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이야기

[스크랩]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看書痴) 이덕무(李德懋)의 행장(行狀)

강나루터 2016. 7. 6. 10:31

                                                                  이덕무(李德懋)의 행장(行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적성현감 겸 규장각 검서관(積城縣監兼奎章閣檢書官) 형암(炯庵) 이군(李君)의 휘(諱)는 덕무(德懋)요 자(字)는 무관(懋官)으로, 후릉(厚陵)의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 시(諡) 소이공(昭夷公) 선생(善生)의 후예이다.

증 호조참판 사헌부감찰(贈戶曹參判司憲府監察) 정형(廷衡)은 고조가 되고, 통덕랑(通德郞) 상함(尙馠)은 증조가 되고, 강계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 필익(必益)은 조부가 되고, 통덕랑 성호(聖浩)는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 박씨(朴氏)는 관향이 반남(潘南)인데 현감(縣監) 사렴( 師濂)의 딸이요, 금평위(錦平尉)로서 시호가 효정공(孝靖公)인 필성(弼成)의 손녀다.

1741년(영조 17) 6월 11일에 태어나 1793년(정조 17) 1월 25일에 본가에서 졸(卒)하였으니 향년 53이다. 달을 넘겨 광주부(廣州府) 남쪽 판교촌(板橋村) 언덕에 유좌(酉坐)로 장사하였으니, 사례(士禮)를 따른 것이다.

3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에 상이 내각(內閣)에 전지(傳旨)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 운서(韻書)를 새로 간행하며 옛날을 생각하니, 고 검서(檢書) 이덕무(李德懋)의 재주와 식견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각신으로 하여금 그 본가에서 유고(遺稿)를 가져다가 산정(刪定)하여 간행하게 하라.” 하고, 내탕전(內帑錢) 5백 냥을 하사하여 간행하는 비용으로 충당하게 하는 한편, 그 아들 광규(光葵)를 녹용(錄用)하여 검서(檢書)로 삼았다.

이때 광규가 여러 유명한 이들에게 명(銘)을 청하고자 손수 기록한 선군 유사(先君遺事) 85조항을 가지고 와 나에게 행장(行狀)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아, 내가 이덕무와 노닌 지 30년이라 그의 평소 행검과 언행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사양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삼가 행장을 짓노라.

경전(經傳)에, “그의 시를 외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옳겠는가?”

하고 이르지 않았는가? 이덕무는 일개 가난한 선비로서 성명한 주상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아 융숭한 포상과 두터운 은택이 당세에 으뜸이었고, 그 행검의 기록이 사후에도 끊이지 않는다. 지금 그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거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자는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러나 그 곧고 개결한 조행, 그 분명하고 투철한 지식, 그 익숙하고 해박한 문견, 그리고 그 온순하고 단아하고 소탈하고 시원스러운 용모와 말씨는 이미 천고(千古)에 멀어졌다. 이 때문에 내가 허전히 방황하고 울먹이면서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 볼까 하였으나 얻을 수 없구나.

                                   

이덕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문자(文字)를 즐겼다. 하루는 집안 사람들이 나가 노는 곳을 잃었다가 저녁때에야 청벽(廳壁) 뒤 풀더미 속에서 찾았는데, 이는 대개 벽에 바른 고서(古書)를 보기에 몰두해 날이 어두워지는 것도 몰랐던 것이었다. 어른에게 글을 배우면 자획과 음의(音義)를 반드시 자세하고 분명하게 탐구하며, 마음속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문득 글을 대해 울곤 하였다. 벽에다 남몰래 해시계를 그려 독서의 시간을 정해놓고, 비록 아이들과 정신없이 놀다가도 때만 되면 반드시 일어나 가서 단정히 앉아 염송(念誦)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장하여서는 온갖 서적을 박람하였다. 늘 남의 책을 빌려 보았는데 비록 비장한 책이라도 남들이 빌려 주기를 꺼리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군(李君)은 참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며,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빌리기를 요청하기도 전에 스스로 빌려 주면서 말하기를, “책을 두고 이군의 눈을 거치지 않으면 그 책을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책을 베끼는 성벽이 있어 늘 하나의 책을 얻게 되면 읽은 다음에 베끼곤 하였으며, 항상 얄팍한 책을 수중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舟]에서도 책 보기를 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으나 책을 쌓아 둔 거와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승두세자(蠅頭細字)가 또한 수백 권으로서 자획이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 하나 쓰지 않았다.

상이 즉위한 지 3년에 세조임금의 옛일을 계숙(繼述)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검서(檢書) 네 사람을 뽑을 때 이덕무가 으뜸으로 선출되었으며, 무릇 관각(館閣)에서 편찬한 거전(鉅典)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국조보감(國朝寶鑑)》ㆍ《갱장록(羹墻錄)》ㆍ《문원보불(文苑黼黻)》ㆍ《대전통편(大典通編)》의 유에 모두 교감한 공로가 있다. 또 《무예도보(武藝圖譜)》ㆍ《규장전운(奎章全韻)》을 편찬함에 있어 고증이 정하고 방대하며 형태와 격식이 상세하게 갖추어졌다. 책이 완성되매 모두가 상의 뜻에 맞아 6품의 승직(陞職)을 명하였다.

무관이 자술한 저서의 서명을 들어 보면 10여 종이 된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몸가짐과 마음쓰는 것을 어린아이나, 처녀같이 해야 한다.” 하면서 사람들이 혹 저술한 시문을 보자고 하면 내 주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의 사고(私稿)가 진귀하지 못한 것이라, 한 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 하여 그 초집(初集)의 이름을 《영처고(嬰處稿)》라 하였고, 온종일 물가에 우두커니 서서 먹이를 구하지 않고 앞에 지나가는 고기만 쪼아먹는 새가 있으니, 이것은 신천옹(信天翁) 또는 청장(靑莊)이라는 물새다. 그가 이것으로 자호하였기 때문에 그 2집(集)의 이름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하였고, 언어 행동에 있어 도(道)에 떠나지 않고, 귀ㆍ눈ㆍ입ㆍ마음의 책임을 게을리 아니하여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기 때문에 그 이름을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 하였고, 선비란 마땅히 곡례(曲禮)로 자신을 닦고 내칙(內則)으로 가정을 독실히 다스려야 한다. 조그마한 예절을 삼가지 않으면 큰 것에 대해 어찌하겠는가? 이에 옛 성현들의 유훈(遺訓)을 인용하여 잠경(箴警)을 갖추고 근대 사람들의 비근한 일을 엮어 보고 느끼는 자료로 삼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소절(士小節)》이라 하였다. 어떤 이가, “역대의 시(詩)에 어느 것이 가장 좋으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꿀벌이 꿀을 만들 때 꽃을 가리지 않는다. 꿀벌이 만약 꽃을 가린다면 반드시 꿀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시를 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천지의 영명한 기운이 고금에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라, 그 빼어난 글귀를 채택하여 나의 창자를 씻는다.” 하여 그것을 《청비록(淸脾錄)》이라 하였고, 황왕 제패(皇王帝覇)와 화하 이적(華夏夷狄)에 대해 연대를 기준으로 사실을 엮되 요약하고 대범한 것만 들어 소자(小子)가 알아보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기년아람(紀年兒覽)》이라 하였다. 교활한 저 섬 오랑캐는 백대의 원수로서 그 소굴이 깊숙하여 도적(圖籍)을 증거할 수 없었다. 내가 적을 살피고자 하나 종시 방법이 어두웠는데, 그대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 진실로 유사시를 당하여 섬 나라에 사신 간다면 그들의 기밀을 살핌이 남만 못하지 않으리라. 내 일찍이 표류되었다 돌아온 사람에게 그 지역의 사실을 묻되 역력히 그 땅을 밟아 본 것처럼 하니,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공(公)이 언제 바다를 건너갔었느냐고 하였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일본의 세계(世系)ㆍ지도(地圖)ㆍ풍요(風謠)ㆍ토산(土産)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청정국지(蜻蜓國志)》요, 옛사람이 몸소 밭을 갈면서 항아리[盎]를 밭 가운데 묻어 놓고 감나무 잎을 따 일사(佚事)를 찬하여 그 항아리에 넣되 한 이랑이 끝나면 하나씩 넣곤 하듯이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앙엽기(盎葉記)》라 하였고, 영남(嶺南)에 벼슬하여 노닐면서 견문을 널리 기록하고 편찰(片札)까지도 알뜰히 수록하여 의젓한 편질(編帙)을 이루었으니, 그것이 바로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이요, 《소대(小戴)》의 의심되는 뜻과 어려운 글자를 나름대로 해석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예기억(禮記臆)》이요, 상의 명으로 《송사전(宋史筌)》을 교열하면서 상에게 간청하여 사고(謝翶)ㆍ정사초(鄭思肖) 등의 전기를 성립하고, 특별히 몽고(蒙古)ㆍ요(遼)ㆍ금(金)의 열전(列傳)을 찬술하여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분별을 바루었으니 그것이 바로 《송사보전(宋史補傳)》이요, 일찍이 남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명(明) 나라 백성이라, 융경(隆慶)ㆍ만력(萬曆)ㆍ천계(天啓)ㆍ숭정(崇禎) 연간의 명신 처사(名臣處士)들과 교유를 맺었으니, 눈앞에서 아첨하다가 뒤돌아서서 눈을 흘기는 것에 비교하면 어찌 그보다 훌륭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1764년 이후 유민(遺民)의 사행(事行)을 채록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로서 이것은 다 간행하지 못한 것이다.

이덕무는 일찍이 유자(儒者)로 자칭하지 않고 그 평범한 행실을 삼가 정주(程朱)의 문호를 지켜서 조금도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며, 문장을 이룸에는 화려함을 힘쓰지 않고 말과 뜻이 잘 통하게 하며, 조리 있고 간결하기로 일가를 이루었다. 상이 일찍이 산림(山林)의 기상이 있다고 칭찬하였으며, 더욱 소학(小學)ㆍ명물(名物)에 박식하여 모든 초목(草木)이나 충어(蟲魚)에 있어 농부나 촌 노인들이 능히 판별할 수 없는 것도 정확히 판명해내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전장(典章)ㆍ풍토(風土)ㆍ금석(金石)ㆍ서화(書畫), 그리고 섬세하고 은벽하여 발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메아리처럼 응하여 상대방의 요구를 만족시킨 뒤에 그치곤 하였다. 그렇지 않을 때는 배운 것을 축적해 두고는 빈 것처럼 하여 그 배운 것으로 남에게 뽐내지 않았다. 천하 일의 시비ㆍ성패와 옛사람들의 심술의 은미한 곳, 시대 문장의 고아ㆍ방일과 순수ㆍ비순수의 구분을 저울로 달고 자로 재는 것처럼 분명히 하니, 참으로 천고의 독특한 안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덕무를 평하는 자가 그의 품행을 제1로 치고, 지식을 제2로 치고, 넓고 견문에 특이한 기억력을 제3으로 치고, 문예를 특별히 제4로 쳤는데, 이제 그 문예에도 미치지 못함이 이와 같다면 이덕무의 품행은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여 함부로 교유(交遊)하지 않으며, 들어앉아 글을 읽은 지 40년 동안 그 이름이 마을 밖에 나가지 않는가 하면, 현달한 벼슬아치 하나 아는 이가 없었다. 찌그러진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험식도 자주 때를 거르되, 기한(飢寒)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아 처자들도 그 말을 듣지 못하였다. 좌와기거(坐臥起居)에 일정한 법도가 있으며 서질궤안(書帙几案)도 위치가 방정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온종일 같이 있을 때에도 장중하되 잘난 체하지 않으며, 화평하게 즐기되 친압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 역시 감히 분수 없는 말을 걸어오지 못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를 섬겨 얼굴에는 항상 부드러운 빛을 나타냈으며, 어머니 거상에는 잠깐도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으며, 묘소에 오를 때가 아니면 종자(宗子)의 집에도 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부짖어 이웃 사람들은 귀를 막았다. 어떤 이가 선비의 본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며,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 일뿐이라고 대답하고, 또 일을 살핌에 무엇을 먼저로 삼아야 되느냐고 물으니, 분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고 음식을 절제하고 말을 삼가면 된다고 대답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일용 행사에 있어 남과 너무 다르게 할 것은 없으나 또한 구차히 세속에 부동할 필요는 없으며 평범한 존재로 간단히 수습해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따라 연도(燕都)에 들어가 산천풍물(山川風物)을 구경하면서 당시 명유(名儒)들과 많이 담론하고 수작하였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이덕무의 시격은 평범한 체를 벗어나서 특별한 경지를 열어, 송(宋)ㆍ명(明) 사이에 마땅히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하니, 참으로 분명한 의론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검서(檢書) 22삭(朔)을 거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에 승직되었다가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으로 나갔으며,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ㆍ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를 거쳐 경기도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임명되었다. 적성 현감이 될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고을이 빈약하고 봉록이 박하다.’ 하자 이덕무가 정색하며, “내 본래 서생(書生)인데, 지극히 두터운 성상의 은택으로 고을을 지키며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게 되니, 그 은총이 이에 더할 수 없다. 어찌 감히 다른 것을 말할 수 있으랴?” 하면서 도임하자 즉시 늠미(廩米)를 털어 청사를 새롭게 수리해 놓았다. 청학동(靑鶴洞)에다 조그마한 정자를 지었는데, 노송 백석(老松白石)의 그 깊숙한 정경이 아낄 만하였다. 그 정자에 우취옹(又醉翁)이란 편액을 걸고 조그마한 수레로 홀로 가서 한가로이 소요하곤 하였다. 집안 사람들에게 절용(節用)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주역》에 ‘절제하기를 제도로 하면 재산을 손상하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 하였다. 국가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조그마한 고을임에랴?” 하고, 월름(月廩)을 갈라 매일 지급하는 것을 만들어 미(米)ㆍ염(鹽)ㆍ신(薪)ㆍ채(菜)가 당일의 수량에 넘지 못하게 하였다. 일찍이 고을에 돌아가서 관주(官廚)로 어버이의 감지(甘旨)를 갖추고, 자신은 야채(野菜)로 손을 대접하였다. 그 참된 정의는 넘쳐흘렀다. 그러나 억지로 모용(茅容)의 고사(故事)를 배우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십고(十考)에 가장 으뜸이 되어 다시 들어와 와서 별제(瓦署別提)ㆍ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ㆍ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가 되었고, 사도(司䆃)와 사옹(司饔)은 재임이었다.

이미 해임되어 올라와서는 동마(僮馬)도 없이 항상 여노(女奴)로 하여금 포모(袍帽)를 싸 가지고 따르게 하고 도보로 이문원(摛文院)에 출입하면서 이것이 나의 본분이라고 하였다. 금성(禁省)에 출입한 지 15년 동안 전후 장유(獎諭)의 근념과 석뢰(錫賚)의 은택은 동료들이 감히 바랄 수 없었다.

소시부터 진취(進取)에 등한하여 공령문(功令文) 짓기를 좋아하지 않더니 내각에 선임되고서는 다시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으며 말하기를 “지존께서 친히 내 글을 고평하여 이처럼 과장하니 등과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고 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생 글 보기를 좋아하는데, 오늘날 고관(古觀)에 소장한 어서(御書)를 열람해 보게 되었으니, 할 일을 다했다고 하겠다.” 하였다. 일찍이 상을 모시고 어제(御製)의 문자(文字)를 교정하는데 상의 얼굴을 가까이 대하게 되어 글 소리를 약간 낮추니 상께서 자주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의 글 소리가 좋으니 음성을 높이라.” 하였다. 하루는 상이 이르기를, “네가 늙어간다. 노쇠하기 전에 일대 문헌을 구성하여 은미한 것을 천양하고 후인을 열어 주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상께서 소중히 기대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리하여 이덕무는 물러나와 집안 사람들에게 이를 말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영예로운 총애로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삼가며 검약하여 본성을 바꾸지 않으므로 세상에서는 더욱 그를 칭도하였다. 일찍이 상의 명으로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지었는데 어필로 그 시권(詩卷)에 아(雅) 자를 썼다. 그러므로 드디어 아정(雅亭)으로 자호하였다.

숙인(淑人)은 수원 백씨(水原白氏)로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사굉(師宏)의 딸이요, 충장공(忠莊公) 시구(時耈)의 증손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곧 광규(光葵)요, 두 딸은 유선(柳烍)과 김사황(金思黃)에게 시집갔다. 아, 무관의 풍류문아(風流文雅)는 다시 접촉할 수 없으나, 그 평생의 행적을 보건대 청사유림전(淸士儒林傳)에 오를 것은 의심이 없다. 삼가 위와 같이 찬하여 세상의 입언자(立言者)가 택하기를 기다리노라.



출처 : 이택용의 e야기 - 晩濃
글쓴이 : 李澤容(이택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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