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

⑪ 목은선생과 나옹선사

강나루터 2022. 9. 1. 18:59

 

⑪ 목은선생과 나옹선사

유교와 불교의 조화 이룬 ‘두어른’

고향 열반 장소도 비슷한 인연

 

‘목은문고’에 ‘직지’ 존재 밝혀

 

조계사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문화재급 기와집이 한 채 씩 자리잡고 있다. 동쪽은 갑신정변의 무대인 우정총국이고 서쪽은 목은영당이다. 대로변(그 이름도 우정국로이다)에 드러나 있는 우정총국과는 달리 목은영당은 숲속에 가려져 유심히 살펴야만 보인다. 그곳은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이며 충절로 이름높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선생의 영정(보물1215호)을 모신 자리이다. 당신 이름처럼 지금도 영당은 은자(隱者)처럼 숨어있다. 고층빌딩 사이의 소공원은 중동학교자리였는지라 제법 숲이 우거진 까닭이다.

 

가끔 그곳을 찾는다. 어느 날 늘 굳게 잠긴 대문이 열려있길래 들어가 사당 문틈 사이로 영정을 친견하고자 했으나 내부가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오다가 눈길이 머문 곳은 그 옆에 지어진 8층짜리 ‘목은관’이라는 건물이름이었다. 영당을 관리하던 기존 낡은 집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얼마 전에 빌딩을 올렸다.

 

맨 위층의 한산이씨 대종회 사무실에서 문중의 일과 영당관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빌딩과 영당은 부조화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심의 또다른 퓨전문화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조계사까지 권역을 넓힌다면 유교와 불교가 사이좋게 또 하나의 조화를 이루며 현대도심 속에서 전통문화를 지켜가고 있는 셈이다.

 

목은 이색의 영정은 1767년 함께 모사했다는 동일한 영정이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에도 있다. 이곳 묘자리는 무학대사가 잡아주었다고 전한다. 또 하동 금남사(錦南寺)에도 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2006년 잃어버렸다고 한다). 친불교적인 그의 문집인 ‘목은집’에는 사찰이나 승려를 위한 기문(記文)이 37편이나 되며 그 중 9편은 나옹선사와 관련된 것이다. 이색과 나옹은 고향이 같은 경북 영덕이다. 또 두분 모두 열반한 곳이 신륵사와 그 인근이다. 시작과 끝이 같은 것도 예사인연은 아니다. 만년에 신륵사를 무대로 서로 교류하면서 지냈다. 대문장가인 그의 솜씨로 지은 나옹선사의 비문은 오늘까지 그 절에 건재하다. 이숭인(1347~1392)이 지은 대장각기(大藏閣記) 비각(碑閣)에 의하면 선생은 부모와 공민왕을 위하여 경율론 삼장을 새겨 신륵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물론 젊었을 때는 공민왕에게 불교의 폐단을 비판한 복중상서(服中上書)를 올린 경력도 있다. 생각이란 늘 움직이는 것이다.

 

그는 선종사에도 특이할만한 기록을 남겼다. 고려 백운경한(1299~1375)선사가 정리한 선종 역사서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은 인쇄사에서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유명하다. ‘목은문고’에서 이 책의 존재를 언급해 놓은 것이다. 동시에 현재 고인쇄박물관으로 꾸며진 금속활자 주조처인 흥덕사는 물론 청주인근에 대한 여러 정황도 함께 남겼다. 이유는 조선건국에 비협조적이던 그가 결국 청주지방의 옥(獄)에 수감된 이력 때문이다. 어쨌거나 〈직지〉는 이름만 전하다가 현대에 이르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비장된 하(下)권이 박병선씨에 의해 발견되면서 그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청주는 지자체 차원에서 〈직지〉상(上)권 찾기 운동을 펴고 있다.

 

목은의 기록인 “중국 강남의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에서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에게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받아왔다. 그 후 석옥이 입적한 뒤 그의 제자들을 보내 후계자의 징표로 삼았다”는 내용에서 보듯 백운 선사는 그의 스승인 석옥 선사로 부터 이 책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가장 요긴한 부분을 손수 추려내고 일부는 증보하여 ‘고려식 전등록’으로 다시 편집한 것이 현재의 〈직지〉인 것이다. 조계종의 공식 중흥조인 태고보우(1301~1382)선사 역시 석옥선사의 법맥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