니다.>

 

저작권 ; 무릉도원  // 도원 / 김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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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i무릉도원/imrd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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