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죽령재와 상원사 종

강나루터 2011. 2. 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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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재와 상원사 동종(銅鐘)

 
 

영남과 영서지방의 분수령을 이루는 죽령의 험준한 고갯길은 158년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5)에 개통한 이래 1900년 간 길손의 숱한 애환이 어려있다. 첫째, 신라 삼국통일의 대군이 이 길을 통하여 백제의 서부지역과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공략하는 길목 구실을 하였으며 통일후에는 국정의 대동맥으로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
둘째, 고려 건국의 기반을 구축한 안동과 융성 발전의 터전이 된 순흥을 중심으로 한 영남은 고려의 건국, 통치, 유불 문화 발전의 열매가 맺도록 이 길을 그 허구한 날 수 많은 유학자들이 넘어 가고 오는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셋째, 이조는 유교 사상를 건국의 기본이념으로 하여 모든 국정의 근간을 삼았으니 유교의 시원지요, 유림의 배출지인 영남을 이조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서 생원, 진사의 과거길로, 또한 영감 대감의 행차길로, 서울과 지방사이에 유통되는 모든 공물진상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으니 가히 길손의 애환은 짐작할 만 하다.
과거 보러 올라가는 선비는 의기도 양양하게 말 방울소리도 요란히 꺼덕대며 넘어가고, 풀기없이 허행하는 후줄근한 서글픈 모양에, 말도 주인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 꼬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방울소리 고요하였으니 말하지 않아도 거동보고 낙방거지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죽령 고갯길 연후에 이러한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고 애달프고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으니 이는 안동 남문루에 있던 동종(三千 三百斤)이 이조 세조 임금의 명을 받고 오대산 상원사로 옮겨 갈 때의 사연이다.
이 동종은 주조 연대가 지금 경주 박물관에 소장된 성덕왕 신종(일명 에밀레종)보다 반세기 앞서 주조된 것으로 금, 은, 동, 주석의 합금이며 높이가 1.4m 직경이 1.2m 나 되며 종의 머리에는 용신 틀래로 머리, 발, 몸을 만들어 네발로 종신을 잡고 허리로 걸이를 만들었으며 종의 몸에는 사면으로 구분하여 선녀 비천문이 투각되어 있고 그 사이 4부에 각각 가로 세로 3개씩 3. 3으로 배열된 젖꼭지 36개 모두가 돌출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종으로서 그의 청아한 소리는 가냘픈 듯 또렷하게 끊길 듯 말 듯 구비치고 구비쳐서 백리 밖에서도 들렸다는 종이었다. 그 아름다운 종소리는 이 죽령 마루까지도 들렸다고 한다. 이 종은 원래 불교의 범종으로 만들어졌으며 안동부 중의 어느 큰절에 범종으로 위혼제도의 역할을 해오다가 나말 여초와 여말 이조초의 거듭되는 과도기의 숱한 변란 중 이조 초기 소속되었던 가람의 품을 떠나 부성 남문루에 관종으로 전락하여 시보(時報)종으로 부인에 시각을 알려주는 가련한 처지로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중 세조 등극 후 12년만에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를 확장 중수하여 임금의 원당 사찰로 전국 제일의 가람으로 만들 때 전국에 있는 범종 가운데 가장 소리가 청아하며 멀리가고 자태가 아름다운 종을 찾아 원찰로 운종하라는 어명과 함께 상원사의 중에게 운종도감의 직함이 내려졌다. 이에 운종도감이 된 중은 전국 각지로 찾아 헤메던 중 안동 남문루에 소장한 이종이 선택되어 상원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불찰의 범종으로 더구나 나라님 원찰의 성종으로 발탁되어 감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웠을까 짐작이 간다. 종으로 이루어진 후 800여년 동안 그 숱한 환란을 겪으며 고장을 지켜왔고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소중히 간직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정든 고장을 떠나야하는 말 못하는 종은 슬픔이 어떠하였을까? 타고난 운명을 거역할 수 없어 세조 12년 초가을 어느날 바퀴없는 나무 수레에 실려 500명의 역졸과 100여필의 우마에 의하여 정든 고장 안동을 뒤로하고 하루에 오리도 가고 십리도 가는 길이 이천 고개를 넘고 두문제를 지나 평은, 창부, 창락역을 거쳐 십수일만에 죽령 마루까지 말없이 끌려 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일까? 이제까지 역졸들의 힘모으는 영차 소리 속에 뜻없이 끌려오던 동종이 영남을 마지막 떠나는 죽령 마루에서 요지부동이고 우마의 울부짖음과 역졸의 영차소리만 소백산을 진동하며 이산 저산 메아리 칠 뿐이었다. 4.5일을 두고 땅을 파고 온 힘을 다하였으나 막무가네라 한 치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운종도감은 생각다 못하여 그 자리에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올리고 독경으로 달래 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이 죽령마루는 영남과 영서를 구분하는 경계 지점으로 마루의 남쪽은 자기 몸이 이루어진 후 800여년간 지켜온 고장인 영남인데 이제 이 마루를 넘어서면 영영 하직하고 산도, 강도, 인심도, 풍속마저도 다른 타도 타관땅 더구나 40리의 월정사 계곡을 거쳐 첩첩산중인 오대산 중턱에 가서 몸 담는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아! 어찌 말 못하는 종인들 인간의 뜻과 다를 바 있으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심에 쌓여있던 운종도감은 생각 끝에 36개의 젖꼭지 중 한 개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하고 잘라 종이 있던 안동의 남문에 정성스럽게 안치하고 큰 제사를 올린 다음 죽령으로 돌아와서 역졸에게 조심스레 당겨보도록 하였더니 이 어인 신통한 일일까? 그렇게도 꿈쩍않던 종이 당기는대로 서서히 끌려가지 않겠는가? 정말 신기하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서 종은 죽령 고개를 떠나 단양, 제천, 원주, 진부를 거쳐 상원사에 안치되어 500여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죽령과 동종사이에 얽힌 사연 외에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이 운종은 안동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600리가 넘는 좁고 험난한 길을 무려 80여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아무리 운종도감이 엄하게 단속하기로 무리들의 행패가 없을 수 없었다. 더구나 옛 속담에 "관청 지고 송사한다"는 말처럼 어명으로 하는 일 세도도 당당한 무리들이었으니 행열이 지나갈 연도변의 민폐가 매우 심했다. 이에 원주 찰방이 참고 견디다 못해 운종도감 중이 역졸의 단속을 게을리하여 지나는 연도변에 행패가 심하다는 것과 이를 조처해달라는 내용을 임금님께 상소하였다. 임금님은 상소를 접한 뒤 운종도감을 불러 친국하니 운종도감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면서 도리어 원주찰방은 유생출신으로서 임금님께 불교를 믿고 불사를 크게 일으킴을 못마땅히 생각하고 역졸 동원에도 힘을 쓰지 않으며 전혀 협조하지 않아 운종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고 그 반대로 고하였다. 이를 들은 세조 임금은 크게 노하여 원주 찰방을 불러 올려 사실무근을 조작 상소한 것은 임금을 속인 죄이며 어명으로 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고 지장을 초래한 것은 크나큰 불충으로 단죄하여 사흘만에 종로에서 효수되었다고 한다. 임금님을 등에 업고 운종하는 중이 두려울 것이 있었을까? 여기 더 추가할 것은 세월이 가니 종도 늙고 죽령도 무척이나 많이 변했다.
종의 상부 장식 용트림 일부가 절손 되어 없고 종신은 금이 길게 가서 그 아름다웠던 옛 자태를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두들겨 보니 청아한 소리는 들을 길 없고 목쉰 여인의 소리처럼 터들거리기만 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죽령도 변하여 옛날 계곡따라 숲속으로 서울가던 길은 이제 우거진 숲과 잡초로 뒤덮여 있으며 산허리에서 숨을 헉헉이며 달리는 열차가 터널을 막나오고 있는 모습이 옛날 운종하던 때를 회상하게 되었다. 더구나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죽령고개를 넘어 서울로 이어져 4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현실로 바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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