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초 홍명희 생가(일완 홍범식 고택) 지정번호: 충북민속자료 제14호 지정연도: 2002년 12월 20일 소재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번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가옥으로, 벽초 홍명희의 생가이다. 2002년 12월 20일 충청북도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1730년(영조 6)경 또는 1861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반가옥으로,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지녀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항일지사의 고가(古家)이자 3·1운동과 관련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고가는 좌우대칭의 평면구조를 갖는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안채는 정면 5칸·측면 6칸 규모로 전체적으로 ‘ㄷ’자형이며, ‘一’자형 광채를 한 단 낮게 맞물리게 하여 광채의 지붕이 안채의 아래로 이어져 있다. 평면상으로는 몸채에 전퇴를 달고 나머지는 맞배집으로 만들었는데 광채를 포함한 형태는 ‘ㅁ’자형이다. 안채 좌측에 배치된 사랑채는 2고주 5량가 구조로, 장여를 받친 납도리집이며 지붕은 합각으로 처리되었다. 전체적으로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조화를 이루게 하면서 오밀조밀한 내부공간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고가는 역사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1888∼1968)의 생가이자, 금산군수로 재직하다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자결한 항일지사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이 살던 가옥으로, 홍범식은 홍명희의 부친이다. 홍명희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이 가옥의 사랑채에서 주민들과 함께 괴산지방의 만세시위를 모의했다고 한다. ***<참고자료>벽초 홍명희와 괴산에 대하여***
벽초 홍명희(1888~1968)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행정 구역으로는 괴산읍 동부리 450번지다. 그의 가계도를 보면 명문가의 집안임을 알게 된다. 홍명희 가문은 풍산 홍씨 추만공파며 노론계열이다. 그의 증조부 홍우길은 이조판서로서 서화에도 뛰어나 ‘휘경원지’등의 작품을 남겼다. 조부 홍승목(洪承穆 1847~1925)은 대사성 및 참판을 지낸 인물이다. 부친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홍명희가 태어나던 해에 성균관 과시에 급제한 후, 1907년에 태인군수에 임명되었다가 1909년 금산군수가로 근무한다.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해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는 을사조약 이후 입버릇처럼 “민충정공은 좋은 일을 이루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백성들의 수탈을 일체 하지 않은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 자결 전 그는 집무실 벽에 국파국망 불사하위(國破國亡 不死何爲) “나라가 파멸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는 유서를 쓴 후 뒤 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유고로 일완시고(一阮詩稿)라는 문집을 남겼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 되었다. 한편 홍명희의 생모 은진 송씨(1871~1890)는 그가 세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다. 홍명희가 쓴 자서전에 보면, 여덟 살 되던 해에 소학을 배우면서 어머니의 그리운 정을 쓴 한시(漢詩)가 가슴을 적신다. ‘창승년년생 오모하불귀(蒼蠅年年生 吾母何不歸)’ “쉬파리는 해마다 생겨나건만, 나의 어머니는 어이하여 돌아올 줄 모르나”라고 쓰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소학 및 시를 짓고, 삼국지를 읽던 벽초는 1901년 서울의 중교의숙 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게 된다. 홍명희가 중교의숙을 다니며 신학문을 익히던 시기는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어 만민 공동회 운동을 주도한 시기와 갑오개혁 이후 1895년 반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근대적 학교의 설립 시기이다. 그는 열세 살 되던 1900년 참판 민영만(1863~1904)의 딸과 결혼한다. 18세 때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중교의숙을 졸업하고 괴산으로 귀향하여 중국의 경전들을 탐독하였다. 우연히 괴산에 양잠기술을 전수하러 왔던 일본인 부부를 따라 동경유학을 떠난다. 대한해협을 건너 오사카(大阪)를 거쳐 토쿄에 도착한다. 당시 일본은 청나라 및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거듭 승리하여 조선을 완전하게 손에 넣기 위한 순서만 기다리던 때였다. 일본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천황제 국가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며 안전을 찾을 때여서 문화나 사상 면에서도 개인주의적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벽초는 동양상업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한 뒤, 1907년 다시 대성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09년까지 공부하였다. 학교 공부를 게을리 하였지만 성적은 좋았으며 독서광이었다. 특히 문학서적을 탐독하였고 우연히 고서점에 들러 책을 구매하기 시작한 후 밤을 세워 독서하였다. 그의 독서는 처음에는 톨스토이 작품에 관심을 갖다가, 나중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백치’ 등에 매료되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애찬자가 된다. 그는 또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의 작품들을 애독하였다. 바이런의 작품 ‘카인’에서 따와 자신의 호를 가인(假人)이라 하였으나, 성경의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성경에서의 사실을 인식 한 후 괴산의 나무꾼(碧樵)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 백옥석(白玉石)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1920년 이후부터 벽초(碧初)라는 호를 사용했다. 대한제국의 현실이 풍전등하 상태에 있던 1910년 2월 홍명희는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 괴산으로 귀향하여 고향의 인근을 다니며 러시아 유학공부에 열중한다. 당시 부친 홍범식은 충남 금산의 군수로 재임중이었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일에 자결한다. 홍범식의 장례는 금산 군민들의 애도 속에 성대히 치러졌다. 발인 날에는 온 고을 사람들이 분향하고 통곡하였다. 장례 행렬이 괴산의 제월리 선수골 선영으로 향할 때 300리가 넘는 곳을 100여명이 따라 왔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경술국치 때 제일 먼저 순국한 홍범식의 자결 소식이 나라 안에 알려지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면서 정부 고관으로부터, 유생, 평민 등에 이르기까지 잇달아 순국하는 이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자결과 유서의 내용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의 유언의 충격은 벽초를 괴산 땅에 인물로 묶어 두지 않았다. 3년 상을 치르고 독립운동을 위해서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1913년 출국하여 1918년 귀국하기까지 그는 중국의 여러 곳을 방랑하며 민족의 독립을 모색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32세 되던 해인 1919년 3월 충북에서는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하였다.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고 3월15일 괴산으로 내려온 홍명희는 3월19일 쯤 시위를 벌였다. 소백산 줄기에 폭 쌓여 있던 괴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첩첩산중이었던 장연면에까지 일어나는 폭발력을 과시했다. 장연면의 만세시위는 산골의 면 단위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세로 일어난 것으로 보아 3,1운동 당시 괴산의 만세운동의 규모와 격화된 반일 감정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괴산은 비록 산골 마을이었으나 홍범식의 죽음으로 인한 영향으로 반일 감정이 다른 지역보다 강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괴산 출신인 천도교지도자 권동진이 참여하여 양반 및 유생들이 고종의 장례식 날 다수가 참석하였다. 한편 홍명희는 중국에서 귀국한 후 고향 괴산에서 3,1만세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1년6개월 구속되었다. 출옥 후 홍명희는 정인보와 함께 대둔산및 내장산 일대를 여행하였다. 이 무렵 최남선과 정인보들과 어울리면서 조선광문회의 출입을 자주하면서 최남선이 창간한 ‘동명’지에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후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도 몰락되어 갔다. 선산이 있던 괴산군 괴산면 제월리 주변 대부분의 땅이 그들 소유였다고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셋집을 전전하였다. 괴산의 대지주가 갑자기 서울에 올라와 셋집을 살았기 때문에,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하였다는 설이 있다. 출옥 후 홍명희는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근무하면서 사회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초에 그는 일시 휘문고보와 경신고보 교사를 지냈으며, 그 후 중앙 불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출강하기도 했다. 시대일보사장이 되었다가 폐간 된 후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오산학교는 3,1운동 당시 남강 이승훈이 1908년 설립한 민족교육의 명문으로 많은 독립의 인재들을 양성한 학교였다. 신간회 창립의 핵심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벽초는 1927년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임꺽정’을 연재함으로 작가의 길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신간회 사건으로 옥중에서 집필했던 ‘임꺽정’은 당시 우리민족의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읽게 되는 소설이 된다.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인해 검거되었다가 1932년 1월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58세 되던 8월15일 해방의 감격 속에서 시 ‘눈물 섞인 노래’를 짓는다. 괴산군의 치안 유지회 회장에 추대되고 조선문학가 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 부회장으로서 환영대회에서 환영사를 한다. 1947년 장남 홍기문의 ‘조선문법연구’에 서문을 쓰고 이듬해 ‘임꺽정’6권이 간행된다. 홍기문이 부친의 영향을 받아 조선어 연구에 착수하게 된 계기는 홍명희가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되는 시점이다. 부친의 원고를 읽던 중 우연히 알퐁스도데의 ‘마지막수업’을 번역해 놓은 원고를 발견하고 큰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1948년(6.5~7.5)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에 참가하며 부수상으로 임명되었고, 서울에 있던 가족들이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하였다. 임꺽정은 1928년 11월2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하여 1939년 7월4일 연재를 중단한 미완의 작품이다. 조선중기의 봉건적 모순속에서 노비, 평민등 각 계층의 삶과 갈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면서, 천민백정의 아들 임꺽정을 통하여 민중들의 애환과 분노를 살아있게 서술한 임꺽정은 그 자신이 이렇게 어록에 쓰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시작할 때에 ‘임꺽정’만은 사건, 인물, 묘사,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이극로 선생은‘ 임꺽정은 깨끗한 조선말 어휘의 노다지가 쏟아지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월탄 박종화 선생도 임꺽정에 관해 언급했다. ‘임꺽정에는 조선 사람이라면 잊어버릴 수 없는 구수한 조선냄새가 배어 있다’고 하였듯이, 조선 하층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민족공동체의 아름다운 전통을 적극 재현함으로써 민족 문학적 색채가 농후한 역사소설이 되었다. 임꺽정은 명종조(明宗朝)에 당대 사회의 국기를 흔들 만큼 큰 사건이었던 “임꺽정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 한 소설이다. 연산군의 갑자사화로부터 명종 때까지 50년간의 시대상황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연산군때의 흥문관교리 이장곤의 신분하락과 복권의 과정을 다룬 (봉단편), 중종조에서 명종조까지의 사화(士禍)로 얼룩진 시대상과 사대부 계층의 생활상을 다룬 (피장편) (양반편)이다. 임꺽정을 비롯한 청석골 두령들이 청석골로 입산하는 과정을 다룬 (의형제편), 청석골패의 활동상황과 관군의 토포(討捕) 및 그에 따른 몰락의 과정을 묘사한 (화적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는 사실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과 구별된다. 그러나 역사소설의 경우는 상황이 달라진다. 역사소설은 사실을 중시하는 역사와 허구를 근본성질로 하는 문학이 서로 결합되는 독특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침략전쟁기로 들어서면서 우리의 언어와 문자, 이름과 성까지도 말살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소설은 이 때부터 쓰여 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명희는 러시아 소설가들인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과 같은 작가의 글들을 탐독하였으며, 일본의 자연주의 작가들의 소설로 읽곤 하였다. 또한 소년시절부터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 소설류를 탐독하였다, 역사서적 뿐 아니라 다독을 통한 역사인식의 바탕 하에서 임꺽정이 쓰여 진 것이다. 장면중심의 객관적 묘사에 치중하고 극도로 치밀한 세부묘사를 통하여 이 땅의 진정한 민족문학의 시작을 알리게 하였다. 그는 또 학자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니, 1922년부터 삼년간 ‘유교경전언택총’에 관여하여 조병건, 이승욱, 정봉시, 정만조, 심상순, 윤희구, 어윤적, 이해조, 여규정등과 분담하여 사서삼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유교전강연구에서 출간하였다. 거기에 기재한 이름은 홍 희(洪 憙)로 가운데 명(命) 자를 생략하고 있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으로 조선사 편찬위원으로 있으면서, 조선학술사를 집필하였다. 민족의 분단만 없었다면 이 땅에 벽초 홍명희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감히 필자는 단언한다. 그는 괴산이 낳은 민족의 큰 느티나무이며, 자신의 아버지 유언을 끝까지 지켜 행방 전까지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지식인 중의 한 명이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끝내 일제에 타협하는 길을 가서는 치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면, 그는 해방의 기쁨을 ‘눈물섞인 노래’를 지어 읊조리면서, 1910년 한일합방 때 자결하신 부친 홍범식을 그리워했다. ‘국민의무 다하라고 분부하신 님’의 말씀이란 부친 홍범식의 유언이며 자신의 다짐이기도 하였기에, 이 시를 쓰며 떳떳하게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홍명희가 유명작가로서 평온한 삶을 마다하고 결행한 모든 일들을 이 순수한 시 한편으로 녹이고 받아들이고 싶다. 고향 괴산을 그리워하며 북한에서 1968년 3월5일 생을 마감한 벽초의 80평생의 삶을 내 어찌 감당하겠는가. 괴산은 필자의 고향이기도 하여 유년시절부터 홍명희 선생에 관한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땅의 이념의 모순속에서 그의 삶에 관한 진실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얼마 전 필자는 그의 생가복원을 하고 있는 공사판을 거닐었다. 벽초 홍명희를 괴산에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가슴이 아렸다. ‘홍범식 고택’으로 불리어 지게 될 이 집의 이름은 앞으로 벽초 홍명희 생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괴산읍내에 있는 음성방향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면 바로 생가이다. 그런데 벽초 홍명희 선생 생가라는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의 이름은 벽초 홍명희 아버지 홍범식 선생의 고택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이 집 앞에 일완 홍범식 선생 고택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읍내 다리를 건너면 산 밑에 큰 터를 잡고 있는 고래 등 같은 검은 기와집이 보인다. 약 1,500평정도 되는데, 서남향으로 지어진 생가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一’자형의 광채를 합한 안채는 ‘ㅁ’자형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괴산군민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사랑채는 좌측에 위치해 있다. 생가 앞으로는 큰 시내가 흐르고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지어진 괴산의 대표적인 명문가의 집이다. 이 집의 특징은 좌우대칭의 평면구조를 갖는 중부지방 살림집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최근에 복원하였다. 1730년(옹정 8년)경에 건축되었던 고가다.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집은 괴산 3·1운동과 관련된 유적이며, 홍범식 선생의 항일지사의 의미와 벽초 홍명희의 문학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집이다. 이 땅이 통일되면 양쪽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분이 ‘홍명희’다. ‘임꺽정’이란 소설은 그만큼 위대한 민족의 유산이 될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선산 아래 이제는 번듯한 정원을 가진 사랑채 제월리에서 홍범식선생이 묻혀 있는 벽초의 선산을 오른다. 그의 증조부 홍우길 묘소가 지척에 보이고, 언덕길을 더 오르면 조부 홍승목의 묘소다. 한 때 홍명희 선생을 재조명하려는 행사와 기념비 제막식 후 기념비의 비문삭제 문제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직 괴산 사람들에게는 지난 시절의 이념의 장벽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듯 그의 생가에는 이정표조차 표시할 수 없다. 60년의 분단 상황과 이념논쟁이 부끄럽다. 이런 안타까운 심정으로 필자는 ‘괴산에서’라는 졸시를 써서 시집의 제목으로 하기도 했다. 역말다리 건너 인산리 고가엔 산수골에 묻힌 사람의 유언이 두 눈 뜨고 살아 있다.
그 분의 마지막 언어를 기억하는 경찰서앞 늙은 느티나무는 가을이 되면 유서같은 잎새 옛 장터에 재처럼 흩뿌려주었다. 노인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멀리에서 온 젊은이들은 무너지는 흙담 앞에 모여 부활의 노래를 불렀다 세월은 강을 따라 흘러 고가 앞 에돌아 수십 년 느리게 걸어 왔지만 괴산 지키는 느티나무 아래 서면 기미년 만세소리 들려 온다 ---김경식 시 ‘ 괴산에서’ 전문 괴산에 가면 벽초 선생이 뛰어 놀던 괴강 언저리와 만세운동시위를 하던 장터거리, 연설하였던 곳 이곳저곳을 서성거리기도 한다. 그 분이 낚시를 하며 명상을 하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제월대를 찾기도 한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괴산군의 용기였다. 그의 생가가 폐허화되어 다른 용도의 건물이 건립되는 것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방자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괴산에서는 홍명희 생가 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 다만 홍범식 고택 복원공사라는 이름으로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북한의 김일성 밑에서 부수상을 한 것을 이 지역의 정서가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 이유다. '벽초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마을 괴산과 그의 선영을 한번 와 보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홍명희의 생애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원칙은 자신이 홍범식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그의 생에는 그 어떤 경우도 일제에 타협하거나 굴복할 수 없도록 결정된 삶이었다. 해방공간(1945~1948)에서 친일한 부역세력이 제거되기는 커녕 미군정과 이승만의 정치세력 속에서 그들이 점차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는 정황을 보며, 홍명희는 고향을 등지고 평양을 선택하였다, 반민족자 특별법의 유명무실이 가져온 실망감으로 인하여 오히려 독립운동가 및 애국지사들이 능멸 받는 상황에서 서울은 더 이상 벽초가 살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공산주의 사상이란 적어도 일제 해방기까지는 민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워 온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는 식민치하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배격할 수도 있는 사상 중의 하나였다. 일제의 식민치하에서 한용운이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식민지 시기의 최고의 민족시인으로 인정하듯이, 벽초 역시 민족해방을 이끈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한국근대소설사의 최고 작가로 평가되었으면 한다. 한 그루 나무도 그 골짜기의 물과 바람을 자신의 몸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벽초는 괴산이 심은 큰 나무이지만 우리 민족의 나무가 되어야 한다. 다가올 미래에 통일이 되면 벽초의 묘소가 다시 그의 부모님 산소로 돌아와 괴산이 명실상부한 문학의 고향이 되길 기원한다. 오늘도 그의 부친 홍범식의 묘소는 제월리 고택을 내려 다 보면서 앉아있다. 북한에 있는 그의 후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증손자인 홍석중은 북한의 유명한 소설가다.그는 최근에 ‘황진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의 가계도는 조선후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민족이란 족보의 한 단면도다. 벽초 홍명희의 삶과 문학 속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혼이 담겨 있다. <글, 사진/ 김경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