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고향 『 written by 박남희』 | 2007-03-27 | |
1. 포은 정몽주선생의 생애(生涯) 포은선생의 휘(諱)는 몽주(夢周)요 자(字)는 달가(達可)이고 포은(圃隱 )은 호(號)이다. 본관은 영일정씨로 시조는 고려(의종) 추밀원지주사(정삼품)를 역임한 휘(諱)는 습명(襲明) 호(號)는 동하(東河)이며 시호(諡號)는 형양공(滎陽公)으로 포은선생 10대 주손이다. 아버지는 운관(云瓘) 어머니는 영천이씨(永川李氏)사이 장남으로 탄생 하였다. * 1337년 (고려 충숙왕6년) 문충 리에 탄생하시고 구정 리에도 사시다 8~9세전후 로 하여 모친의 친정(외가) 영천으로 옮겨 가 살았다고 전한다. 함부림(1360~1410),조선초 문신 학자 “포은선생의 제자” 함부림이란 학자가 전하기를 “정몽주는 경주부(慶洲府) 영일현(迎日縣) 사람인데 영천(永川)에 옮겨 살았다” 라고 전하고 있다. * 1392년 4월 기울어가는 고려를 지키려다 선죽교에서 태종(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추살 당하였다. * 1401년 태종(이방원)은 상소문에 의해 포은선생에게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내려지며 지은 시(詩)... 충의는 본래 없어 질수 없는 것 평소부터 닦아온 사람 그 또한 없었던가 모진 바람에 견디는 풀 더욱 보기 어렵더니 이제야 고려의 한 충신을 내 알겠구나. 또 하나의 시를 읊는데.. 고려가 쇠망함에 이조(李朝)문득 일어나니 현명한 인사들 떼지어 붙었구나 조용히 죽음을 택한 오천(烏川)의 선비 조선의 땅에 절의(節義)의 길 열어 주었네. * 1430년 (세종)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여 사거리(士居里) 삭거리(索居里) 태사(太師)란 벼슬을 한 선비가 나왔다고 하여 음은 같지만 사거리(師居里)로 마을 지명 을 써 오다 포은선생의 숭고한 뜻을 널리 후손에게 전 하 고 져 마을 지명을 문충(文忠) 이라 정하고 지금에 이르고 마을의 동가(洞歌)가 지금도 전하고 있다. 문충동가(文忠洞歌) 자고로 유명한 우리 문충 정 포은 나신 곳이 이 곳 이로다 산수는 화려하고 인심 좋으나 아이들 교육없아 유감이로다. 2. 포은(圃隱)선생의 고향 지금에 와서 포은 선생의 고향 오천(문충)이란 700년 전의 자료는 찾을 길 없고 전해지 는 시(時)구절로 고향을 알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 안타까울 나름이다. ⊙ 1377년 일본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詩) 꿈꾸는 것 계림(鷄林)의 우리 옛 집 뿐인데 해마다 무슨 일로 돌아가지 못 하는고 반평생 허무한 공명에 묶여 만리(萬里)밖 풍속 다른 나라에 와있네 바다는 가까워서 먹을 고기 제공 하나 하늘이 멀어 소식 전할 길 없구나 배타고 돌아 갈 때 매화를 얻어 가서 양지 바른 남쪽에 심어 자라는 모양 보리라. ⊙ 1380년대로 추정(추석전야의 고향 산야(山野)의 풍경) 이슬 차니 벌써 추석(秋 夕)계절인가 구름이 날아가니 고향(故鄕)이 그립구나 고기 살지고 벼 다 익어 가고 우거진 나무 숲엔 새들이 자고 있겠지 ⊙ 제성역(諸城驛) 오늘밤 제성역(諸城驛)에 머무르면서 조용히 고향을 생각 하노라 고향(故鄕)을 떠나 멀리 타향에서 살다가 이제 봄이 다 지난 뒤에 와서 홀로 누워 있노라니 밖에는 비가 내리 네 영천(永川)앞들에는 벼농사 풍년들고 오천(烏川)은 바닷가라 물고기가 잡히는데 내가 이 두가지를 다 가지고서도 어찌하여 이 좋은 고향(故鄕)에 돌아오지 못하는고. (1386년경 명나라 사신가서 지은 시(詩)) ⊙ 정몽주 시 선정편에 수록 한낯에 고현성(古縣城)을 지나서 오니 푸른 그늘 짙은 곳 바람 시원 해 정중히 벽을 털고 싯귀(詩句)적으니 꾀꼬리 고은 소리 먼저 들리네. (고현성(古縣城)은 지금의 원리에 소재한 신라시대 토성) ⊙ 점필제 김종직(佔畢齊 金宗直(1431~1492)) 북에 가선 고죽국(孤竹國)의 떳떳함 을 이제 남에 와서는 정공(鄭公)의 고향 보네 이 몸 남북을 돌아 본 것 다 행 이로다 천고의 길이 빛날 충혼 우러렀소. (포은선생이 사시던 개성과 오천을 방문하고 지은 시) ⊙ 모제 김안국(慕齊 金安國 1478~1543) 우리나라 도학은 여기서 비롯되었고 절의와 문장 논할 것도 없으나 사시던 집 황량하여 물을 곳 없으나 저녁 바람 기운 해는 넋을 녹일 듯 하여라. (1517년 경상도 관찰사 재임시 영일 오천(烏川)을 방문하여 지은 시) ⊙ 운예 정하원(雲裔 鄭夏源 1762~1833) 문충동(文忠洞)방문 하여 지은 시 바다도 운제산도 푸른 빛 변함 없는데 우리 동방 대현 사시던 옛 마을 어가서 찾으리요 나무꾼 꼴 먹이들 여기가 제사 지내는 곳 이라 손으로 일러 주네 아 야초와 골짜기에 피어나는 들 꽃 만이 향기를 띠고 반겨 주네 구정동(舊政洞) 방문 하여 지은 시 옛 지난 자취 찾아 왔더니 오랜 세월이 흐르고 흘러 창망한데 三 尺의 작은 비석(碑石)말 없이 적막 하네 봄철이라 아지랑이 옛 날에도 이랬으련만 한번 가신 선생 오시지 않는데 세월은 흘러도 마을은 변함없는 그 옛 마을이로 구나. (1810년경 정하원이란 학자가 오천과 구정을 방문하고 지은 시) ☉ 문충리 8景 一. 三峰山絶壁(삼봉산 절벽) 二. 栢山朝旭(백산 조욱) 三. 聖尼磨石(성니 마석) 四. 藥水淸泉(약수 청천) 五. 間坪農笛(간평 농적) 六. 鷹峯秋月(응봉 추월) 七. 竹崖春化(죽애 춘화) 八. 仙店歸僧(선점 귀승) (연대는 알수 없으나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지명이 지금에도 전한다) 3. 기타 자료 ◎ 추밀원 지주사(시조 정습명 선생) 선생께서 영일(迎日)에 사셔서 자손이 계승 하였으며 ,중간에 영천으로 옮기시어 十 一世에 이르러 포은 선생께서 또한 여기에 늘 왕래하셨다고 하나 다만 오늘에 와서 그 옛집 사시던 자리가 영천의 어디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영일 정씨 세보) ◎ 수창록(酬唱錄) 오천의 별과 달은 아직도 뚜렷한데 판옥의 쓸쓸한 매화 어두운 연기만 끼었네 붉은 깃대 일찍이 경악의 굴에 머물러서 맑은 바람 오히려 견양의 땅을 씻어라 송악산 구름아래 사람은 돌아가고 서왕묘 앞 푸른 풀에 봄만이 만아 있네 백번 죽어도 일편단심 사라지지 않아서 선죽교의 원혈은 천년 후에도 푸르더라. ◎ 오겸(吳謙)의시(詩) 우리나라 유학은 여기가 근원인데 절의와 문장이야 말할 것도 없소 사시던 집 허물어져 물을 곳 없어 늦은 밤 저문 날에 혼백조차 시들라. ◎ 오천 서원지(烏川書院誌) 포은선생 연보 -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년) 生于迎日文忠誕生中居永川 ◎ 신동국 여지승람제25권(경상도 의성현) 정몽주의 시에 봄의 시름은 술같이 진하고 세상의 맛은 점점 깁 처럼 얇다 애끓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서울로 간다.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오천선생의 훌륭한 작품은 점과 획이 바르고 도덕은 성역에서 자유로이 놀고 문장은 시가에 홀로 뛰어 났네 ◎ 고봉선생 문집 제2권 천사(天使)허국(許國). 위시량(魏時亮)의 문목에 대해 조목조목 답하는데 정몽주는 영일현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됨이 지혜와 용기가 뛰어 났고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습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 하여 성리학을 정밀히 연구하여 매우 깊은 소득이 있었습니다. ◎ 목은 불굴(牧隱不屈)(성호사설 제21권 경사문) 정부의 공격, 대신의 탄핵 바로 오늘에 이르렀고 오천(烏川)화액이 인심을 놀라게 한다 이리저리 오가는 게 뭐 해롭겠느냐 깊이 애호해 주던 송헌에게 감사 한다. (목은은 정 포은이 살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 오천(烏川)정상국 몽주(夢周)의 시에 차 운 하여 의주 의순관(義順官 )판상(板上)에 제 하다. 먼 산은 아득아득 요양이 가로막혀 멀거나 가깝거나 제의 덕화 우러르네 풍경은 바다 닿아 누대가 아스랗고 수풀은 하늘 연해 들이 많이 묵었구나 백년이라 지난일은 슬픔이 많고말고 한 가닥 강물은 넘실넘실 흘러가네 변방의 백성 다행이도 편한 잠을 자게 되니 여기 와서 술잔 든들 무엇이 해로우리. ◎ 동사록(東傞錄) 판자집 빗소리를 어제 비로서 경험하니 오천(烏川)선생 시율이 과연 신필이다 옛날 현인 세상에서 목숨 걸고 분주 했는데 나는 이 소대(昭代)에 국궁진취 부끄럽네 산두 같은 높은 명성은 오랑캐들도 다 아는데 못난 이 몸은 병이 심하고 머리만 세었구나 산성 주관에 수죽을 바라보니 쭉쭉 뻗은 굳은 절개 이 늙은이를 감분 시키네. (산성관(山城館)에서 오천(烏川)선생을 추모하며 지은 시이며 “판자집 빗소리는”포은선생이 일본사신으로 갔을때 지은 시(詩)이다) 4. 영천(永川)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기게된 계기 첫째, “오천은 바닷가라 물고기가 잡히는데”라는 시 구절에서 물편(뭍편)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고 하니 옛 문집에도 “바닷가 사람은 고기만 많이 잡으면 되지 학문해서 무엇에 쓸려고 하느냐고”호통을 친다고 전하고 있다. 둘째, 고려(高麗)말 국운이 기울어 가는 틈을 타 30년 동안 왜구들이 영일만을 침입하여 약탈해 가니 싹 쓸어 간 듯 하였다고 영일현 기문에 전한다. “현을 지켜야할 현감은 목숨이 두려워 자라목을 하고 산중 깊은 곳에 숨어 살았고 왜구가 나타나자 서로 알리지 못해 죽어가는 동네 주민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렸다. 그리고 낯에는 들에 나와 일을 하고 밤에는 무서워 산중 깊은 곳에 숨어서 살았다고 하니 전하니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의문을 제시 해본다. 셋째, 포은 선생 탄생 하시고 총명함에 비해 열악한 환경조건으로 집안에서 학문 이 깊은 모친의 친정(외가)영천으로 옮겨가 살았다. 더구나 외삼촌이 영천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고 하니 여러 가지로 부모로서 자녀의 장래를 위해 옮겨 갔다고 할 수 있다. 지금에 와서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사람은 서울(한양)로 보내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5. 결론 그 외 다른 자료나 시(詩)가 전하고 있으나 오천고향(烏川故鄕)이 아니라고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에게는 어찌 가슴에 와 닿을 것인지 가슴 여미고 안타깝다. 지금에 와서도 애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 포은선생의 고향을 다시 찾아 오천을 알리고 홍보 하는 역할은 지역 청년들의 임무가 아닌가 사료된다. 포항시의회 의장(박문하)님의”기고 글에서 영천에서 포은 선생을 업어 갔다라고 찬 한 글에서 고마움을 느끼고, 한동대학교 김운규 교수님께서는 “당연히 포은 선생은 포항 사람입니다 그리고 문충 탄생 이라고 해도 문제 될것이 없다 라고 격려를 해주셨고 영일정씨 종친회 종약원(서울)에서는 오천청년회에서 발행한(다시찾은 포은선생의 고향)책자로 인해 다시금 할아버지 고향을 찾은 것 같다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용인시 포은선생 묘소 앞 안내판에 영천이라 기록 하지 않고 “경상도”라고 적었고 영천시의 항의가 심하나 포항에서도 포은 선생에 대한 연구와 자료를 찾아 홍보와 더불어 많은 관심과 배려를 아울러 부탁을 한다. 우리지역의 유적들만 말없이 지키고 있을 뿐 관심을 두지 않는 한 포은 선생의 정신은 묻어 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문충리 생가터/ 승마암(승마석)/문충리 8景/문충리 동가/유허각(유허비)-구정리소재/ 오천서원(원리소재)/시조 형양 정습명선생.포은 정몽주선생.설곡 정사도선생.송강 정 철선생의 위폐를 모신곳/ 이러한 자료들이 말해 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오천사람들 조차 영천이라고 하니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 ) 오천청년회에서는 이사회 의결에(2007년3월15일)통과하여 “포은 문화축제(2007년 5월27일)를” 주관하고 포은 선생의 고향 오천(문충)임을 알리고 홍보 하며 오천읍 자생 단체들과 뜻을 모아 문화 축제 행사에 각 단체의 행사를 겸하는 등 읍민의 화합과 단합을 위한 행사와 동시에 우리지역의 출신 포은 선생 탄생 670주년을 맞이하여 정신을 계승 발전 시켜 나아가 포항시의 차원에서 포은 문화축제가 될 수 있도록 승화시킴에 주력을 할 계획이다. 이번 포항시에서는 구.청사를 도서관으로 바꾸고 도서관 명칭을 공모한 결과“포은 도서관”이라 낙점을(2007년3월24일) 하였다고 하니 잃어버린 조상을 다시 찾은 듯 기쁨을 감출수가 없으며 포은 문화 축제에 청신호를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타시에서는 축제를 진행 하고 있으나 포항시에서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가운데 오천청년회에서 주관하는 포은 문화축제에 관심과 격려를 아낌없어 퍼 부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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