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스크랩] 적멸보궁 (3) - 설악산 봉정암

강나루터 2012. 8. 20. 21:11

적멸보궁 (3) - 설악산 봉정암

 

봉정암 적멸보궁은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더 이상 중국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양산 통도사에 보궁을 지어 사리를 봉안한 스님은 경주 황룡사 9층탑에도 사리를 봉안했다.

 

그러나 스님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다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고 싶었다. 발길을 북으로 돌린 스님은 먼저 금강산을 찾아갔다.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풍광이 과연 사리를 모실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사리를 봉안하려 하니 어느 곳이 신령한 장소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스님은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이레 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어디선가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스님의 기도처로 날아왔다.

 

스님은 기도의 감응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고 봉황새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봉황새가 좀처럼 아무곳에도 내려 앉지 않았다. 자꾸만 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만 했다. 스님은 할 수 없이 계속 새를 따라 갔더니 새는 드디어 어떤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스님이 봉우리로 올라가자 봉황은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스님은 봉황이 자취를 감춘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바위는 언뜻 보아도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온 산천을 다 헤매어도 더 이상의 승지는 없을 것 같았다.

자장율사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 할 곳임을 알고 봉황이 인도한 뜻을 따르기로 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불뇌사리를 봉안하고 5층탐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붙였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의 일이었다. 자장율사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절터를 잡은 봉정암은 이후 불자라면 살아 생전에 한 번은 꼭 참배해야 하는 신앙의 성지로 정착되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문무왕 17년(667)경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세로 지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을 참배했으며,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도 1188년이 이곳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수 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여기에 부처님의 불뇌사리를 봉안돼 있어서 였다.

 

봉정암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중건 중창이 있었다. 1923년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 선사가 쓴 <백담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중종 13년(1518) 환적(幻寂)스님이 세 번째 중건불사를 했고, 네번째는 명종 3년(1548)에 등운(騰雲) 선사가 절을 고쳐 지었다. 이어 인조 10년(1632)에는 설정(雪淨) 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했다. 특히 설정화상의 중창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拜塔台)를 만들었으며 누각까지 지었다고 한다. 여섯 번째 중건은 정조 4년(1780) 계심(戒心)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곱번째는 고종 7년(1870) 인공(印空), 수산(睡山) 두 스님이 불사에 원력을 모았다. 그러나 6.25 전쟁때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어 10년 가까이 5층 사리탑만이 외롭게 서 있다가 1960년 법련(法蓮) 스님이 1천일 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했다.

 

현재의 봉정암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5년부터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해발이 높은 봉정암은 기도를 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자장율사의 창건설화도 그렇지만 이 밖에도 신이한 영험과 이적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그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불법을 믿지 않는 유학자들 몇 사람이 산천유람을 하는 길에 봉정암을 찾아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제법 아는 척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대사. 저 돌덩이에 대고 목탁을 치고 절을 한다고 무슨 영험이 있겠소. 차라리 나한테 사정을 하면 내가 술이라도 한 사발 받아 주겠소” 불뇌사리탑에 기도를 하러 가던 스님은 기막힌 생각이 들었으나 저러다가 떠나면 될 테니 분심을 낼 이유가 없다면서 참았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서 유람객들이 봉정암을 떠날 형편이 못되었다. 그들은 절 뒷방을 하나 빌려 잠을 자면서 술과 고기로 도량을 어지럽혔다. 그날 저녁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 ‘저들이 부처님의 도량에서 계속 방자하고 버릇없이 행동하면 개를 보내 혼내주겠다. 스님은 유람 온 유생들을 찾아가 꿈을 얘기하며 보통 도량이 아니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꿈이란 본시 허망한 것’이라며 다음날도 술타령을 그치지 않았다. 날씨는 이틀이 지나자 개었다. 유람객들은 달도 떠오르고 해서 바깥 바람을 쐬기가 좋았던지 밖으로 나와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벼락을 치듯 큰 짐승 울음소리가 나더니 기도하는 스님에게 불손한 행동을 하던 유생을 물고 가버렸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으로 숨어 들어가 벌벌 떨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유생들은 친구를 찾아 나섰다. 절 밑으로 한참을 내려가 보니 불뇌탑을 모독한 그 유람객의 시신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다시 암자로 올라와 � 앞에 나아가 참회기도를 하고 꽁지가 빠지게 산을 내려갔다. 끔찍한 얘기지만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설화다.

 

출처 : 오솔길
글쓴이 : 검단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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