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명의 이석간과 천도

강나루터 2011. 2. 7. 22:06

명의 이석간(李碩幹)과 천도(天桃) 
 
 

영주시 영주2동 「뒤세」라는 마을에 이 석간이라는 고명한 의원이 살고 있었는데 천품이 어진데다가 널리 인술을 베풀었으니 제 아무리 난치의 병이라도 한번 시술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척척 고쳐내었다. 이석간 하면 천하의 명의로 통했다. 하루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찾아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대답하기를 "말씀드리기 좀 부끄럽사오나 저는 결혼한지가 꼭 일년이 되옵는데 남편의 몸이 날이 갈수록 조금씩 줄어 들기에 괴이히 여겼더니 지금 이와같이 되었습니다"하고는 품안에서 작은 인형만한 어린아이를 내어 놓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수염도 까마소름하게 난 어른임에 틀림없었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의사가 하는 말이 이것은 동의보감을 천독하고 의서란 의서는 다보았지만 이와같은 환자는 생전 처음보는 터이라 의사의 양심에서라도 무슨 병인지 잘 모르겠다는 이유로 거절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달만 여유를 주면 고치는 방법을 연구해 보겠다고 희망적인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럼 꼭 고쳐 주셔서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떳떳한 부부가 되게 해 주십시요"하는 간청을 남기고는 한 달 후에 다시 찾아 오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그 젊은 부인은 인형만한 남편을 도로 그의 품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니 남편을 구하겠다는 결의에 찬 모습이 한없이 안타까웠다. 비록 언약은 했으나 막상 시술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여 쓴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뽀오얀 먼지가 내려 앉은 의서들을 서안에 내려놓고 연구에 몰두하니 밤과 낮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한달이 살같이 지나갔다. 그 부인이 또 찾아왔다. 정중한 인사를 하고는 그 작아진 환자를 품에서 내놓지 않겠는가? - 이 일을 어쩌나- 하고 의사는 그동안 고생을 하도 해서 핼쓱한 얼굴로 말하기를 한달만 더 여유를 주면 꼭 고쳐 보겠다고 불쌍한 젊은 부인을 위로해 보냈다. 그 후 사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모아 읽기도 하고 넌지시 딴 의원들에게 물어도 보았으나 모두 입을 모아 천지개벽 후 그런 환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면서 일소에 부치고 마니 연구심이 강한 명의로서는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실의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급기야 몸져 눕게 되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 한 달이 또 지나갔다. 약속한 날이 되자 그는 여자가 나타날 것을 생각하니 좌불안석하고 식불감미라 시야는 구름에 싸여 몽롱할 뿐이었다. 그 젊은 여자 앞에서 못 고치겠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그만 그 뿐인데 무책임하고 굴욕적인 말을 하여 그 젊은 여자에게 실망을 준다는 것이 그에게는 차마 못 할 일이었다
실망한 얼굴로 당신이 소위 천하명의 이 석간이냐고 쏘아 부치며 달려들 것 같은 모습을 상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관을 차려 입고는 도망칠 생각으로 아침식사를 끝내고 인적이 없는 저 죽령고개를 향해 말없이 걸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다리가 아팠다. 노변의 널직한 돌 위에 앉아 쉬고 있노라니까 고갯마루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이상한 사람이 "영차 영차"하며 분명히 이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지 않는가? 의아한 눈으로 살펴보니 등 붙은 두 장정이 의원 앞에 다가오더니 여보시오. 어르신네 여기서 영천(현 영주)이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예 약 오십 리쯤 됩니다" 라고 대답하니 "예. 그렇습니까? 그러면 영천의 천하명의 이 석간을 아십니까?" 하고 묻자 가슴이 뜨끔한 나머지 잠깐 속여 넘긴다. "그 이석간이 아주 이상한 환자가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 무슨 병인지 알지못해 그 젊은 부인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여 못 고친다는 말은 못하고 고민 끝에 도망치고 말았다"고 기지를 써서 넌지시 속여 넘겼더니 그가 하는 말이 "천하명의란 헛소문이 났군 그려, 우리 병이야 그 사람한테 가서 고쳐 달라해도 소용이 없겠군"하면서 오던 길로 돌아 가려고 하는 눈치였다. 이 때 이석간은 넌지시 떠 보았다. "여보, 그 병은 듣도 보도 못한 병이어서 그 많은 의서에도 적혀 있지 않는 희귀한 병이라오"하면서 "여보시오 대체 그 병을 어떻게 고치면 되는냐?" 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젊은이가 천연스럽게 하는 말이 "그것은 어릴 때 젖을 주렸던 때문이며 장가를 드니 필시 옛날 젖배를 곯은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니 치료의 방법은 단 하나, 첫아이를 낳은 모유를 호수로는 천집, 양으로는 서말 세홉을 얻어 그것을 큰 함지에 담아 놓고 그 환자를 세 번 목욕을 시키면 한 달안에 완쾌되리라"고 했다. 이야기를 끝마치자 "잘 가시오"하고 그들을 떠나 보냈다. 하도 신기해서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그 젊은 부인은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주 젊잖게 앉아 기쁜 낯으로 젊은 부인을 대하였다.
등 붙은 장정이 가르쳐 준대로 그 부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부인은 염치 불구하고 동네 방네 다니며 첫 아기 난 집을 찾아가서 젖을 얻어 꼭 백일만에야 천집을 채웠다. 얻어 모은 젖이 서말 세홉에 달하였다. 이석간은 그 환자를 부인의 품에서 꺼내어 받아 기지고 젖속에 담궜다가 꺼내니 이슬 아침 오이 굵듯이 그야말로 덤북덤북 부푸는 듯 커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이 나서 세 번을 넣었다가 꺼내니 제법 어린아이만 하게 되었다. 그는 신기해서 그 등이 붙은 젊은이는 과연 누구였을까? 아마도 소백산 산신령이 변신술로 인도한 것이라고 내심으로 생각했다. 석달이 지난 후 그 작은 환자는 완쾌되었다. 그리고 젊은 부인은 너무너무 고마워서 자기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패물을 몽땅 이석간에게 바치었다. 그 후 젊은 부인과 남편은 은혜를 갚기 위해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석간의 명성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전파되고 날이 갈수록 환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죽을 사람도 이석간의 약만 쓰면 거뜬히 낫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 이 말이 동양천지에 퍼지니 일본 중국에서도 난치병 환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루는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 조정에 찾아왔다. 그 목적인 즉, 조선의 천하명의가 영천(현재 영주)땅에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을 중국으로 속히 보내 달라는 명나라의 요청이었다. 임금은 사신을 영천(현재 영주)으로 보내어 이석간을 데려오게 하여 중국 사신에게 소개하고 같이 중국을 다녀오게 어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사신을 따라 가고 싶지 않아 압록강을 건너 가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닥쳐올 난관을 생각하메 만감이 교차했다. 여러날이 되어서 중국에 당도하니 대접이 이만저만 융숭하지 않았다. 삼일후에 임금이 직접 불러서 대령하니 임금께서 "그대는 소문과 같이 사람의 병을 못 고치는 게 없다기에 나의 모후가 이상한 병이 들어 중국의 유명한 의사와 주변의 여러나라의 의사가 진찰을 하고 약을 써 보았으나 아직 고치지 못하였기로 그대를 불렀으니 꼭 있는 의술를 다해서 고쳐 주면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 주겠노라.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나라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본의 아니게 죽어 주어야 되겠다"고 했다.
기왕에 닥친 일이라 어찌할 도리도 없고 해서 그 환자를 한번 보자고 했다. 임금이 앞서서 인도하는 곳을 따라가 보니 금은 보석으로 장식한 넓은 방을 지나 다시 밀창을 여니 그 곳에 약 육십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누워 있는데 얼굴은 마치 달덩이같이 아름다웠고 손은 백옥같이 희고 깨끗하기만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것 같았다. 임금이 인사를 하고나서 하는 말이 "육년전 부터 우연히 말 한마디도 못하고 이렇게 누워있으니 심히 딱한 터이니 진찰을 해보라"고 했다. 이석간이 너무 이상해서 명주수건을 얹고 손목을 쥐어 진찰을 해 보았으나 맥박이 정상이었다. "임금님 아무 병이 없읍니다"하니 임금이 노기띤 얼굴을 하고 이불을 걷어 올렸다. 그러자 이게 원일입니까? 하체가 모두 뱀과 같이 되어가고 있지 않겠는가? 이석간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말없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임금이 "잘 보시었지요 그럼 일어 섭시다"하고 일어서서 따라오라고 했다.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임금의 처소로 따라왔다. 임금께서 앉기에 따라 앉으니 "어떻소 고칠만 합니까?" 못한다면 죽을 판이고 해서 우선 육개월만 시간을 주시면 성의를 다해 고쳐 보겠읍니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리 오너라 하니 사신이 다가왔다. "이분의 처소를 정해 드리되 아주 정중히 대접하라"는 분부였다. 그 곳을 나와 처소에 드니 으리으리하게 좋은 집이었고 침구며 옷이며 모두가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공포감에 흽싸여 망연자실했다. 사신이 물러간 다음 문을 닫고 꿇어 앉아 묘방을 찾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의학의 성서라고 할 수 있는 "동의보감"을 깡그리 외워 보았으나 허사였다. 죽을 일을 생각하니 사랑하는 처자식과 일가친척 그리고 이웃사람들이 생각나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죽어서 낯설고 물선 이국의 땅에서 고혼이 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아득했다. 그러던 중 문득 옛날 자기를 도와 주었던 죽령고개에서 만난 등 붙은 장정이 생각났다. 여기서 만 여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자기 처소 앞에 단을 모으고 한밤중에 축원을 해서 등붙은 사나이를 만나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줄 것을 간청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열심히 발원하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비몽사몽간에 그 등 붙은 장정이 나타나 너는 왜 나를 그렇게 목마르게 찾고 있느냐? 하면서 나는 소백산 산신령인데 저번에 네가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기에 한번 도와주었을 뿐이었는데 또 무엇을 도와 달라는 것이냐? 고 묻기에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는 내 목숨이 진실로 경각에 달렸으니 대왕대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신효한 처방을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대왕대비 마마는 원래 음탕한 여자이었는데 선왕이 돌아가신 후 오랬동안 독수공방을 하는 동안 음기를 참아 병이 되어 하체가 뱀과 같이 변했으니 이 침을 가지고 가서 배꼽에 꽂아 두면 꽂혀있는 동안 소변으로 악기가 흘러 빠질 것이니 하루에 두 번 아침저녁으로 한시간씩 한달동안 계속하면 깨끗이 완쾌 될 것이니 그렇게 하라" 는 가르침을 남긴 채 명명중에 사라져 버렸다. 너무 좋아서 기뻐하는 순간 꿈에서 깨어보니 손에는 반짝이는 금침이 쥐여져 있었다. 다음날 상감을 뵙고 지금부터 대왕대비의 병이 치유되도록 성심껏 다스려 보겠다고 아뢰었더니 상감은 희색을 만면에 띄우면서 대왕대비의 방으로 인도했다. 그날로부터 꼬박 한달동안 시술한 결과 차츰차츰 위로부터 본래의 몸으로 회복해가더니 한달 후에는 완쾌한 몸이 되었다. 임금님은 너무 좋아서 이석간을 불러 놓고 치하를 하면서 "그대 소원이 무엇인고"하고 물으시니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집이 없어 곤란을 겪으니 작은 집이나마 한 채 가졌으면 합니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너는 참 정직하고 욕심이 없는 휼륭한 의사로고"하시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임금님은 여기서 6개월 동안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하시며 신하를 불러 잘 안내 해 드리라고 분부하셨다. 그 후 중국의 명승지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니 귀국할 준비를 다 해 두었는데 금이 천냥이요.
최상의 비단이 백필이었다. 또 전의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임금이 못내 이별을 아쉬워하며 삼일간에 걸쳐 송별연을 베풀었다. 마지막 날 잔치상에는 유달리 크고 붉은 복숭아가 큰상에 놓여 있었다. 하도 먹음직해서 한 개를 먹으니 그맛이야 무어라고 이르랴 이 곧 [천도]라고 할 수 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 씨를 도포자락에 넣어 가지고 귀국했는데 이것은 수년전까지도 공주이씨 후손들이 혼례식 합걸례때 이것을 술잔으로 사용했었다고 전한다. 임금과 아쉬운 이별을 한 후 사신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당도하니 우리나라 조정에서도 후히 맞아들여 임금께서 그 공을 높이 치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석간의 마음속은 "내가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사랑하는 처자식이 굶어죽지나 않았을까" 하고 몹시 궁금했다. 애를 쓰며 허겁지겁 집에 당도하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가? 자기의 집은 오간데 없고 으리으리한 고래등 같은 집이 서 있는데 고을 원님이 이것이 너의 집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불러 보라고 해서 "이리 오너라"하니 안에서 부인과 아들들이 쫓아 나와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 집의 칸수를 세어보니 아흔아홉칸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제갈공명의 팔진도를 응용해서 지었기 때문에 도적이 들지 못하고 특수 온방장치를 했기 때문에 연료가 적게 들었다. 중국에서 받은 돈과 비단으로 부를 누리며 오래오래 살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감에 집이 날로 퇴락하여 자손들이 담을 헐고 집을 수리하였더니 팔진도의 효력이 없어지고 마침내 도적이 자주 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영광중학교 서편 뒤에 남아 있는 당시 99칸이나 되던 웅장한 그 모습은 찾아 볼 길이 아득하나 오늘날 그 자리에 달성 서씨가 살고 있다.
인술로서 일생을 바친 천하명의 이석간이 살던 유서깊은 그 집 앞에서 우리는 옳은 일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은 그 빛을 잃지 않는다는 신념을 배울 수 있다. [주(註)] 이석간(李碩幹) 정덕(正德) 기사생(己巳生) 갑술(甲戌) 졸(卒) 1509∼1574, 가정(嘉靖) 13년 중종(中宗) 29년 갑오시(甲午試) 1534년 진사(進士) 참봉(參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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