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주서(雲臥菴主書) 1.
11월 7일, 풍성(豊城) 곡강현(曲江縣) 감산사(感山寺) 운와암주(雲臥菴主) 효영(曉瑩)은 경산(徑山) 둔암 무언(遯菴無言)수좌에게 글월 올립니다.
얼마 전 상람사(上藍寺)에서 인편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서야 형의 진정한 마음을 알았습니다. 답답했던 마음이 크게 위안되니 울화 치민 가슴이 맑은 바람에 씻기우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서로가 멀리 떨어져 있노라니, 적당한 인편이 없어 조금이나마 소식을 알릴 길이 없었던 점이 매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당대(唐代) 고황(顧况)이라는 시인은, "한번 헤어진 지 어느덧 이십년, 사람은 몇차례나 이별을 겪어야 하나"하였답니다. 형과 헤어진 세월을 손꼽아 헤어보니 고황이 개탄했던 햇수보다도 무려 7년이나 더 지났습니다. 이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도의로 다듬어주시던 도움을 다시 생각한 마은에 환한데 마치 먼 옛날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형께서 주지를 도와 설법으로 많은 대중을 깨우쳐 준다하니, 참으로 매섭고 큰 수단이 아니고서는 쉽사리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깊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게송에다 제 마음을 실어보았습니다.
경산은 우뚝솟아 구름 위에 드높은데
높은 정상 홀로 숨어 세사를 잊었구려
검은 뱀(죽비) 손에 쥐고 주지를 도와
인천(人天)에다 독기를 품어대는구나.
徑山突兀上雲煙 高遁山顚絶世緣
握以黑蛇分半座 却將毒氣噴人天
실로 조실스님께서 거듭 당부한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니 존경하고 존경하옵니다. 이제 동짓달이라 차가운 날씨가 매섭지만 형은 앉으나 누으나 날마다 천룡이 공경하는 복을 누릴 터이니, 그 즐거움 가이 없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박한 운명과 하찮은 재주로 큰 걸음을 내딛지 못하여 총림의 도반들을 뒤따라 가기도 어려웠습니다. 천품과 분수를 따를 수밖에 없어 건도(乾道) 신묘(1171)년에 거칠은 산중에다 토굴을 마련했지만 너무나 춥고 쓸쓸하여 노병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후 순희(淳熙) 무술(1178)년 겨울, 문도를 거느리고 감산소사(感山小寺)로 옮겨와 살고 있습니다.
사원의 세전지(稅錢地)는 31개소에 이르기는 하나 모두 일정한 살림살이가 되지 못하고 부서진 가옥 몇 칸이 있기는 하나 마치 낙양 땅 옥천자(玉川子)의 낡은 집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도반들이 어려운 생계와 후하지 못한 공양을 마음 아파한 나머지 서로가 출자하여 작게나마 장경각을 지은 후 재물과 법이 일어나 하루하루 지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모(1183)년 급작스런 제자의 죽음으로 마침내 손수 청소를 해야 했고, 땔감이며 양식을 마련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그저 잠이나 푹 잤으면 하는 생각 뿐입니다.
형께서 상람사의 주지를 그만두고 산간에서 고요를 즐긴 지 11개월 만에 남원(南源)선사의 명으로 청원사(靑原寺) 조실로 옮겨 갔는데 그곳의 인연과 법회가 자못 성대하다 하고, 또한 두세 명의 스님이 죽비 쓰는 일을 외롭게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형이 쓰시는 죽비는 대혜(大慧) 노스님이 매양(梅陽)에서 보은사(報恩寺)로 와서 입실하는 납자들을 위해 썼던 것으로, 무착(無着)선사가 일찍이 명(銘)을 지어 그 유래를 기록하였는데, 거기에 기록된 글을 인용합니다.
대혜 노스님이 이 죽비로 부처와 조사가 전하지 않은 묘한 이치를 들어 보여주신 지 거의 40년, 마침내 임제의 정통을 일으켜 세웠으며, 아무리 어려워도 이 죽비 들기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이런 까닭에 매주(梅州) 보은사에서는 당사(堂司)를 두어 그것을 소장하게 되었다. 강서(江西) 영 중온(曉瑩仲溫)이 일찍이 당사를 맡고 있다가 이 죽비를 얻어가니, 어찌 천년에 한번이나 있을까 한 총림의 영광에 그치겠는가. 이에 무착 묘총(妙總)은 삼가 머리 조아려 명을 쓰는 바이다.
남산의 대나무
깎지 않아도 스스로 유별나
검은 독사처럼
거세게 독기를 뿜어댄다
자(尺)로 물건을 재듯
아무리 써도 끝이 없어라
성인을 단련하고 범인을 수련시켜
천지를 다스리는 것인데
중온이 이를 얻었으니
더욱 더 잘 보존하여
총림을 빛내고
천고에 잃지 않게 하소서.
南山有竹 不削自異
狀若黑蚖 噴噴毒氣
如尺之捶 用之無匱
鍛聖烹凡 經天緯地
仲溫得之 尤宜保秘
照映叢林 千古不墜
나는 고향 땅에 묻혀 한낱 쓸모없는 가구짝처럼 살아왔고, 죽은 후엔 반드시 승려들의 손에 불태워질 것이니 차라리 나의 관 뚜껑이 덮여지기 전에 죽비와 무착선사의 친필 비명을 모두 형에게 전해주는 것이 낫겠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그 죽비 쓰는 곳에 영험이 있었으면 하며, 형도 이에 대해 들으신다면 반드시 기뻐하리라 생각됩니다.
형은 산두(山頭) 형제와 교분이 두터워 강서지방을 함께 지났지만 내가 다시 만나본 사람은 오직 고강(古岡) 땅 영(永)형 뿐인데 앙산사에 주지하라는 명을 받고 풍성(豊城)으로 가는 길에 나의 암자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절로 들어가는 길을 잠시 전송하였을 뿐인데 그 후 대위사(大潙寺)로 옮긴 지 2년 만에 그는 입적하였습니다. 향성사(香城寺)에 주지하던 장계(長溪)의 회(晦)형도 나를 찾아온 후 대위사(大潙寺)의 주지를 지내다가 겨우 한달 만에 입적하였습니다. 건창(建昌) 땅 원(圓)형은 아호사(鵝湖寺)에서 앙산사로 옮겨가는 길에 일부러 빙 둘러가면서까지 방문하여 만났다가 헤어진 후 임강(臨江)의 혜력사(慧力寺)에 도착하여 얼마 있다가 절 일을 맡은 지 7일 만에 갑자기 서쪽으로 떠났습니다. 회와 원(晦 · 圓) 두 형은 이렇듯 세간일과는 인연이 없다 하겠으나 승려로서의 본분에는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육왕사(育王寺)의 광(光)형은 도와 복이 이처럼 성대한데도 지난 날 아침 저녁으로 교류하는 가운데 위황(韋皇)이 귀인인 줄 모르고 지내 온 적이 많았습니다. 그가 주지로 나온 이후 내게 보낸 편지가 3 · 4편이 되는데 그 중에서도 그가 영은사(靈隱寺)에 있기에 편지로 안부를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형은 범골(凡骨)에 날개를 달아 날아다니는 신선이 되고 물고기가 용 되는 때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연 · 원(演 · 圓) 두 형이 여태껏 인천(人天)의 수레바퀴를 밀고 나갔다는 말을 듣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형에겐 이야기할 필요도 없겠지만 도의 향기와 덕의 훈풍이 자연히 나오는 몸으로서 천하 총림의 공론을 잊지 말아달라는 염원에서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총림엔 공론마저도 없으니 이 일을 어
찌한단 말이오.
지난 여름 정자사(淨慈寺)의 밀(密)형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정성이 담긴 마음은 예전과 다름없었습니다. 옛 조사의 도는 정작 주맹(主盟)을 의지하고 본색납자들이 이에 귀의하니, 어찌 지난 여름에 갑자기 총령(葱嶺)을 넘어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형은 반드시 초조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강호의 도반들은 서리맞은 낙엽처럼 병들고 죽어가 이젠 얼마 남지 않았음에야…… 사람을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얼마전 화장사(華藏寺)의 연(璉)형이 보안사(保安寺)에 주지할 때 하루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편지에 조영(祖詠)이 월(越) 땅 흥선사(興善寺)의 주지로 있은 지 몇 해 지나 임안(臨安)에 있을 때, 대혜선사의 생애와 행적을 모아서 연보(年譜) 한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경산사에 가기 전에 선배들과 함께 자세히 살펴보니, 급히 간행하느라 빠진 부분이 많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에게 답서를 보내 오류를 바로잡은 일이 있었는데 형에게 몇가지를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스승(대혜)께서 형남(荆南) 땅에 두번째 갔을 때 무진거사 장상영이 묻기를, 요순우탕(堯舜禹湯)은 옛 성인인데도 어째서 불전에 언급이 없느냐고 하니, 대혜선사는 범천왕(梵天王)과 제석(帝釋)의 설법 인연을 들어 대답하였다고 하는데,* 그 논지가 이처럼 간략하면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늘리기에 꼭 알맞다. 그 당시 문답했던 바에 근거해 보면 심오한 이치가 있었다. 노스님께서 소흥(紹興) 9년(1139)에 시강(侍講) 윤언명(尹彦明)을 위해 설법하자 윤언명이 재삼 수긍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범왕이 부처님에게 설법을 청한 것을 대답함이 아니다. 내 자세한 내용을 「운와기담」에 기재한 바 있으니, 여기에서까지 낱낱이 말하고 싶지 않다.
또 초당(草堂)스님이 쓴 찬(讚)은 소흥(紹興) 10년 보봉사(寳峰寺)의 화주가 경산사에서 구한 것이다. 당시 초당스님은 아직 건재할 때였다. 그러므로 '째째한 마구니들아, 알겠느냐? 이는 우리 불가의 진정한 백미(白眉)다'라는 구절은 소흥(紹興) 13년 형양(衡陽)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다.
또 참정 이태발(李泰發)이 보낸 절구시의 서(序)에 이런 내용이 있다. 형양에 갔을 때 그 고을에서는 순정(旬呈 : 10일마다 올리는 보고서)의 부담을 면하고저 한다 하니 대혜스님은 의연히 안된다고 하면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말라고 하였다는데, 이 마음을 어찌 세속인으로서 엿볼 수 있겠는가? 이에 감탄하여 짧은 시 한 편을 짓는 바이다.
열이랑의 묵은 밭에 띠풀집 지으니
겨자와 송이나물 다 뽑혀 다북쑥 같구나
납승으로 돌아가라는 성상 윤허 없기에
섬돌 앞에서 몇 차례나 굴렀던가.
十畝荒園旋結茅 芥菘挑盡到同蒿
聖恩未許還磨衲 且向揩前轉幾遭
이는 소흥 11년 겨울에 지은 것이지 20년에 지은 것이 아니다. 대혜스님이 처음 형양에 왔을 때 성 안의 요사호(廖司戶)의 집 서쪽 언덕에 암자를 마련했다. 그 연보에는 '열 이랑'이 '10리'로 되어 있으니 형양성 어디에 10리나 되는 동산을 용납할 곳이 있겠는가? 또한 다북쑥 같구나[同蒿]를 봉호(蓬蒿)라고 고쳐썼는데 이 쑥[蓬]은 먹을 수 있는 나물이 아니다. 그러나 참정공의 시는 마치 당(唐) 고력사(高力士)가 협주(峽州)에 부임했을 때 냉이나물[薺菜] 시에다가 자기 마음을 실어 말한 것과 같다.
형을 위하여 그 연보에서 잘못된 부분에 대해 두서없이 대략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연보에는
'매주(梅州)는 남방으로서 풍토병이 심한 고을인데 의원과 약이 몹시 적어 동으로 돌아왔어도 큰 혜택을 받지 못한 자 63이나 된다[東歸而不霑霈澤者 六十有三]'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 인(人)자가 없으니 63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겠습니까? 만일 이것이 사람이고 병으로 죽었다면 이는 정녕 법을 위해 몸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허물이 없는데 어찌 큰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서사천(徐師川)이 소주(昭州)에 있을 때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재너머 소주(昭州)는 풍토병이 가장 심한 곳
큰죄를 범한 중국인들 귀양 보내지는 곳
노스님 아무 죄도 없는데 어인 일로
소주에서 반년을 살아야 했나.
嶺外昭州最瘴煙 華人罪大此爲遷
老夫無罪緣何事 也向昭州住半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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