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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생활/피천득

강나루터 2023. 1. 1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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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 사랑하는 생활/피천득

강나루터 2012. 1. 14. 12:59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필자가 이 글을 썼던 시기) 돈으로 한 오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 나는 깨끗한 침대에 누웠다가 하루에 한두 번씩 더웁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딸에게 제 생일날 사주지 못한 빌로도 바지를 사주고, 아내에게는 비하이브 털실 한 폰드 반을 사주고 싶다. 그리고 내 것으로 점잖고 산뜻한 넥타이를 몇 개 사고 싶다. 돈이 없어서 적조하여진 친구들을 우리 집에 청해 오고 싶다. 아내는 신이 나서 도마질을 할 것이다. 나는 오만 원, 아니 십만 원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는 생활을 가장 사랑한다.

 나는 나의 시간과 기운을 다 팔아버리지 않고,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이라도 남겨서 자유와 한가를 즐길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

 나는 잔디를 밟기 좋아한다. 젖은 시새를 밟기 좋아한다. 고무창 댄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기를 좋아한다. 아가의 머리칼을 만지기 좋아한다. 새로 나온 나뭇잎을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보드랍고 고운 화롯불 재를 만지기 좋아한다. 나는 남의 아내의 수달피 목도리를 만져보기 좋아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좀 미안한 생각을 한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서영이 엄마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나 아는 여인들이 인사 대신으로 웃는 웃음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아름다운 빛을 사랑한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찬란한 만폭동, 앞을 바라보며 걸음이 급하여지고 뒤를 돌아다보면 더 좋은 단풍을 두고 가는 것 같아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예전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 주신 색종이 같은 빨간색, 보라, 자주, 초록, 이런 황홀한 색깔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우리나라 가을 하늘을 사랑한다. 나는 진주빛 비둘기빛을 좋아한다. 나는 오래된 가구의 마호가니빛을 좋아한다. 늙어가는 학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좋아한다. 

 나는 이른 아침 종달새 소리를 좋아하며, 꾀꼬리 소리를 반가워하며, 봄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즐긴다. 

 갈대에 부는 바람 소리를 좋아하며,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나는 골목을 지나갈 때 발을 멈추고 한참이나 서 있게 하는 피아노 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젊은 웃음 소리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 없는 방 안에서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는 서영이 말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비 오시는 날 저녁때 뒷골목 선술집에서 풍기는 불고기 냄새를 좋아한다. 새로운 양서(洋書) 냄새, 털옷 냄새를 좋아한다. 커피 끓이는 냄새, 라일락 짙은 냄새, 국화, 수선화, 소나무의 향기를 좋아한다. 봄 흙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사과를 좋아하고 호도와 잣과 꿀을 좋아하고 친구와 향기로운 차 마시기를 좋아한다. 군밤을 외투 주머니에다 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기를 좋아하고, 찰스 강변을 걸으면서 핥던 콘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나는 아홉 평 건물에 땅이 오십 평이나 되는 나의 집을 좋아한다. 재목은 쓰지 못하고 흙으로 진 집이지만 내 집이니까 좋아한다. 화초를 심을 뜰이 있고 집 내놓으라는 말을 아니 들을 터이니 좋다. 내 책들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을 수 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집에서 살면 집을 몰라서 놀러오지 못할 친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삼일절이나 광복절 아침에는 실크 해트를 쓰고 모닝을 입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여름이면 베 고의 적삼을 입고 농립을 쓰고 짚신을 신고 산길을 가기 좋아한다.

 나는 신발을 좋아한다. 태사신, 이름 쓴 까만 운동화, 깨끗하게 씻어논 파란 고무신, 흙이 약간 묻은 탄탄히 삼은 짚신,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皮千得)  

 

금아 선생의 수필 세계는 나날의 세게다. 그것은 나날의 삶에서 우리가 겪는 작은 일들, 그 중에도 아름다운 작은 일들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감각적인 기쁨을 주는 작은 일들, '고무창 댄 구두를 신고 아스팔트 위를 걷는' 느낌이라든지 손에 만져지는 '보드랍고 고운 화롯불 재'와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잘못 걸려온 전화에서 들려오는 '미안합니다' 하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젊음의 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우리의 평범한 생활 가운데 문득 비쳐오는 보다 넓고 큰 세계의 '반사적 광영'일수도 있다. 무릇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의 삶의 자세에 대응하는 것이다. 금아 선생의 아름다운 것들은 결코 협소한 세계는 아니면서, 선생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에 든 많은 것들은 깨끗하고 부드럽고 조촐한 느낌에 대응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하나의 조그맣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들이다. 거기에서 요란하고 퇴폐적인 아름다움은 배제된다. 그 나름대로의 건강은 이 세계의 특징이다.    

출처 : 여강(如岡)
글쓴이 : 如岡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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