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스크랩]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유명한

강나루터 2010. 12. 16. 07:06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율곡 이이, 송강 정철과 친구 사이였고 토정비결을 쓴 토정 이지함이 작은 아버지다. 이조·예조·병조·형조판서와 우찬성, 도승지, 대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도 몇 차례 했다. 서화에도 능해 문장팔가(文章八家)로 불리며 조광조, 이언적의 묘비도 썼다. 그의 아호를 딴 아계집은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정치를 하다 보면 영광과 좌절을 수없이 넘나들어야 하는 법. 그도 그랬다. 붕당정치가 한창일 때 북인의 우두머리가 되어 윤두수, 윤근수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켰고, 절친한 친구였던 송강마저 강계로 유배시켜 버렸다.

권력은 무상한 것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아계가 ‘나라를 그르치고 왜적을 침입하도록 했다’는 탄핵을 받아 첫 번째 파직을 당한다. 북인이 분당되면서는 이이첨, 정인홍 등과 대북파 영수로 재차 영의정이 되었으나 또다시 파직되는 곤경이 겹친다.

탐나는 요직 벼슬을 두루 섭렵하다 보니 그 자리를 타고 넘으려는 반대파의 표적 시샘을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권좌에 앉아 부러움을 사고 영화를 누리려면 만고풍상은 각오해야 하는가 보다. 영욕을 교차하며 상처를 입으면서라도 역사에 이름을 남겨야 잘 사는 건지, 갑남을녀(甲男乙女)로 한평생 몸 성히 사는 게 평안한 인생길인지는 누구도 단정 못할 일이다.

◇아계 이산해의 영정이 봉안된 사당. 인근 산세가 아기자기하며 사신사를 모두 갖췄다.


이런 아계의 탄생 비화를 알고 나면 모두가 의아해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 이지번(?∼1575)이 명나라 사신으로 산해관에 유숙할 적에 하루는 집에 있는 부인과 동침하는 꿈을 꾸었다. 공교롭게도 수천리 밖 집에 있는 부인도 같은 날 남편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꿈을 꾸고 수태하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여자 혼자 아이를 가졌다 하여 부인을 내치려 했으나 시동생인 토정의 만류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당시 중국을 다녀오려면 몇 달에서 길게는 1년 이상도 걸릴 때였다. 이지번이 귀국하여 꿈꾼 사실을 말하고 날짜까지 일치하게 되자 결백은 입증되었다. 이렇게 출생한 아들이 아계이고, 꿈꾼 장소의 이름을 따라 ‘산해’라 지었다는 것이다. 토정은 이지번의 친동생이며 아계는 친조카가 된다. 어려서부터 아계를 가르쳤고 평생 스승이기도 했다.

이쯤에서 도무지 믿기지 않아 심사가 복잡해지고 혼란스럽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구나 이 설화는 재미난 옛날얘기가 아니고 국내에서 발행된 유명 사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곰이 여자로 변신한 웅녀한테 단군이 태어나고 삼국의 건국시조가 알에서 태어나는 등 고대 위인들의 탄생설화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이산해는 불과 460여년 전 사람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도 아니고 중국 대륙에서는 명이 몰락해 여진의 누루하치가 세력을 팽창하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장악해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하던 시기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쓰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집필할 때다.

이런 아계의 묘가 충남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있다. 추사 김정희 묘를 취재하러 갔다가 이 지역의 이름난 지관 문산 김인수(79) 선생의 안내로 찾게 된 것이다. 묘역에 올라 나경을 펼치니 간좌곤향으로 강릉에서 목포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혈장 자체가 거대한 왕릉을 연상시키며 결인목이 잘록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당이다. 좌우 사신사의 호위도 편안하기 그지없다.

◇후손들이 비보로 조성해 놓은 연못과 세 그루의 나무. 바로 뒤에는 방산저수지가 있다.


문산은 물이 들어오는 입수 방향과 물이 나가는 파구 방향을 중요시하는 포태법에 능해 삼합(三合)을 중요시한다. 12지지 가운데 해묘미(亥卯未)가 만나 합이 되면 목국(木局)이 되고 인오술(寅午戌)은 화국, 사유축(巳酉丑)은 금국, 신자진(申子辰)은 수국으로 변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삼합 중 가운데의 묘는 동쪽으로 나무, 오는 남쪽으로 불, 유는 서쪽으로 금속, 자는 북쪽으로 물을 지칭하는 까닭이다.

“간좌에 신자진의 수국파면 시사총으로 변해 대 잇기가 어려운데 아계 묘는 우백호의 소나무가 비보로 막아 서 다행”이라니 옆 사람도 듣기가 좋다. 대나무 숲 사이로 비치는 물의 방향까지 세심하게 챙긴다. 시신을 하관할 때 중남(中男·둘째나 셋째 아들)쪽으로 분금해야 자손을 많이 본다는 설명이다. 분금은 좌향과는 다른 개념이며 나경에서도 5도의 차이를 나타낸다. 묘 앞에 후손들이 인공으로 조성해 놓은 연못과 저수지가 충(衝)으로 끼어들어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구비문학에 등장하는 민담 못지않게 구전에 전하는 풍수설화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임금에서 암행어사 등 고관대작은 물론 도통한 대사와 무명풍수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도 다양하다. 그 중 조선 19대 숙종(1661∼1720)은 임금이면서도 신통풍수였다. 45년10개월을 재위하면서 당파 간 싸움이 가장 심했던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낸 군왕이다. 정파 간 치열한 당쟁을 적절히 활용하여 왕권 안정을 이끌어 냈고, 애첩 장희빈을 중전 자리에 앉혔다가 사사하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도 이 판에 끼어들었다가 사약으로 죽고, 당대의 숱한 명사들이 생사고비를 넘나들며 충성에만 몸바치게 한 지혜는 후세 사학자들도 탄복한다.

◇아계 묘 너머에 있는 고려시대 강민첨 장군 묘. 마부와 말무덤이 함께 있어 애틋한 풍수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맨 위가 강장군 묘다.


축지법에도 신출귀몰했고 하룻밤 사이 팔도강산을 이웃 드나들 듯하며 힘겹게 사는 백성들의 묘자리를 잡아 주어 잘살게 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사자생손지지(死者生孫之地)를 택지해 대를 잇게 했다는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전라도 곡성의 어느 부부가 뒤늦게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어 대가 끊기게 되자 시신을 묻지 않고 집에 둔 채 울부짖었다. 그 사연을 안 숙종이 시신을 가져다 함경도 명천의 ‘사자생손지지’를 찾아 묻어 주었다. 때마침 새로 부임하는 함경감사가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동행하던 17, 18세 된 딸이 그곳에서 쉬다가 소변을 보게 되었는데 흥건하게 젖기만 하고 오줌이 나오지 않았다. 그 후 까닭 없이 배가 불러와 감사는 딸을 죽이려고 숙종에게 상소했다. 숙종이 매우 반가워하며 자신이 잡은 묘터 내력을 말하고 잘 보살피게 했다. 열 달 후 아들을 낳자 7년을 잘 기르게 한 뒤 곡성의 노부부를 찾아가 대를 잇게 했다는 것이다.

첨단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납득 안 갈 옛날얘기임은 자명하다. 특히 논거와 이론이 확실해야 실증으로 받아들이는 서양인들에겐 더더욱 납득 안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런 서양인들이 근자에 와서는 풍수를 인정하고 일상생활에 응용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 책상 배치에 홍콩의 저명 풍수가 초빙되고 명사들의 의전에도 오행에 따른 옷 색깔 배합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강민첨 장군 묘 앞에 있는 효비(孝碑). 효자들이 많이 나와 세운 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국이나 위인 탄생에는 신화나 설화적 요소가 다분하다. 민초들은 감히 넘보지도 못할 신성한 영역이다. 설화에도 국력이나 민족 간 우열이 존재하여 강대국 신화는 사실처럼 미화되고 약소국 신화는 능멸당하기 일쑤다.

민감한 영역이지만 이 같은 인간 심성은 종교 간에도 스며 있다. 석가모니는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짝을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쳤다.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사도신경에 명기돼 있다. 종교가 분포된 지역의 국력과 민도에 따라 그 종교의 대중적 신뢰도도 크게 좌우됨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풍수설화도 마찬가지여서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불교와 기독교보다도 훨씬 이전 시대다. 부모의 몽중 관계로 태어난 이산해는 요즈음의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내며 감옥살이도 한 실제 인물이다. 아계의 출생도 숙부 토정이 자신의 부모 묘를 쓰면서 예언한 바 있다. 하기야 복제 개가 출현하고 배아 줄기세포를 통해 불치병을 없애겠다는 세상에 설화의 진위를 따져 얻고자 함이 무엇이겠는가.

문산이 한 군데 더 가볼 곳이 있다고 한다.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 산34번지. 고려 현종 때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동여진족이 쳐들어 오자 용맹으로 격퇴한 강민첨(姜民瞻·?∼1788) 장군 묘다. 묘역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새로 수축해 고려시대 묘제를 찾아볼 수 없으나 장군 묘 밑에 마부묘가 있고 그 밑에 말 무덤이 나란히 있다. 별도의 마총(馬塚)이나 상전과 함께 있는 종의 무덤은 여러 번 보았어도 장군, 마부, 말무덤까지 한자리에서 보기는 처음이다. 자신이 모시던 장군이 죽자 말의 목을 치고 자신도 자결하여 후손들이 함께 장사지내 주었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진좌술향의 사고장(四庫葬)에 들어 ‘아무나 쓰는 자리’는 아니다. 이 무덤에 얽힌 애달픈 사연을 어찌 다 지면에 옮기겠는가. 이처럼 민간에 전해 오는 풍수설화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예산의 임존산성은 백제가 망하며 3년 동안 부흥운동을 전개했던 최후 항전지로 유명하다.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와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 묘도 이곳에 있고 윤봉길 의사 고향이기도 하다. 구한말 비구승맥을 이어온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도 이곳에 있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가평군향토문화연구회
글쓴이 : 화악산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