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碧初 洪命憙,임꺽정

강나루터 2020. 1. 25. 07:08



                 


임꺽정, 홍명희 그리고 만동묘 산책

 

꺾기도 잘 하고 구르기도 잘 하우.’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가 지은 <임꺽정> ‘의형제편의 1장 박유복 편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박유복이 임꺽정의 집 마루에 앉아 턱을 괴고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감탄한 말입니다. 지금 책을 찾아 확인은 할 수는 없지만 정확할 겁니다. 우리말 구사가 멋지면 이보다 멋질 수 있을까요? 아름답고 정교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一葉落地 天下秋(일엽낙지 천하추, 노자 도덕경), ‘낙엽 하나 떨어지니 아, 가을인가요라 듯이 1011일 금요일 맑고 청명한 가을 날씨의 축복을 한껏 받으면서 글방 친구들과 같이 괴산지역에 나들이를 했습니다. 괴산 출신 건대 신복룡 교수와 괴산 군청에서 나온 직원들이 안내와 해설을 맡아 홍명희의 생가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묘소도 보고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화양서원((華陽書院) 터로 가는 길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도 둘러보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관련된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임꺽정> 밖에 없다.’고 입버릇같이 뇌이셨지요. 홍명희는 <임꺽정>192811월부터 19393월까지 조선일보에 쉬엄쉬엄 연재했다고 합니다. 옛날 한국일보에서 황석영이 <장길산>을 쓰다가 쉬었다가를 수년간 반복한 것과 비슷하군요. 명작이라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요. 홍명희는 그냥 화적임꺽정을 그렸고 황석영은 의식화 된 의적장길산을 그렸지요. <임꺽정>은 조선일보 폐간 후 194010<조광>에 실렸고, 해방 후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마 을유문화사 판을 읽은 게 아닌가 합니다.

우리세대에게는 월북 작가홍명희의 <임꺽정>은 금서였지요. 제가 처음 읽은 <임꺽정>은 최인욱이 쓴 것인데 1962년에서 1965년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었습니다. 서울대 도서관 입구에 있는 신문 전시대에서 1964년 입학 후 우연히 본 것입니다. 이후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하고,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같이 보였을 겁니다. 최인욱은 홍명희의 <임꺽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살짝 바꾸고 의형제들이 활동한 지역도 황해도나 경기에서 충청도까지 한참 남쪽으로 내려가고 새로운 이야기도 몇 개 붙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소설을 처음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종로5가 고서점을 뒤지다가 10권으로 된 <임꺽정>을 발견했습니다. 하숙비 주고 남는 돈을 털어 전질을 사서 하숙집에 와서 보니 이건 완전히 임꺽정과 그의 일당들이 오입질하는 에로소설이더군요.

한국일보에 입사한 뒤 <임꺽정> 맛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서울문리대 독문과 출신인 주우춘 선배와 외신부에 근무할 때인데 자기 집에 홍명희의 <임꺽정>이 있다는 겁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삼성교 부근 주우춘 선배의 신혼집에서 저녁 잘 먹고 <임꺽정> 3권 정도를 가지고 왔지요. 낱장이 찢어져 너덜 너들하고 낙장도 많았지만 오래 동안 찾던 홍명희의 원본이라 조심스럽게 읽고 돌려주었습니다. 이야기 연결도 잘 안되고 어느 편을 읽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합니다.

<임꺽정>과의 세 번째 만남은 런던대학 동양아프리카 대학(SOAS)’ 도서관입니다. 유럽에서 동양학관계 서적이 제일 많다는 이 도서관에는 북한책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북한판 <임꺽정>도 그 중 하나였지요. 마치 보물섬을 발견한 기분이더군요. 읽고 또 읽고.... 아마도 중학교 때 <삼국지> 이후 가장 열심히 여러 번 읽은 소설일 겁니다. 이기영의 <두만강>도 있었는데 조금 보니 계급투쟁 등 이데올로기 색채가 강해 그만 두었지요.

북한에서 나온 <임꺽정>6권입니다. 한국에서는 초기 3(봉단편, 피장편, 양반편)과 의형제편 3, 그리고 화적편 3권으로 총 9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북한판에는 첫 3권이 없습니다. 아마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귀양 간 임꺽정 앞 세대 양반의 이야기와 양반-쌍놈 간의 결합이나 갖바치 스님의 이야기들이 양반사회와 불교 등 종교를 혐오하는 북한의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홍명희가 구상만 했다는 임꺽정의 최후를 다룬 부분도 없습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홍명희가 북한에서 한가하게 마지막 부분을 끝낼 여유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6권만으로도 그동안 <임꺽정>에 대한 나의 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후 1980년대 말 자유화의 분위기에서 홍명희라는 이름 대신 벽초 <임꺽정>’이란 책이 나오고 또 조금 지나 임꺽정의 최후를 다룬 10권이 얇은 책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후기로 삼아야겠지요.

홍명희와의 만남은 이후 한 번 더 이어집니다. 1992년 미국 워싱턴DC 국립문서기록 보관소(NARA)에서 연구 중 우연히 홍명희를 보았습니다. 그 당시 NARA 문서는 국회 의사당과 백악관을 잇는 Pennsylvania Avenue에 주로 있고 Suitland 역 부근에는 현대사 관련 문서들이 있었지요. Suitland에서 한국전쟁관련 문서들을 읽던 중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수집한 북한문서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박스에 담겨있는 걸 보았습니다. 미군은 적국 수도를 점령하면 일단 국가문서부터 몽땅 챙깁니다. 뒤섞여 있는 책들을 무심코 넘기는데 홍명희 수필집이 나오더군요. 표지를 넘겨보니 친필로 김일 부수상에게 증정한다고 쓰여 있는데 자기는 모스크바에 있다면서 간단히 안부를 묻는 엽서도 끼여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양반이 전쟁 중 모스크바에 있었나, 아니면 전쟁 전에 북한으로 돌아왔나? 날짜를 체크해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자세한 건 위키에 잘 나와 있군요.)

<임꺽정>에 대한 이같은 편력(Wanderung)이 괴테의 <빌헤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의 주요한 추억이자 지적자산 중 일부라 할 수 있으니 이번 여행이 어찌 즐겁지 않았겠습니까? 사족으로 붙인다면 홍명희 아버지 홍범식(洪範植, 1871.9.7-1910.8.29)은 경술국치에 순국한 인물입니다. 그의 사망날짜를 여기 올린 것은 이를 확인하라는 의미입니다. 신복룡 교수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일진회 활동을 했다고 하더군요. 경술국치를 맞아 순국한 분들은 예상 외로 많지 않습니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黃玹)이 있고, 또 나의 고향 고성출신 서비 최우순(西扉 崔宇淳)이 있습니다. 일제가 최우순에게 은사금을 주어도 받지 않으려하자 경찰이 체포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는데 그날 저녁 음독자살합니다.

 

우리는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는 개천을 따라 화양서원 터로 향했습니다. 송시열의 화양서원은 터만 남았는데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나는 우리 역사에서 정신사적으로 가장 치욕적인 장소로 꼽는 만동묘의 그 잘난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 역시 고등학교 때 읽은 김동인(金東仁)의 소설 <운현궁의 봄><젊은 그들>의 인상이 강력히 남았기 때문일 겁니다. 만동묘는 송시열이 1689년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제자 권상하에게 편지로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우고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의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와 마지막 황제인 의종 숭정제(毅宗 崇禎帝)의 제사를 지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둘은 명나라 역대 황제 중 가장 못난이들이죠. 명나라는 만력제 시대부터 기울기 시작하고 숭정제는 청의 입관(入關) 즉 산해관을 넘어 오는 걸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짓을 하여 나라를 망치고 이자성 농민군이 북경으로 들어오자 자금성 뒷동산 나무에 목을 메에 자살하는 망국의 군주입니다.

이 글에서 송시열의 일생이나 예법논쟁을 재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타국의 못난이 군주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고 유언으로 남긴단 말입니까? 물론 과거 인물의 행위는 그 시대의 잣대로 평가해야 하는 당위도 있습니다. 송시열은 유서에 청의 새 연호나 숙종 15(1689)이라 표기하지 않고 40년 전에 이미 멸망한 명의 연호를 사용하여 숭정 기사년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기야 조선 선비 중에는 명이 망한지 100, 200년이 지나도 숭정연호를 사용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만. 만동묘를 지은 그의 제자들은 한 술 더 뜹니다. 중국의 못난이 황제 둘을 배향한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의 폭을 엄청 좁게 하여 정상적인 걸음으로 앞을 보고 바로 올라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앞을 보고 올라가다가는 발의 길이가 계단의 폭 보다 길어 뒤로 넘어져 뇌진탕 일으키기 십상일 겁니다. 중국의 못난 황제를 보기 위해서는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황송한 듯이게걸음으로 옆으로 비스듬히 오르거나 기어서 올라가라는 말입니다.

만동묘는 조정에서 특혜를 받아 그 기세가 하늘을 찔러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1980년대 우리 사회에는 ‘xx 대학 위에 yy 사관학교가 있고 그 위에 zz 여사가 있다는 냉소적인 우스개가 있었지요. 아마도 그 근원을 따라가면 바로 만동묘가 아닐까 합니다.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가 있다는 말이 나오네요. 대원군이 파락호 시절 이 만동묘를 구경하려다가 문지기에게 얻어맞고 쫓겨났다는 대목이 야사에 전해 오고 아마도김동인의 소설에도 나올 겁니다. 이 때 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결심했다는 데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나는 만동묘 계단을 옆걸음으로 조심조심 오르면서 이 빌어먹을 xx’ 등 욕을 퍼부었습니다. 다른 건 불이 나면 다시 지으면서 이 계단은 돌이라고 그대로 두었단 말인가?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을 자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긴 것이라면 이해는 됩니다. 서울로 돌아오니 7시가 넘고 일부는 양재에서 뒤풀이를 하고 헤어졌습니다.(2019.10.14)

사진: 만동묘를 비실거리며 올라가는데 문창재형이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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