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정공법사 요범사훈의 책 전문이 아닙니다.
책 앞부분을 발췌했으나, 볼 만한 좋은 글귀가 많습니다.
모든 부분을 보고 싶으시면, 책을 구입하셔서 일독을 권합니다.
책에는 명리학인들께서 흥미롭게 생각하실 만한 글이 많습니다.
한 예로 한사람이 한사람에게 선행을 하면 더하기 1 밖에 안되지만
공무원이나 고위관직(ex. 대통령)이 정책을 잘 쓰면, 우리국민 모두에게
공덕과 복덕을 쌓은 것과 같아서 여기에는 더하기 1이 아니라 곱하기 5천만이 된다고
합니다. 즉, 가감승제의 논리가 작용한다고 합니다.
날씨가 덥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분과 같이 복 많이 지어서 복 많이 받으시길
부처님 전에 두손모아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_()_
운명을 세우는 공부(1~7) - 이기화 (서울대 화학과 교수 정년퇴직)
운명의 변화
현재 정토불교를 전 세계에 보급하는데 노력하는 대만의 정공 법사(淨空 法師)의 “운명의 변화 ”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The Pure Land Learning College Association ( Tel:61-7-4673-8756; Fax: 61-7-4673-8764; Email: purelandcollege@yahoo.com.au)에서 출판한 “ Changing Destiny: Liao-Fan″s Four Lessons, A Commentary by Venerable Master Chin Kung ( 2002 )"로서 원래는 대만화장정종학회(華臧淨宗學會)가 출간한 ”개조명운 심상사성 (改造命運 心想事成); 원요범가정 사훈강기( 袁了凡家庭 四訓講記), 정공법사(淨空 法師) 강술(講述)“을 Silent Voices가 영역한 것입니다.
원요범 선생은 중국 명(明)나라의 인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10대에 공(孔)씨라는 도인을 만나 자기 운명에 관한 예언을 들었고 그의 운명이 예언대로 전개되자 인간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 있음을 믿고 인생에 아무런 의의도 두지 않고 별다른 노력 없이 되는 데로 살다가 30대에 당시의 고승인 운곡 선사 (雲谷 禪師)를 만났습니다. 운곡 선사로부터 사람이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의 불교적 가르침을 따라 바르게 살면 스스로의 운명을 개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어 이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자식도 없고 53세로 운명한다는 예언과 달리 40대 후반에 자식 천계(天啓)도 얻고 수명도 74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요범사훈(了凡四訓)은 그가 만년에 자식 천계에게 남긴 글로서 중국에서는 고전(古典)이 되어 많이 읽혀지고 있다합니다. 특히 불교의 많은 고승들이 이 요범사훈을 추천하였고, 최근에도 중국 정토조의 조사인 인광(印光)스님께서 이를 적극 권장하셨습니다. 최근에 대만에서 정공법사의 “ 개조명운 심상사성 ”을 구해온 어느 고마운 분에 의하면 요범사훈은 대만에서 불교에 입문하는 어린이들이 맨 처음 읽는 책이라 합니다.
요범사훈은 국내에서도 “운명을 뛰어 넘는 길-요범사훈”로 불광출판부 (김지수역,2000)에서 출간된 바 있습니다. 이 번역에는 요범사훈 외에도 다른 좋은 글들이 있어 불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번역하는 “운명의 변화”는 요범사훈을 정공법사가 불교적 견지에서 해설한 것으로서 이 중국의 고전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이 책을 만난 후 우리나라 불자에게도 소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아름다운 글을 쓰는 것과는 인연이 먼 사람이라 좋은 번역이 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번역은 영문인 “ Changing Destiny "를 저본으로 하고, ” 개조명운 심상사상 ”과 “운명을 뛰어 넘는 길 “을 참조하였습니다. 역자의 중국어 실력이 아직 많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 Changing Destiny "가 중국인보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이므로 원본인 “ 개조운명 심상사상” 보다 우리나라 불자를 위한 번역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 Changing Destiny "가 대략 36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므로 조금씩 짬을 내어 일주일에 5-10 페이지씩 번역하면 대략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직접 영문으로 읽고 싶으신 분은 출판사인 Pure Land Learning College Association에 연락하면 얻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래 이 기관은 중국 불교의 좋은 서적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무료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혹시 오역이 있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운명의 변화 ”에서 요범사훈이 먼저 소개되고 이에 대한 정공법사의 해설이 이어지므로 요범사훈 부분은 이를 해설과 구분하기 위하여 [ ]에 포함시켰습니다.
저로서는 이 졸역을 이미 유명을 달리하신 저의 부모님과 이제까지 저를 사랑하고 도와주신 모든 분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願以此功德
莊嚴佛淨土
上報四重恩
下濟三塗苦
若有見聞者
悉發菩提心
盡此一報身
同生極樂國
2004. 4. 3.
이 기 화 합장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1 )
이 교훈에서 요범 선생은 그의 아들 천계 (天啓)에게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들을 이야기 한다. 천개가 선행을 하고 나쁜 일을 그치는데 최선을 다하면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조하고 조절하여 더 이상 운명에 속박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요범 선생은 세상 일이 일어나며 바꿔지는 원리를 가르쳤다. 예로서, 정토수행자로서 우리가 이 방법을 따르면 우리는 틀림없이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인생을 보내면서,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공 (孔) 선생의 정확한 예언.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내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공부하기 보다는 의학 (醫學)을 배워서 생활을 하고 남을 돕는 것이 좋다고 설득하셨다. 아마 나는 의학에 정통하여 유명해지고 나에 대한 아버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
옛날 중국에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은 정부 관리가 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과거 시험공부를 안 하는 것은 정부에서 일하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의사의 직업을 갖는 것은 유덕한 생활과 남을 도울 수 있는 기술을 갖는 것이다 ( 이것은 물론 관리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이 당시 선생은 수업료를 요구하지 않고 주는 데로만 받았다. 부자는 많은 수업료를 냈고, 가난한 사람은 적게 냈다. 학생이 진심으로 스승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수업료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안 되었다. 이러한 일은 의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목적은 생명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봉사에 대한 대가는 환자의 처분에 맡겼다. 선생과 의사는 남을 돕는데 헌신하였고 매우 존경받았다.
[ 어느 날, 나는 자운사 (慈雲寺)에서 고귀한 모습의 나이든 분을 만났다. 그 분은 긴 수염을 기른 성자처럼 보였다. 나는 즉시 그 분에게 인사 드렸다. 그 분은 나에게 말했다:
“ 그대는 관리가 될 운명을 타고 났소. 내년에 그대는 학궁 (學宮: 현립학교 )에 진학할 것이오. 왜 시험공부를 안 하오 ? ” 내가 그 까닭을 말씀 드렸다. ]
이 구절은 요범 선생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법을 배우는 기회가 되는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다. 이 구절은 그가 잘생기고 키가 큰 보통 사람과 달리 마치 신선처럼 보이는 한 노인과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범 선생은 자연스레 그에게 인사를 드렸다.
이 노인은 미래를 예견 할 수 있으므로 요범 선생이 될수록 빨리 공부해야 함을 알았다.
[ 나는 이 노인에게 이름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오셨는지 물었다. 그분은 대답하시길 나의 성은 공(孔)씨이고 운남 (雲南)에서 왔소. 나는 점성술과 예언에 관한 매우 정확하고 신성한 책을 물려받았소. 이 책은 소자(邵子)가 쓴 황극수정전 (皇極數正傳)이라고 불리고 있소. 내 생각에는 이 책을 그대에게 물려주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소. ]
소자는 송(宋)나라의 학자였다. 그는 그 당시 매우 존경받는 유명한 지성인이었다. 점성술에 관한 그 신성한 책은 다른 책들과 함께 사고전서 (四庫全書)로 편찬된 심오한 내용의 책이다.
소자의 이 책은 역경( 易經 )의 원리에 따라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 책에서 취급하는 예측은 국가와 세계의 변화 등 광범위한 주제를 포함한다. 왕조의 흥망, 개인의 행 불행 등 모든 것들이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완벽하게 예측될 수 있다. 심오한 지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정확한 과학에 근거하며 논리적이고 신빙성이 있다.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일이 정해진 운명을 갖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것이 인과의 법칙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생각이건, 말이건, 행동이건 하나의 원인을 일으키면, 이에 따라 하나의 정해진 운명의 결과가 발생한다. 오직 우리의 마음에 생각이 없을 때만, 미리 결정된 수학적 결과를 초월할 수 있다. 왜 도가 높은 수행자에게 가끔 이러한 초월이 가능한가? 일심불란 (一心不亂)의 경지에 이르러 이들의 마음에는 어떠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을 가질 때, 우리의 운명은 수학에 구속된다. 고도로 숙련된 사람은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우리의 운명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생은 결정되어 있다. 아라한이나 더 높은 정신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성인들은 이미 육도윤회 (六道輪廻)를 초월하여 운명을 초월할 수 있다.
색계 (色界)나 무색계 (無色界)의 천인(天人)들도 또한 그들의 운명을 초월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들이 깊은 선정(禪定)에 있을 때 수학이 작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은 일시적이다. 일단 이들이 선정의 상태를 잃고 생각을 일으키게 되면, 다시 수학에 구속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들은 결코 육도윤회를 초월할 수 없었다.
만일 이들이 선정의 힘으로 육도( 六道 )를 초월하여 아홉 번째 선정의 경지인 부퇴전(不退轉)의 아라한에 이르면, 이들은 더 이상 수학에 구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일단 이 이치를 이해하고 모든 것이 운명지어졌음을 알게 된다면, 이 세상을 분별없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좋은 상황에서 행복해 하거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행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2 )
[ 나는 공 선생을 집으로 초대하여 어머님께 말씀 드렸고 어머님은 그 분을 잘 모시라고 했다. 우리가 공 선생의 예지 능력을 시험해 봤는데, 큰 일이나 일상생활의 작은 일이건 그 분의 예언은 정확했다. 나는 그 분이 말씀하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다시 시험공부를 시작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사촌과 상의했는데 그는 자기 친구의 집에서 머물며 가르치고 있는 욱해곡 (郁海谷) 선생을 추천하였다. ]
요범 선생은 공 선생을 집으로 초대하였고, 효성스러운 아들이므로 어머니께 이야기 했다.
어머니는 공 선생을 잘 대접하라고 말하고 그를 시험해 보자고 했다. 누군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면, 보통 믿기 전에 그 말이 맞는 가 확인해 본다. 요범 선생이 이렇게 해보니 공 선생의 예언이 정확했고 따라서 그를 믿게 되어 그의 조언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 공 선생은 나를 위해 몇 가지 더 계산을 하였다. 그 분은 내가 현(縣)에서 보는 동생(童生)고시(考試)에 14등을 하고, 부(府)에서 보는 고시에는 71등을 하고, 성(省)에서 보는 제학(提學)고시에는 9등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 해에 나는 이 세 시험에서 공 선생이 예언 한 석차 (席次)를 했다. ]
공 선생은 요범 선생이 몇 개의 시험을 거쳐 선비가 되리라 말했다. 두 번째 해에도 시험 결과는 예언한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 요범 선생에 관한 공 선생의 예언에서 우리는 모든 일이 미리 결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매일, 매월 우리가 언제 어떻게 살고 또 언제 우리가 어떻게 죽으리라는 것들이.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보통 사람들은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나는 다시 공 선생에게 내 남은 인생에 대하여 예언해 주기를 부탁드렸다. 공 선생은 계산 후 내가 이러 이러한 해에 이러 이러한 시험에 합격하고 어떤 해에 품생 (稟生)이 되고 어떤 해에 공생 (貢生)으로 승진하고, 나중에 사천성(四川省)의 대윤 (大尹)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이 지위에 3년 반 근무한 후,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오게 되어있다. 나는 53세 되던 해 8월 14일 축시 (丑時 )에 죽게 되어있다. 불행하게도 자식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분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잘 기록하고 기억하였다.
모든 시험 결과는 예언대로 나타났다. 공 선생은 또 내가 봉급으로 모두 쌀 아흔 한가마 다섯 되 ( 91 石 5 斗 )를 받은 후에야 승진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내가 일흔 한가마 (71 石 )를 받자 도종사 (屠宗師)가 내 승진을 추천하였다. 나는 속으로 예언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종사의 후임이 이 승진을 기각하여 결국 예언이 맞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새로 부임한 은종사 (殷宗師 )가 내 시험 답안을 보고 “ 이 다섯 답안은 황제에 올린 보고서로 훌륭하다.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비를 묻혀둘 수 있겠는가 ? ” 하고 탄식하였다. ]
요범 선생의 봉급이 거의 71 가마에 이르렀을 때, 도종사는 그의 승진을 인가하였다. 료범 선생은 예언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도종사가 승진하였거나 아니면 전출되어 떠난 후 그 후임으로 온 사람이 요범 선생의 승진에 반대하여 이를 취소하였다. 수년이 지난 후 다른 사람인 은종사가 시험에 불합격된 답안지를 검토하였다. 이러한 답안지들은 보존되어 가끔씩 실수로 빠뜨린 재능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재검토된다. 그는 요범 선생의 답안지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정부 관리가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로 잘 쓰여 졌다고 말했다. 분명히 요범 선생은 매우 박식하였고 그의 답안지는 아주 잘 쓰여 졌다.
[ 새 종사는 현감에게 내가 그의 권한으로 공생 (貢生)이 되도록 공문을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이 복잡한 승진 후에 내가 계산해보니 정확히 91 가마 5 되를 받았다. 이 때부터 나는 승진이건 강등이건, 부자가 되건 가난해 지건 모두 때가 되면 이루어지고 사람의 수명도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나는 모든 일을 초연하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소득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
우리는 도종사가 특출한 인물로서 요범 선생의 답안지를 읽자마자 그를 승진 시키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후임은 승진을 기각하였다. 이 일은 단지 두 사람의 견해가 달랐던 경우이다.
요범 선생은 분명히 매우 유능하였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비록 유능한 사람일 지라도 어쩔 수 없이 운명에 묶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운명이건, 시간이건, 원인이나 조건이건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 요범 선생은 다른 관리가 와서 그의 답안지를 읽어 승진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상황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때부터, 요범 선생은 깨달았고 진실로 이해하였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일 들이, 행운이건 불운이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부자가 되건 가난하게 살건, 모두 운명 지워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바꿀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면, 아무리 그것에 집착해도 오랫동안 그것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받도록 되어있는 것을 자연스레 받게 된다. 자기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나쁜 짓을 하고 모든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니, 요범 선생은 무얼 구하거나, 이익이다 손해다 하는 생각을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 그는 진실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지금 우리는 그가 대표적 “ 보통 사람 ”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날 사람들은 “보통” 이라는 이 기준도 가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어지러운 생각들로 차 있기 때문이다. 요범 선생은 이미 그의 일생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었으므로 무엇인가를 바라는 망념(妄念)을I 갖지 않았다. 옛날 현인들은 군자(君子)는 모든 것이 “한 모금 마시거나 한번 씹는 것”도 미리 정해짐을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몫으로 이미 정해진 것들을 혹독하게 추구한다.
보통 사람들은 운명의 구속을 받는다. 이 단계에서 요범 선생은 단지 인생이 운명 지워졌음을 알았을 뿐이다. 그는 여기에 변수 ( 變數 )가 있어 진실한 원리와 방법에 따라 수행하면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아직 몰랐다. 이러하면, 그가 자기 미래의 주인이 되어 바라는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로서, 우리가 부자가 되고 싶으면, 재보시(財布施)를 실천한다. 총명하고 지혜롭기를 바라면, 법보시(法布施)를 실천한다. 건강하고 오래 살기를 원하면, 무외보시(無畏布施)를 실천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기 위한 정확한 방법이다. 올바른 원리와 방법을 따름으로서 우리는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행복은 말할 필요도 없고 최상의 깨달음까지 얻을 수 있다.
[ 공생 (貢生)이 된 후에, 나는 북경에서 일년간 공부하도록 되어있었다. 서울에 일년간 머무는 동안 명상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자랐고 가끔씩 아무런 생각도 없이 침묵 속에 앉아 있곤 했다. 나는 책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고 전혀 공부도 하지 않았다. ]
요범 선생은 이제 매일 명상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평화롭고 조용해 졌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조용해지면 지혜가 자연스레 일어난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 요범 선생은 그의 전 미래를 알았음으로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조차 쓸데없음을 알았다. 바라는 생각이 없으므로, 그의 마음은 자연히 안정되었다.
“ 운명의 변화에 대한 운곡 선사 ( 雲谷 禪師 )의 가르침 ”
운명 변화의 원리
[ 그 다음 해에 나는 남경에 갔다. 그 곳에서 국자감 (國子監)에 입학하기 전에 나는 서하산 (捿霞山)의 존경받는 선사인 운곡(雲谷)스님을 찾아뵈었다. 우리들은 사흘 밤낮 자지 않고 마주 보면서 선방에서 좌선하였다.
운곡 선사가 말했다: “ 보통 사람들이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망념(妄念)때문이다. 우리가 사흘 동안 좌선하면서 나는 당신에게 단 하나의 망념도 일어나지 않음을 보았다. 무슨 까닭인가? ”
나는 공 선생이 내 일생에서 일어 날 일들을 정확히 예언하였음을 말씀드렸다. 나는 수명, 사망, 승진과 실패 등이 이미 정해졌음을 알았다. 따라서 나로서 무엇인가 별달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선사는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을 호걸 (豪傑)로 생각했었다. 그런대 알고 보니 당신도 그저 보통 사람이군! ]
요범 선생과 운곡 선사는 사흘 동안 선방에서 서로 마주 보면서 자거나 피로해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어쩐 일인가? 그들에게는 어떠한 망념도 일어나지 않아 모든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운곡 선사는 료범 선생이 매우 젊은 나이에 이 어렵고 드문 수행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망념들을 가지므로 아라한이나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다. 화엄경에 말씀 하셨다. “모든 중생이 부처와 같은 지혜와 덕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망념과 집착 때문에 이를 증득(證得)할 수 없다.” 따라서 성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망념 때문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3 )
[ 운곡 선사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되어 설명을 부탁드렸다. 그분은 보통 사람들은 망념과 비실재적 생각들이 그 마음을 영원히 차지하여 그들의 일생이 불가피하게 운명의 수학에 구속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운명이 존재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나, 오직 보통 사람만이 이에 구속된다.
운명은 지극히 착한 일을 한 사람이나 지극히 나쁜 짓을 한 사람을 구속할 수 없다. 나는 공 선생이 예언한 데로 살아왔고 내 인생을 바꿔 보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의 운명에 구속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전형적인 보통 사람이었던 것이다. 놀란 나머지 나는 운곡 선사에게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분은 대답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행복하게 살 수 있소. 이것은 진실한 가르침이며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찾아볼 수 있소 ]
운곡 선사는 만일 사람이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아직껏 운명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운명의 지배를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범 선생은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는가? 아니다. 그는 단지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여태 망념들을 가졌다. 그는 여태 생각하였다: “나는 아무것 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 운명은 이미 예언되었고 나는 내 전 일생을 분명히 알고 있다.” 아직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 구속된다.
이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들은 깊은 선정 (禪定)에 이를 수 없다. 선의 조사(祖師)인 황벽(黃檗) 스님이 이런 깊은 선정에 있을 때, 그는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깨뜨릴 수 있었다. 이 때,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이 분명히 보였다.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도 수학을 이용하여 미래를 추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는 없다. 미래를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는 깊은 선정이 요구된다. 이 상태는 소승불교에서 성인의 제 3단계인 아나함(阿那含)을 넘어선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운명이 보통사람들은 구속하지만, 수많은 선행을 쌓은 사람이나 극악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지배할 수 없음을 가르쳤다. 요범 선생은 공 선생의 예언에 20년 동안이나 묶여있었다. 그는 이 예언을 바꾸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실로 한 사람의 보통사람에 불과했다. 위대한 공덕을 쌓은 사람들은 정해진 운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를 바꾸었다. 이 원리는 극악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어 이들의 운명도 또한 바뀌었다. 우리들은 요범 선생이 그의 일생이 예언과 완전히 들어맞았음으로 어떠한 지극한 선행이나 악행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운명이 변화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 그렇다. 피하는 것은 초월하는 것이다. 정수(定數)들 안에 변수 (變數)들이 있는데, 공 선생은 이 변수들을 몰랐거나 아니면 이를 계산할 줄 몰라, 단지 정수들만 예측한 것이다. 이 변수들은 우리들이 조정할 수 있으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운명을 개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행운을 찾을 수 있다.
선사를 만날 때까지 료범 선생은 이 변수들을 몰랐다. 선사는 정수들이 존재해 미래가 계산될 수 있음을 믿었을까? 그렇다. “사람이 망념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그는 운명에 구속된다.” 운곡 선사는 미리 운명이 정해짐의 실재성을 완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미리 운명이 정해짐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운명을 개조함에 관한 것이다. 오직 우리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이일을 이룰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어떤 다른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이일을 해 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개조하여 행운을 찾는다” 요범 선생이 학자임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알았고, 따라서 선사는 그를 깨우치기 위하여 시경 (詩經)과 서경 (書經)에서 그 원리들을 인용하였다. 운곡 선사는 이 가르침들을 이해했고, 중요하고 진실임을 확인해 주었다.
[ 불교의 가르침에 우리가 부귀 (富貴), 아들 딸이나 장수(長壽)를 원하고 찾으면, 이를 얻을 수 있다고 쓰여 있소. 부처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가장 큰 범계 (犯戒)의 하나라고 말씀 하셨음으로, 우리들은 부처님이나 보살님 들이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음을 믿을 수 있소. ]
불자로서 우리들은 부를 구하면 부를 얻고, 자식을 구하면 자식을 얻게 됨을 배운다. 비록 금생에 우리가 자식을 갖지 못할 팔자라도, 선행을 닦음으로 자식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요범 선생이 장수할 팔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53세에 죽을 운명 이었다 ( 그러나 그는 74세 까지 살았다 ). 가르침에 따라 수행함으로서,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불교는 우리들로 하여금 운명에 속박되기 보다는 그것을 개조하도록 격려한다.
현존한 장가 (章嘉) 큰 스님은 말씀 하셨다: “ 불교에서 우리의 모든 진실한 바람은 이루어진다. ” 그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원리와 방법을 이해하고, 이에 따라 무언 가를 구하면, 우리의 진실한 바람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가 가르침에 따르고도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업장(業障)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이 업장들을 말끔히 지워버리기만 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장가 큰 스님이 말씀 한데로 올바르게 구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일단 기본적인 원리들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들은 이 세상과 이를 초월하는 세계의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그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변화함을 알게 된다 (唯心所現, 唯識所變). 우리가 부처되기를 추구하면 부처가 된다. 하늘나라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면 하늘나라 사람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을 따른다. 화엄경에 “법계의 성품이 모두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 짐을 보라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라고 이르셨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방법은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이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 따라서 변화하는 원리에 부합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들은 합당하고 완벽하다. 만일 우리가 이 가르침에 따라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기를 구하면 이를 얻을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 경우,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이 큰 야심 없이 단지 명예, 부귀만 구했음으로 이와 연관된 원리와 방법들만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운곡 선사는 그에게 거짓말이 불교에서 가장 나쁜 범계 (犯戒)의 하나임을 일러주었다. 네 가지 기본 계(戒) 즉 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사음이 있다. 불망어가 이 계 중의 하나인데 어떻게 부처님이 우리를 속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사가 우리가 자식, 부, 또는 장수 (長壽)를 구하여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이는 진실을 이야기 한 것이다. 우리는 요범 선생이 선사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실천하여 그가 구한 것들을 얻게 됨을 보게 될 것이다.
[ 나는 선사께 맹자(孟子)가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구하는 것이 내 안에 있다 “ 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내적인 성품 즉 도덕인의 (道德仁義)를 말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수행의 목표로 삼아야 할 모든 가치들이다. 그러나 만일 외부적인 요소들 즉 부귀, 명예 등에 이르면 우리가 이것들을 어떻게 구하여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선사는 맹자가 옳고, 단지 내가 그 뜻을 잘못 이해했다고 말씀하셨다. ]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본래 지닌 성품을 향상하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명예나 부귀를 구할 것인가? 비록 이것 들이 외부적 혜택일지라도 구하여 얻을 수 있다. 만일 이것 들은 운명 지워진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구해도 소용없는 짓으로 보일지 모른다. 이것이 운명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로서 미리 결정된 상수 (常數)로 보는 것이다 (宿命論). 이 상수는 우리가 전생들에서 만든 원인이고, 그 결과는 우리가 금생에서 받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상수들 속에 변수 (變數) 들이 있고, 변수들이 추가되면 결과가 바뀌게 됨을 모르고 있다. 부귀와 명예는 분명히 얻을 수 있다.
[ 운곡 선사는 선종의 6조인 혜능(慧能) 대사께서 “모든 복전 (福田 )은 우리의 가슴 속에 있다. 만일 사람이 내부의 참 마음으로부터 구하면 원하는 모든 것과 통할 수 있다” 라고 가르쳤다고 말씀했다. 우리의 내부에서 찾음으로서 우리는 비단 내적인 덕성인 도덕인의(道德仁義)등을 얻을 뿐만 아니라, (외적인 혜택인 ) 부귀, 명예 등을 얻게 된다. 내적인 덕성과 외적인 혜택을 같이 얻을 수 있음은 참으로 귀중하다. ]
우리가 어떤 것 즉 우리 밖의 물질이나 우리 안의 덕성을 얻고자 할 때, 우리 안에서 즉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밖에서 찾아 봤자 소용없다. 왜냐하면 외부적 요소는 상수임으로 변할 수 없다. 마음은 변수임으로 변할 수 있다. 20년 동안 보통사람들에 비하여 요범 선생의 마음은 청정했다. 변수들을 몰랐음으로 그의 마음은 상수들과 완전히 부합하였고, 그의 일생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예언한대로 전개되었다.
운곡 선사는 찾는 것이 우리 안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도덕인의(道德仁義)는 내부에 있고 공덕의 수행이다. 명예와 부귀는 외부에 있고 인생의 즐거움이다. 이 두 가지 혜택을 입을 수 있음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화엄경에 설했듯이, “이치와 현상에 장애 없는 것 (理事無碍)” 이 궁극적이고 완벽한 즐거움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일이 우리 원하는 데로 완벽하게 이루어져, 우리가 모든 일에 만족한 경우이다. 이것이 해탈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비롭고 고귀한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불가사의한 결과들을 얻을 수 없다면, 수행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불교는 부정적이지도 않고 피동적이지도 않다. 아니 두드러지게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실용성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불교는 무엇인가 확실히 성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실용적인 것이 없다. 우리가 그 혜택을 입으려면 불교의 중요성을 이해함이 긴요하다. 사실 사람들은 불교를 오해하여 그 혜택을 놓쳐 버렸다. 만일 우리가 그 혜택들을 체험할 수 있다면, 모든 가르침 중에서 불교가 가장 수승하고 심오하고 완전한 가르침임을 알게 될 것이다. 불교는 결코 시대에 뒤 떨어진 것이 아니다. 불교는 3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적절하고, 동양이나 서양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하다.
[ 운곡 선사는 만일 사람이 안으로 자기 마음을 돌이켜 보지 않고 밖으로부터 맹목적으로 명예, 부, 장수 등을 구하면, 아무리 별 수단을 다 부려도 기껏해야 이미 운명 지워진 것들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했다. 밖으로부터 구하면 마음의 청정도 이미 받도록 운명 지워진 것도 다 잃어버릴 수 있어, 구하는 것이 무위로 끝나게 된다. ]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은 다면 우리가 그것을 얻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운명인 것을 얻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하튼
우리가 가지도록 예정된 것을 갖게 됨으로 그 시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주식시장에서 수백만 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단지 그들이 받도록 예정된 것을 받았을 뿐이다. 돈 벌 운명이 아닌 사람들은 주식시장에서 결국 돈을 잃게 된다. 누구나 다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박에서 번 돈도 도박사가 벌게 예정되었던 것이다. 도둑까지도 훔친 것을 갖게 예정된 것이다. 만일 그가 훔친 것을 가질 운명이 아니었다면, 그는 도둑질에 실패했을 것이다. ( 만일 그가 훔치지 않았다면, 그 물건들은 다른 경로로 그에게 왔을 것이다 )
옛 사람들이 군자(君子)는 분수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인(小人)이 그러기 위한 노력은 가치가 없다. 왜냐? 각자가 상수인 그의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이치를 이해할 수 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행복한 인생을 즐기며, 사회는 안정되고, 세계는 평화롭고, 더 이상 갈등이나 전쟁이 없을 것이다.
불교는 우리 인생에서 운명 지워지지 않은 것을 상수 밖에서 찾으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찾아서 얻는 것은 변수에서 온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안으로부터 이다. 우리는 아직껏 그 이치를 몰라 안으로부터 깨달음을 찾아 큰 공덕을 이룰 수 없었다. 우리들은 밖에서 찾고 있었다. 매일 계책을 꾸미고 노력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길을 따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방법, 계획, 수단을 가진다 해도 단지 우리가 단지 얻도록 운명 지워진 것들만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얻은 모든 것들은 운명 지워졌고, 우리들의 상수들이다. 요범 선생은 이러한 상수들이 존재함을 알았음으로 걱정하거나 무리해서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운명을 알았다. 그는 어떤 망상(妄想)을 일으키거나 어떤 수단을 써도 그것이 예정된 것이 아니면 실패할 것임을 알았다. 밖에서 찾으면, 우리의 마음이 더렵혀져 전적으로 당황하게 되고 단지 우리가 갖도록 운명 지워진 것 들 만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구하는 것이 좌절될 때, 우리 마음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20년 동안, 요범 선생은 공 선생의 예언 만 따랐다. 그는 청정한 마음과 만족한 상태를 유지해 왔다. 그는 모든 것이 운명 지워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어떤 것을 구하려는 바람이 없었다.
밖에서 무엇인 가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과 경험이 요범 선생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불안정한 마음으로 고통스러운 일생을 마친다. 그들이 무엇을 얻을 지라도, 그것 들은 얻도록 예정된 것들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슬프게도 안과 밖 모두에서 잃어버린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4 )
운명을 바꾸는 방법
과오를 인정하라
[ 운곡 선사는 내 남은 생애에 대한 공 선생의 예언을 물어보았다. 나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씀드렸다. 그 분은 내가 관리가 되거나 아들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내 과거 행적과 태도를 돌이켜 보고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대답했다. 관리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복상 (福相)을 가졌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또한 나는 덕을 쌓아 복을 이루는 일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성질이 급하고 도량도 좁고, 다른 사람들을 억 누르면서 내 지능과 능력을 자랑하곤 했다.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자제함이 없이 말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박복(薄福)과 부덕(不德)의 증거였다. 어찌 내가 관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
운곡 선사는 이 의문에 관하여 직접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요범 선생에게 질문을 던져 그가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아 과오와 괴로움의 원인을 찾고, 자기가 관리가 될 수 있는지, 자식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해 보도록 가르쳤다. 물론, 운곡 선사와 요범 선생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는 이 두 의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나, 요범 선생에게는 이 두 의문이 가장 중요했다. 나머지 일들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요범 선생은 운곡 선사가 물은 것을 오래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가 관리가 되거나, 자식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지인 유 ( Xiyin You )선생은 요범 사훈에 관한 그의 주석서(註釋書)에서 요범 선생의 정직함에 대하여 “정직이야 말로 공덕을 이루는 초석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과오를 감추거나 얼버무리고 실수를 덮어버린다면, 어떻게 그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우리가 정직하여 자비로운 선생들을 만나면, 그들이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한다. 만일 우리가 정직하지 않고 교만하면, 그 들은 웃을 뿐 우리에게 진지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요범 선생은 그의 과오를 깊이 뉘우쳤고, 바로 이 점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열쇠가 되었다. 그는 운곡 선사에게 그에게는 관리가 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복상(福相)이 없으므로 관리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서민들은 복이 없는 관리의 지배를 받으면 고통을 당하나, 복이 있는 관리를 만나면 이익을 얻는다.
고대 사회제도를 조사해 보면, 우리는 공부를 하여 합리적인 사람들은 다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떤 황제들은 매우 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예로서 당태종 (唐太宗) 태종은 매우 박식하고 도량이 커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물었다: “황제가 되는 게 뭐가 그리 좋은가? 무거운 책임을 안게 된다. 만일 당신이 원하면 내 자리를 차지하라.” 황제로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압하기 위하여 그의 지위를 즐기거나 이용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봉사하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더욱 잘 봉사하기 위하여, 그는 유능한 사람들을 찾아 제국(帝國)을 위하여 일 하도록 하였다.
모든 선량한 관리들은 복상을 지녔다. 이 당시 요범 선생은 박복(薄福)하여 복덕을 쌓을 수 없었거나 그럴 생각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관리가 될 상이 없었고, 백성을 지도하거나 봉사하기에 부적당 하였다.
다음에, 요범 선생은 그에게 매우 성미 급하고, 도량이 좁고, 무절제한 3가지 중대한 과오가 있음을 이야기 했다. 성미 급하고 심술궂으면 박복의 상을 받는다. 마음이 좁으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나쁜 성질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잘 관리할 수도, 이끌 수도 없게 되거나, 공정하게 봉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그가 방종했고 자신의 지능을 과시하기를 좋아했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했다. 이 것 또한 타인들이 쉽게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말을 했고, 다른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결점들이 행운보다 불행을 가져왔다.
진실로 행운을 가진 사람은 친절하고, 정직하고, 관대하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조용하고 권위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권위가 없으면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킬 수 없다.” 오직 권위가 있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때,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교섭할 수 있다. 요범 선생은 그가 젊었을 때, 침착하지도 않고 품위도 없었음을 인정하였고, 바로 이점이 그의 불운(不運)의 한 이유가 되고 따라서 관리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 옛말에 ” 땅이 더러워야 생물이 많고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적다 “고 했습니다. 제가 자식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첫째 이유는 결벽증(潔癖症)입니다. 둘째 이유는 온화함이 생명을 양육하는데, 저는 화를 잘 냅니다. 셋째로, 자애(慈愛)가 다산(多産)의 원인이 되고 사나움이 불모 (不毛)의 원인이 되는데, 저는 저의 명예에 이기적으로 집착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넷째 이유는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하여 정력을 지나치게 소모합니다. 다섯째로, 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십니다. 여섯째로, 저는 가끔 밤을 새우는 일이 있어 정력을 소모하여 자식을 갖지 못 했습니다. 이 외에도, 저에게는 다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점이 있습니다. ]
물고기들은 대체로 맑은 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 물고기들이 보이면 쉽게 붙잡힐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말은 또한 더러움 없이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요범 선생은 불결한 것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청결하고 깔끔함은 좋은 성품이다. 그러나 지나치면 강박증(强迫症)으로 된다. 조그만 더러움도 용납하지 않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점이 그가 자식을 가질 자격이 없는 이유의 하나이다.
온화함은 가정이 번영하는데 도움이 되고, 친절함은 건강에 이롭다. 요범 선생의 나쁜 기질은 그가 부자가 못되어 그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금만 비위가 상해도 화를 내고 불쾌한 것을 전혀 참지 못 했다. 이렇게 처신해서 그는 불행해 졌고 이점이 그가 자식을 가질 자격이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자애(慈愛)는 남을 보살피는 마음이다. 요범 선생은 이 원리를 알았으나, 이에 따라 처신할 수 없었다. 왜냐? 그는 매우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과대평가하고 남을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 점이 그가 자식을 가질 자격이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또한 그는 너무 말을 많이 하여 정력을 많이 소모하였다. 요범 선생은 그가 자식을 갖지 못한 여섯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처음 세 가지 이유들은 결벽증, 화를 잘 내는 것, 그리고 자애심이 없는 것 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의도(意圖) 또는 마음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다음 세 가지 이유들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술을 마시고, 밤잠을 자지 않는 것 들이다. 이 것들은 행위 또는 몸에 관계된 것 들이다. 그는 말하고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남의 실수를 입방아 찧고 남과 잘 다투었다. 이것들은 몸을 해치고 정력을 고갈시킨다. 그는 또한 과음하기를 즐겼고, 이 것은 마음을 해치고 정신을 피로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그는 친구들과 밤새우며 이야기하고, 마시고, 즐기며 그의 건강을 돌보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아 자식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너무 많은 나쁜 습관과 결점을 가진 것을 알아차리고 요범 선생은 그의 모든 잘못된 행동을 솔직히 인정하고 후회하였다. 자기의 모든 과오를 숨김없이 인정하는 것이 후회하는 것이고 업장을 지우는 것이다. 이 일은 진실하게 해야 효과가 있다. 깨달음은 우리가 우리의 과오를 알아낼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수행은 우리가 우리의 과오를 알아차리고 이들을 교정했을 때 성취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실수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진실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첫 단계는 우리의 나쁜 습성을 알아내는 것이다. 요범 선생은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운곡 선사가 한번 묻자, 주의 깊게 반성하고 그의 모든 결점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리하여 그 때부터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는 이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렇게 할 수 없을까? 우리의 나쁜 습관을 전혀 모르고는 물론 우리는 그것을 고칠 수 없다. 요범 선생은 반성하여 찾아내고 그의 모든 부적절한 행동을 교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구하는 것을 얻었다. 안으로는 덕스럽고 친절한 행동을 그리고 밖으로는 부와 자식을 얻었다. 그는 밖으로부터 찾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대자비 보살 앞에 자식, 명예, 그리고 부를 구하기 위해 절하고 향을 사르는 것을 보지 못 했다. 그러나 오늘 날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단지 맹목적인 예배의 형식을 통하여 구한다. 그들은 원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찾지만, 단지 형식만을 취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어 실패하고 만다.
밤낮으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운명에 의하여 이미 받도록 확정 된 부와 자식을 얻으려고 절에 가서 촛불을 키고 향을 사름을 보게 된다. 무지하여 그들은 그들이 얻은 것은 하늘의 은총에 의하여 허락된 것이라 생각한다. 수행자들은 진실을 이해하고 가르침에 따라 구해야 한다. 운곡 선사가 말했듯이 안과 밖에서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5 )
[ 운곡 선사는 말씀하셨다: 당신 말대로 라면, 명예나 자식뿐만 아니라 당신이 평생토록 받을 자격이 없는 다른 것들이 많이 있다 ! . 금생에 수백만 금(金)을 가진 사람은 과거에 그만한 돈을 가질 공덕을 쌓았다. 수천 금(金)을 가진 사람은 그만한 돈을 가질 공덕을 가진 것에 틀림없다. 굶어죽는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죽게 예정되어 있다. 오늘 우리가 받는 업의 결과는 단지 우리 행위의 과보이고 외부의 힘과는 무관하다. ]
선사의 충고는 매우 중요하고 단지 미신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미혹해서 성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안에서 정직하게 반성하도록 했고 이리하여 그가 스스로 많은 자기 과실(過失)을 찾아내도록 했다. 가장 큰 공덕은 우리가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알아내어 고치는 것이다.
무수한 성인들에게 공물(供物)을 바치는 것은 또한 큰 공덕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량수경(無量壽徑)으로부터 미혹을 돌이켜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더 좋다고 배운다.
수행은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옛날 성인들은 회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그 자신이 일생에서 비단 자식이나 벼슬 말고도 스스로 가질 자격이 없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음을 지적했다.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관리가 되는 것은 전생에서의 수행하고 공덕을 쌓은 결과이다. 우리가 수 백만금을 가지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갖기 위 하여는 그에 상응하는 조건이 갖추어 져야 한다. 이것들은 마구잡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금생에 부자가 되기 위 하여는 전생에 남에게 많은 재물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억지로 우리에게 부를 가져올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고 들면 재앙과 불행이 다가온다.
“화(禍)와 복(福)도 이유와 조건 없이 오지 안 는다. 우리가 그들을 불러오는 것이다.”
중국 문자를 발견한 옛 사람들은 매우 지혜로웠다. 복(福)과 화(禍)의 두 글자는 조금 다를 뿐이다. 이 점은 조그만 어긋남이 커다란 잘못을 가져옴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명예, 부귀를 가르침에 따라 구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수백만 금 ”은 상류층의 부를 나타낸다. “수천 금”은 중류층의 부를 나타낸다. 전생에 심은 선인 (善因)들에 의하여 사람들은 큰 부자가 되기도 하고 보통 부자가 되기도 한다. 굶어 죽게 된 사람은 전생에 수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다. 인색해서 그들은 남에게 베풀지 않았다. 오늘날 불행하게도 수많은 이런 사람들이 조그만 선행이나 배품도 하지 않으려 한다. 남에게는 베풀도록 권유하면서 그들 스스로는 자신의 권유에는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내생에 궁핍해 질 것이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
우리들의 일생은 외부의 힘에 지배되지 않는다. 선사는 하늘도 나쁜 사람들을 그들이 받을 만큼 이상의 고통으로 벌주지 못하고, 착한 사람도 받을 만큼 이상의 행운으로 보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의 진정한 원인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다. 하늘은 우리를 위한 어떠한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참된 지혜로서 우리는 진리를 볼 수 있다. 부(富)와 귀(貴)도 빈(貧)과 천(賤)도 모두 우리 안에 있다.
[ 예로서, 어떤 사람이 백 세대까지 지속할 공덕을 쌓았다면, 그는 백 세대에 이르는 자손들을 갖게 될 것이다. 십 세대까지 지속할 공덕을 쌓았다면, 십 세대의 자손들이 그 복을 누리며 살 것이다. 2 내지 3 세대에 지속하는 공덕도 마찬가지이다. 자손이 없는 사람들은 공덕이 너무 적은 것이다. ]
이 이야기는 자식을 갖거나 못 가질 운명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손들이 백 세대가 지속할 공덕을 쌓았다면, 백 세대의 자손을 가질 것이다. 인광 (印光)대사는 자주 공자 (孔子)께서 자손들이 백 세대에 지속할 공덕(百世之德)을 쌓았다고 찬양하셨다. 공자는 자기 생각은 조금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나라와 백성에 이로운 일 만을 생각하였다. 그분은 일생을 교육에 바쳤고, 자기의 이상과 희망을 제자들에게 전하였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육자였다.
지금까지 70 세대가 넘는 공자의 자손이 지속되었고, 현세의 그 자손인 공 덕성 (孔 德成) 선생은 아직도 전 세계에서 존경받고 있다. 비단 중국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가 공자의 자손임을 들으면 그를 공손하게 대하고 존경하고 따뜻하게 환영한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좋은 씨앗이나 원인을 심으면 좋은 수확이나 결과를 얻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요범 사훈에서 우리는 우리가 십 세대가 지속할 공덕을 쌓으면, 십 세대의 자손들이 그 복을 누리며 살게 됨을 읽게 된다. 중국 역사를 통하여, 황제들이 십 세대동안 지속된 청 (淸)나라처럼 많은 세대에 걸쳐 지배할 수 있는 왕국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조상들이 충분한 공덕을 쌓지 않았다면 이 것은 불가능했다.
오늘 날 사람들은 이 것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필요한 것은 능력, 권모술수(權謀術數), 그리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이 쌓은 공덕과 전생에서의 우리의 덕행(德行)이 결합하여 그 결과로 덕 있는 사람들이 우리 가문에 태어나 대가 이어 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가족의 사업이 몇 세대까지 지속되는 것인가? 대만에 동인당(同仁堂)이라는 북경에서 시작된 약국 연쇄점이 있다. 이 약국은 조상들이 쌓은 공덕으로 대를 물려가며 백년 이상 영업 중이다. 생명을 구하겠다는 염원으로 자비심 많은 선조들이 이 약국을 세웠다. 이익을 바라지 않고, 이 들은 단지 매우 검소하게 살 수 있음만큼 벌기를 원했다. 이들의 목적은 안락한 생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롭게 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 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이들은 백년 이상 지속하는 사업을 새울 수 있었다. 만일 후손들이 선조들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 약국은 영원히 지속할 것이다. 이들은 공덕을 쌓지 않아 수년 만에 사업이 파산되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2-3세대의 자손들만 지속될 공덕을 쌓았을지 모른다. 중국 사람들은 불효의 세 가지 죄 중에 가장 큰 것이 자식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공덕이 없으면 후손이 끊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부부들이 너무 귀찮을 것 같아 자식 갖기를 원치 않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회 복지제도가 있다. 누가 노인들을 보살피는가? 국가가 보살핀다. 늙어서 그들의 생활을 의지할 자식들의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많은 부부들이 자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이들은 60대에 은퇴하여 매월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오늘 날에는, 노인들이 생계를 자식들에게 의존했던 과거보다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있어 이 일이 가능하다. 지금은 더 많은 정부가 노인들을 보살피고 있다. 이 제도가 많은 자식들 보다 더 효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 자식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과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 흉년에 대비해 곡식을 저장하는 것처럼, 노년을 위해 자식을 기른다 ” 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우( 尤 ) 선생은 그의 논평에서 “이 세상을 초월하는 성인들은 욕망과 집착을 끊고, 미혹을 깨뜨려 지혜를 얻고, 범인의 경지를 떠나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을 가장 큰 공덕의 수행으로 생각하였다. 불행이도, 이 경지의 수행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노년을 위하여 자식들을 기른다는 생각은 오늘 날까지 아직 존재한다. 보통 젊은이들이 발심(發心)하여 비구나 비구니가 되고저 할 때,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전력을 다해 만류한다. 이해를 못하고, 이들은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근심이라 생각한다. 불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들여다보고,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이해한다. 보통사람들은 오직 우주의 조그만 부분만을 본다. 이 부분에서, 그들은 오직 인간의 영역만을 보았을 뿐이다. 이 영역에서 그들은 오직 현재만 본다. 그들은 과거나 미래를 보지 못 하므로, 부처님이나 보살처럼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비구나 비구니가 될 때, 훌륭한 일 이므로 참으로 가장 기뻐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비구나 비구니들은 세속적인 삶을 버리는데 진지하게 수행해야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이루지 못하면 3악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가끔 쌀 한 톨 공양이 수미산만큼 크고 금생에 생사의 윤회를 초월하지 못하는 비구나 비구니는 ( 내생이나 그 다음 생에서 ) 짐승처럼 일 하여 그 빚을 갚게 된다고 말한다.
정토 수행자로서, 우리들은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하고 육도 (六道)를 초월해서 정토에 왕생해야 한다. 소승불교 수행자들은 최소한 여러 가지 삿된 견해를 끊어버린 입류(入流)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 경지는 소승 불교 4 성인의 단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른 수행자는 일곱 번 더 천계와 인간계를 거듭 태어나게 된다. 이리하여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이들은 아라한과를 얻게 된다. 그러나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음으로서 그들은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대승불교에서 성취의 최소 기준은 우리가 집착의 일부를 벗어나고, 88 종류의 삿된 생각과 견해를 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것들을 끊을 수 없다면 성취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을 끊어버리는데 성공한 대승불교 수행자들이 초신위(初信位)에 이른다. 여러 가지 삿된 견해를 끊어버린 소승불교 수행자들이 입류의 경지에 이른다.
이러한 성취 없이는, 우리는 여전히 우리들이 진 빚을 갚으면서 끊임없이 육도에 환생한다. 비구나 비구니에게는 이 것은 우리가 비구나 비구니 때 전 우주로부터 받은 모든 공양을 하나하나 갚아야 함을 의미한다. 비구나 비구니에게 수행자들이 바친 공양은 모두 보상을 바라고 주어졌다.
만일 소승불교 수행자들이 입류의 경지에 이를 수 있거나 또는 대승불교 수행자들이 88 가지 삿된 생각과 견해를 끈을 수 있다면, 공양을 올린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된다. 그러면, 이들이 공덕의 밭에서 수확을 얻었음으로 우리들이 이들에게 보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요구들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이 세대의 비구나 비구니들은 그러한 성취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다른 길이 있으니 서방 정토에 왕생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취가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정토에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정토에 왕생을 구하는 것이 실제로 88 가지 삿된 생각과 견해를 끊는 것보다 훨씬 쉽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이 것들을 다 끊을 필요가 없고, 남은 업을 가지고 왕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들림 없는 믿음과 서원으로 올바른 수행을 하고 끊임없이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면 누구나 다 성취할 수 있다. 부처님은 무량수경과 아미타경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따라서 우리가 속세를 버리고 비구나 비구니가 될 때, 우리는 반드시 성취해야한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6 )
허물을 철저히 고쳐라
[ 이제 당신의 부족한 점들을 알았으니, 당신은 이들을 고치고 또 자식도 없고 관리도 못된 원인이 된 당신의 그릇된 행동을 교정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
운곡 선사는 료범 선생에게 그의 나쁜 습관과 결점들을 교정하는 방법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았음으로, 운곡 선사는 그가 개선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하라고 말했다. 우(尤) 선생은 그의 논평에서 말했다: “ 우리 모두 허물과 약점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용히 생각해서 이들 하나하나를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할지 알게 된다. ”
우리의 행동을 바꾸고 우리 자신을 개선하는 것이 참된 수행이다. 이것은 경을 읽고, 부처님에게 절하고 주문을 외우는 형식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평생을 통하여 수행하고도 아직 육도 (六道)에 갇혀있는 것은 단지 형식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형식적인 것들이 가르침의 실례가 되어 보고 깨닫기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들은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는 역할만 했다.
그러나 자기 수행을 위해서는 형식적인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들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허물을 고치는 것이 우리가 수행에서 진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조용히 우리 안을 돌이켜 보고 우리의 행동을 살피면서, 우리의 나쁜 습관과 허물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알게 되면 우리들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무엇을 고치고, 또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집중하여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여 교정할 수 있다.
우(尤) 선생은 그의 논평에서 몇 가지 예를 들고 있다. “우리들은 인색하고 탐욕스런 사람에서 어려운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가 그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인색할 때 남에게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탐욕스러울 때 항상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갖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이러함을 알아차리면, 보시를 실천함으로서 관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것을 그들이 요구하면 그냥 주어버릴 수 있다. 또 더욱 좋게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시급히 필요한 것을 발견하면, 먼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저 주어버릴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보시 즉 재보시 (財布施)를 통하여 복을 닦는 것이다.
두 번째 보시는 법보시(法布施)로서, 우리가 남에게 우리가 가진 기술이나 지혜를 제공함으로서 실행한다. 만일 우리가 남들이 잘하지 못한 것을 잘할 경우, 그들이 기술을 갖거나 지혜를 개발하도록 열성적으로 그들을 가르쳐준다. 세 번째 보시인 무외보시(無畏布施)는 남들이 조용히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헤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예로서, 어떤 사람이 밤에 혼자 집에 걸어가는 것을 무서워하면, 그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같이 동행할 수 있다.
오늘 날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나라를 외적의 침략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군복무를 한다. 이것도 무외보시의 한 형태이다. 왜냐하면 군인들은 나라와 국민을 보호하고 외적들의 침략으로 국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여 평화를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 종류의 보시의 범위가 광대함을 알 수 있다. 재물을 베푼 까닭으로 우리는 부자가 된다. 가르침을 베푼 까닭으로 우리는 총명과 지혜를 얻는다. 두려움을 없애 줌으로서 우리는 건강과 장수를 얻는다.
많은 나라에서 붙잡힌 동물들을 풀어주는 것이 무외보시 (無畏布施)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좋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붙잡힌 동물들을 풀어주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동물들을 잡는 것을 사업으로 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동물들을 풀어주는 것은 무외보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해치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들을 풀어줄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남을 도우려는 우리의 의도가 잘못되어 오히려 그들을 해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우리가 식료품 가게에서 보게 되는 동물들을 풀어줌으로서 적절하게 보시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들이 풀려나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고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고통 속에 있는 동물들을 구해주는 것이므로 진정한 자비이고 친절이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애완동물 가게에서는 집에서 기른 동물들을 팔므로 그것 들이 풀려나면 독자적으로 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이것 들이 풀려나면 죽게 되어 우리의 좋은 의도가 나쁜 짓이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결과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따금 식료품 가게에서 동물들을 보고 이 것들을 사서 풀어 줄때, 올바른 방법은 불,법,승 삼보를 부르고, 그리고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이 것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다음의 논평은 화내고 흥분한 사람이 조용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쉽사리 노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중요한 허물인데 요범 선생이 이러했다. 선사는 그에게 대신 조용히 머물라고 권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온화해 진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공자께서 이 덕성의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공자의 제자들은 그 분이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것에게 보여주신 다섯 가지 덕성인 온화함, 선량함, 공순함, 근검함, 그리고 겸손함을 찬양하였다. 공자는 호사롭지 않고 소박하게 사셨다. 예절바르고 겸손하여 절대로 다투지 않았고 남과 화합하여 도덕적으로 탁월한 모범이었다.
논평은 “과장하고 뻐기는 사람으로부터 겸손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과장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던 의심하게 된다. 그 결과로서 그들은 우리들의 신임을 얻기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서 겸손하고 정직해야 한다.
“경박하고 참을성 없는 사람이 침착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 만일 우리가 조용히 머물 수만 있다면, 우리의 마음이 청정해 진다. “거만하고 무례한 사람이 예절바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 실제로 거만해야할 아무것 도 없다.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결점을 고쳤어야 했고, 개선하는 방법을 배웠어야 했다. 깨달은 존재인 부처님과 보살들은 공자와 맹자처럼 모든 사람 모든 일 들을 존경했다. 깨달음이나 지혜에서 그 분들에게 훨씬 못 미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경과 예절로서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함이 본래의 덕성이기 때문이다.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 게으름은 어떤 일에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심각한 괴로움이다. 그 대신, 우리는 목표를 정하고 정력적으로 일하는 것이 좋다. 석가모니 부처님 제자의 하나인 아누루다는 게으름으로 유명하였다. 부처님에게 꾸중을 듣고 그는 7일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정진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과 그의 시력(視力)이 손상되었다. 부처님은 자비롭게 그에게 깊은 명상의 하나인 “락견조명금강삼매( 樂見照明金剛三昧 )”를 가르쳐 주었고, 그는 이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더 잘 볼 수 있었다. 그 결과로 그는 10억 개의 은하로 이루어진 한 불국토( 三千大千世界)를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또한 열성과 결의를 가져야 한다. 게을러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비단 불교를 배우고 수행하는 데에 성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고금(古今)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게을러서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근면은 대승불교 수행자나 보살을 이루는 좋은 원인이다.
“잔인한 사람이 인자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 겁 많은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도 하나의 중대한 허물임으로, 우리는 그 대신 성실하고 단호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요범 선생은 이러한 모든 허물을 가졌다고 시인하였다. 우리들은 더욱 그를 닮아 우리자신을 개선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 좋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7 )
다음에 선사는 수행을 위한 몇 가지 요점을 요범 선생에게 가르쳐 주었다.
[ 당신은 덕스럽고 관대한 마음을 닦고 다른 사람들을 선의와 자비심으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또한 건강을 살피고 정력과 기백을 보존할 필요가 있습니다. ]
첫째로,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모든 나쁜 일들을 피하고 모든 착한 일들을 하여 공덕을 쌓으라고 격려했다. 이것이 불교와 세속적인 가르침에서 우리의 개선을 위한 기초가 된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게 악한 일들을 피하고 착한 일들을 하여 공덕을 쌓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천 금을 갖는 부자나 자손들이 일백 세대나 지속할 수 있는 충분한 공덕을 쌓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온 나라가 공자님을 존경한다. 전 세계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존경한다. 공자님은 세간(世間)의 큰 공덕을 쌓으셨고, 부처님은 출세간(出世間)의 큰 공덕을 쌓으셨다.
둘째로,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넓혀 타인에 관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많은 고통을 만나게 되고 이것이 우리 수행에 더 많은 장애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깨달음과 올바른 생각과 청정한 마음을 위해 수행한다. 만일 우리가 마음의 청정함을 얻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릇된 생각을 갖게 된다. 올바르고 크게 깨달은 생각은 청정한 마음의 바탕위에 놓인다. 우리는 이것을 관대함으로 성취한다.
지나치게 심각하거나 모든 일에 비판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금강경(金剛經)에서 배우는 바와 같이, “모든 현상은 꿈이고, 허깨비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이다”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모든 현상이 구름처럼 흘러간다. 화를 내거나 다툴 가치가 있는 일은 없다. 사물에 대하여 곱씹는 것은 바람 직 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 우리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온화하고 다정하고 태평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하지 못한 것이 요범 선생의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들은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 친절과 자비를 베풀도록 노력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것들에 차별이 없고 따라서 모든 것이 평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공자님 또한 “인자한 사람은 적이 없다 (仁者無敵)” 라고 인자함을 가르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에 거슬리는 것을 수용할 수 없다면, 우리는 친절하지 도 자비롭지도 않은 것이다. 투쟁이란 인자한 가슴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비(大慈悲)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이롭게 하기 위하여 배우고 수행해야 할 덕목이다.
정토경전(淨土經典)에서, 우리는 일심불란 (一心不亂)을 읽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대립하는 어떤 것이 존재하면 얻을 수 없다. 대립한다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혜능 선사는 “우리 마음은 본래 비어있다 (本來無一物)” 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마음이 아직 단 하나의 망념(妄念)에 집착해도, 그것은 참된 마음이 아니고 허망한 마음이다. 청정하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은 대립하는 생각들을 가질 수 없다. 대립하는 생각들이 더 이상 없을 때, 진심 (眞心 )이 들어나 마음이 청정해지고 우리가 일심불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일심불란과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경지가 여기서 시작된다.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경우, 처음엔 마음은 부처님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수행이 오래 지속된 후에는 우리는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아미타불을 염불하고도 끊임없이 염불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 지를 확인하고 이를 고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장애들을 제거하였을 때,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틀림없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 우리의 수행 정도와 무관하게, 그 경지에 이르렀을 때 알게 된다. 남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다.
우리가 끊임없이 염불하는 경지에 이르러 정토에 왕생하면, 성인과 범부가 함께 사는 나라 (凡聖同居土)에 왕생한다. 각성(覺醒)이 일심불란 (事一心不亂)한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이 일시적인 나라(方便有餘土)에 왕생한다. 깨달음이 일심불란(理一心不亂)한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진정한 보상의 나라 (實報莊嚴土)에 왕생한다. 우리가 이른 경지의 수준이 우리가 태어날 나라를 결정한다.
끊임없이 염불하는 경지에도 또한 다른 수준들이 있다. 따라서, 왕생의 9품(品)이 있다.
왕생의 상위 수준인 상3품(上三品) 태어나는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는 시기에 열반할 수 있다. 그때에 이들은 아무 병도 없이 선채로 또는 앉은 채로 열반할 수 있다. 만일 이들이 아직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으면, 더 오래 머물 수 있다. 모든 것이 마음대로 이루어진다. 중3품(中三品)에 태어나는 사람은 몇 달 전에 열반할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또한 서거나 앉은 채로 열반할 수 있다. 하품(下品)에서는 며칠 전에 열반할 것을 알게 되나 임종 전에 아플 수도 있다.
일심불란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더욱 높은 능력들을 갖게 된다. 일심불란에는 2개의 수준이 있다. 즉 각성과 깨달음이다. 이 수준들은 우리 같은 범부들이 일생에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끊임없는 염불은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이생에서 우리들은 끊임없는 염불의 경지를 성취하여 우리가 원할 때 편안하게 열반할 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상3품(上三品)에, 성인과 범부가 함께 사는 나라(凡聖同居土)에 왕생하는 것이고, 우리의 남은 업을 지닌 채 왕생하는 것이다.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정력과 기백을 보전해야한다고 말했다. 요범 선생이 저녁 내 앉아 있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건강을 돌볼 줄 몰랐기 때문에, 그는 건강과 정력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과거의 모든 일이 어제로 다 소멸되었고, 아주 새로운 미래가 오늘 시작하는 것처럼 사세요. 만일 당신이 이럴 수만 있다면, 당신은 새로 태어 난 유덕하고 진실한 사람이 될 것이요.]
어제 일어난 모든 일 들은 과거에 속한다. 이것을 곱씹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이러지 못하면 이것은 마치 지난일 들을 다시 하거나 치룬 샘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알라야식 ( 阿賴耶識 )에 추가의 인상을 남긴다. 따라서 지나간 일들은 지나가도록 하고 잊어 버려야 한다. 중요한 일은 현재에 있는 일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의심과 후회는 번뇌가 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슬픔과 고통의 조건이나 원인이 된다.
부처님은 과거를 곱씹지 말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우리들은 우(尤) 선생의 논평에서, 이것이 완전한 사람을 위해 운명을 바꾸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읽는다. 완전한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지혜를 갖고 깨어있는 사람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한 6개의 단계가 있다 - 수행하여 공덕을 쌓아야 할 필요로부터 시작하여 정점에 이르러 갓 태어난 사람, 유덕하고 진실한 사람이 될 때까지-. 이것 들이 운명을 바꾸는 열쇠가 된다.
우(尤) 선생은 그의 논평에서 말했다. “운명을 바꾸는 첫 단계가 우리의 과오를 고치는 것이다. 쌓아진 모든 나쁜 습관들을 하나 씩 털어내고 모든 문제들의 뿌리를 하나 씩 뽑아내야 한다. 항상 어디에서나 우리의 모든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 우리는 자제하고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우리는 갓 태어난 어린애 같은 순결과 착함(善)을 지켜나간다.” 우리 운명을 바꾸는 전적인 책임은 우리 손에 놓여 있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존재나 깨달은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최상의 공덕을 지닌 사람은 더 이상 운명에 구속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자신에 대하여 엄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항상 우리를 용서해 준다면, 우리의 미래를 제한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에게는 가혹하고 엄격해야 하지만, 남에게는 너그럽고 관대해야 한다. 우리는 순수하고 유덕하고 순결한 사람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순결한 것인가? 그것은 아무런 이기적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끊임없이 망념을 갖게 된다면, 우리는 순결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잃게 된다.
미리 결정된 것을 바꾸는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미래를 재 창조하는 진리를 이해한다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더 이상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날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기위하여 주의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이전에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최상의 덕을 갖춘 사람들(極善之人)에 관하여 이야기 했다. 정토경전(淨土經典)에서 우리는 이들이 정토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최상의 덕을 갖춘 사람들은 참회하고 개심(改心) 할 수 있다. 서방정토에서, 이들은 더 이상 고쳐야 할 것이 없을 때까지 매일 참회하고 개심(改心)한다. 그리고 그들은 부처가 된다.
최상의 수준에 있는 보살들(等覺菩薩))도 아직 과실(過失)을 가지고 있다. 어떤 과실인가? 이들은 아직도 깨뜨려야 할 한 등급의 무명 (無明)이 있다. 만일 등각보살들이 아직도 참회하고 개심해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할지 상상할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비로운 가슴으로 참회하고 더 좋은 사람으로 변해야할 필요가 있다. 등각보살의 경지에 이르러도 우리는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 오직 고쳐야 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된다. 우리에게 단 하나의 과실만 남아 있어도 우리는 최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깨달음이란 우리의 허물들을 알고 이를 고치는 것이다. 보살들은 깨달은 중생들이다. 우리 또한 중생들이지만 우리들의 허물들을 몰라 이를 바로잡을 줄 모르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에게 어떤 허물이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오랫동안 생각해도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한다. 이래서, 보통 사람들은 허물이 없지만 보살들에겐 허물이 많이 있다고 말해진다. 그들은 자신에게 많은 결점이 있음을 앎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 말, 행동 하나 하나를 감시하고 이들을 3대아승지겁겁(三大阿僧祗劫) 동안 끊임없이 고쳐나간다. 우리가 보살들에게 얼마나 많은 허물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 어떻게 보통 사람인 우리에게 아무런 허물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차이가 무엇인가? 자기에게 많은 허물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깨달은 사람 즉 보살이다. 자기에게 수많은 과실이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 즉 보통사람이다. 보살들은 신이 아니고 자기의 허물을 알고 이를 끊임없이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만일 개선하려면 우리들의 허물을 고쳐나갈 뿐만 아니라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우리 운명을 바꾸는 가장 수승한 방법이다.
우리들은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매일 이를 독송하나, 이것은 단지 시작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경을 거울삼아 매번 독송할 때 대조하여 반성하고, 우리의 허물을 찾아내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어떤 부분이 더렵혀졌는가를 알아내고 곧 이를 씻어낼 수 있다. 씻어내는 것이 고치는 것이다. 우리는 여태껏 몰랐던 우리 마음의 때를 보기위하여 경을 읽는다. 경은 우리 마음의 어느 부분에 허물이 있는 가를 보여줘 곧 그 허물을 고칠 수 있도록 하게하는 거울과 같다. 그럼으로, 처음엔 경과 친해지지만 다음엔 우리는 그 가르침을 따르게 된다.
수행에 있어서, 먼저 우리는 원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미타 부처님의 48원을 세웠는지, 이원들을 우리 원으로 삼았는지, 그리고 그분과 한마음이 되어 원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과 같아지고 그분의 화신(化身)이 된다. 그분은 우리 자신을 그 분과 같도록 만들고 변화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모델이다. 이것이 한 마음, 한 가슴, 한 서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슴과 서원이 그 분과 같을 때, 우리가 어떻게 정토에 왕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일이 일어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상황에 관계할 때 아미타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미타불을 염불하도록 격려함을 잊지 않게 된다.
우리의 3업 즉 신업, 구업, 그리고 의업이 아미타 부처님과 같아질 때, 우리는 그 분의 화신이 된다. 우리는 그 분의 본원(本願)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이 것은 진실하고 유덕한 사람이 되는 것 보다 훨씬 훌륭한 일이다. 원래 우리는 업의 빚을 갚기 위해 이 세상에 환생했으나, 지금은 우리 모두가 우리 서원의 힘에 의하여 이 세상에 오신 아미타 부처님이 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가장 훌륭하고 수승한 방법인 것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8 )
[ 무릇 혈육(血肉)의 몸은 운명에 의하여 지배된다하지만, 어떻게 의리(義理)의 몸이 하늘로부터 감응(感應)을 불러올 수 없을 것인가? ]
여기에서 운곡 선사는 망념과 집착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몸은 실로 운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몸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들은 운명에 지배된다. 우리가 의식하는 마음(意識心) 또는 8식(八識)을 사용할 때, 우리 또한 운명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의 8식을 4지 (四智)로 바꾸었음으로 초월할 수 있다. 8식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운명에 구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깨달음의 어느 경지에 이르게 되면, 우리 또한 깨달은 마음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우리들은 미혹한 느낌들을 사용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깨달은 지혜를 사용했다면 어째서 하늘로부터 감응을 불러 올 수 없었겠는가?
주석(註釋)에서 우리는 “지극한 정성은 금강석도 쪼개고, 하늘로부터의 감응도 불러오고 운명도 바꿀 수 있다” 는 것을 배운다. 한(漢)나라의 명장(名將) 이광(李廣)에게 일어난 유명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한때 그와 그의 군사들이 행군하였다. 길 한 쪽에 매우 긴 풀이 있었다. 풀에 일부가 가려진 큰 돌이 있었고 그는 이것을 호랑이로 오해했다. 그는 즉시 화살을 쏘았고 화살은 목표에 깊이 박혔다.
말에서 내린 후 그의 활 솜씨를 보러 갔을 때, 그는 그것이 돌임을 알고 놀랬다!. 그는 “ 내가 무척 힘이 세 돌 속 깊이 화살을 박았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번 쏘아 보았지만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할 수는 없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처음 쏜 화살은 망념없는 지극한 정성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큰 스님 구마라집이 7세 쯤 되었을 때 별 생각 없이 큰 쇠 사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다시 “내가 이렇게 작은데 어떻게 이걸 들어 올릴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는 똑같은 일을 해보았으나 실패했다. 이광 장군은 돌을 사자로 오해했기 때문에 화살을 그 속에 박히게 할 수 있었다. 구마라집 스님은 큰 쇠 사발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았음으로 그 걸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일단 이광 장군이 호랑이가 실제로 돌임을 알게 되고, 구마라집 스님이 쇠 사발이 매우 무거움을 알게 되자, 그들은 전에 한 일을 되풀이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처음 망념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행동했다. 이리하여 돌이 쪼개져 열리고 쇠 사발이 들려졌다.
이 두 예로부터, 우리는 화엄경에 설해진 “사사무애(事事無碍)”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것은 우리가 망념과 집착을 버려 마음이 상당한 정도로 청정해 졌을 때 이루어진다. 만일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장애가 된다. 그러나 마음이 청정하면 어떤 장애도 없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로부터 감응을 이끌어낸다” 유교는 물질적 욕망과의 투쟁에 언급하며, 우리들에게 그것을 버리고 더 이상 욕망에 영향 받지 않도록 가르친다. 지극한 정성은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에 설해진 진심(眞心)이다. 이것이 보리심(菩提心)이고 심심(深心)이고 발원회향심(發願回向心)이다.
[ 서경(書經) 태갑(太甲)편에 이르듯이 “사람이 하늘의 보복은 피할 수 있으나 자신의 악행에 대한 보복은 결코 면할 수 없다” ]
우리가 하늘의 보복은 피할 수 있다는 말은 비록 우리가 전생에 죄를 지었다 하여도 그에 대한 보복은 현재의 수행과 금생에 쌓은 공덕에 의하여 바뀌어 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늘의 보복은 정해졌으나 바뀌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악행에 대한 보복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금생의 죄에 관한 말이다. 하늘의 보복은 전생에 지은 죄들에게 주어지나 우리의 운명처럼 바뀌어 질 수 있다. 그러나 금생에 우리가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보복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러한 악행을 계속 하면, 우리는 후회하고 개심할 수도 없고 우리의 운명도 바꿀 수 없게 된다.
과거에 만든 나쁜 원인들이 현재에 촉매(觸媒) 역할을 하는 불리한 조건들을 만나게 되면, 이러한 악행에 대한 보복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더 이상 악행을 삼가면, 우리는 불리한 조건들을 진압할 수 있다. 나쁜 원인들은 아직 존재하지만 촉매적 조건이 없이는 이들이 성숙하지 않는다. 운명을 바꾸는 원리는 이 인과 법칙의 조건적 측면에 기초를 둔다. 원인은 과거에 만들어져 변할 수 없으나, 조건은 변할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다.
우리는 뿌린 것을 거둔다. 우리는 원인으로 멜론과 콩 씨를 심을 수 있다. 이러면, 우리는 열매로서 멜론과 콩을 기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멜론 씨로부터 콩을 기르거나 콩 씨로부터 멜론을 기를 수는 없다. 원인은 여기에서 상수(常數)이다. 우리가 수확하는 것은 조건에 의존한다. 우리가 콩을 수확하고 싶다면, 우리는 콩 씨를 심고 멜론 씨를 제거한다. 원인이 발효(發效)하려면 적절한 촉매적 조건이 필요하다. 예로서, 씨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 태양, 물 등의 적절한 조건이 필요하다. 씨들이 심어져 원인이 만들어진 이후라도 우리는 이것들이 성숙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물과 태양을 공급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들은 자라지 않는다. 씨들은 적절한 조건들이 없으므로 열매로 성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들이 전생에 나쁜 원인들을 만들었어도 만일 우리가 금생에 나쁜 짓을 삼가고 잘못된 행동을 그치고 착한 일을 함으로서 우리들은 이러한 원인들이 성숙하는데 필요한 불리한 조건들을 제공하지 않을 수 있다. 분명히 우리들은 또한 전생에 좋은 원인들도 만들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오직 나쁜 일만 아니면 오직 좋은 일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생을 거듭하면서 우리들의 행동은 선행과 악행의 혼합으로 이어져왔다. 어떤 때는 선행이 더 많았고 어떤 때는 악행이 더 많았다.
우리가 더 이상 악행을 삼가기만 하면, 이 전에 많은 악행을 한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나쁜 조건들을 막을 수만 있다면 비록 우리가 조그만 선행들을 했어도 이것들이 꽃피고 성숙할 것이다.
[ 시경(詩經)에 “하늘의 마음에 영원히 일치하여 우리 스스로 커다란 행운을 구하다 (永言配命, 自求多福)” 이르렀다. ]
이 말은 우리들의 조석 예불의 진정한 목적을 보여준다. 아침 예불에서 우리들은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을 상기한다. 저녁 예불의 목적은 하루를 되돌아보고 우리들이 경의 가르침에 따르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조심 했는가를 점검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두 예불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에는 조석 예불의 내용은 “화엄경 정행품 (華嚴經 淨行品)” 의 3귀의 “ 부처님에 귀의하여 모든 중생들이 큰 길을 깊이 이해하고 큰 이해의 마음을 일으키기를 서원하는 것 ( 自歸依佛, 當願衆生, 體解大道, 發無上心 )“ 이었다.
옛날의 덕인 (古德)들은 현재 우리들의 독송본(讀誦本)을 편집하였고 그 내용은 그 당시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독송이 오늘날 우리들의 수행에도 적합한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독송본은 우리들이 이에 의하여 우리들의 허물을 고쳐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수정될 필요가 있다. 똑같은 것이 참회의식에도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이 의식에 참여하여 청정하지 않은 마음으로 절한다면 우리는 업장(業障)을 소멸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증대시킬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플 때, 약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 만일 약이 효험이 없으면 처방약을 바꾸어야 한다. 경을 읽고 참회의 절을 하는 목적은 우리의 번뇌를 치료하기 위하여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데 있다. 만일 이들이 효과가 없으면 더 좋은 처방약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 것이 하련거(夏蓮居) 거사가 편집한 보왕삼매참(寶王三昧懺)이 오늘 날 우리들의 문제를 다루는데 다른 비슷한 것들 보다 더욱 적합한 이유이다.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 책의 많은 구절들이 오늘 날에 적합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병과 문제들에 근거하여 조석 독송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조석 예불에 많은 정토수행자들은 정(定)을 닦기 위하여 무량수경을 독송한다. 만일 경 전체를 독송할 충분한 시간이 없으면 아침에는 48원을 포함하는 6장들을 읽고, 저녁에는 32장에서 37장 ( 어떤 번역에는 31장에서 40장까지 인데, 아미타 부처님이 미륵보살에게 하신 말씀이 있는 부분이다 )까지 읽어도 된다. 이 6장들은 인과(因果)와 우리 자신을 바꾸는 법을 배우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하늘의 마음에 영원히 일치하고 우리 스스로 커다란 행운을 구하게 된다.
“ 하늘의 마음 ”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의미하며, 문자 그대로 하늘, 땅, 그리고 천신(天神)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이 본성에 합치할 수 있다면, 근본 선행(善行)을 성취하고 본성에 되돌아 갈 수가 있다.
[ 선사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 공 선생은 당신이 관리도 되지 못하고 자식도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것들이 하늘의 응징이지만 그러나 바꾸어질 수 있다. 당신이 다만 덕성을 확충(擴充)하고, 부지런히 선행을 하고, 많은 음덕(陰德)을 쌓기만 하면 된다. ]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이 관리도 못 되고 자식도 없는 것은 많은 전생의 악업(惡業)이 쌓인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비록 운명이 존재하지만 고정된 것이 아님으로 변화될 수 있다. 과거로부터 온 것은 상수(常數)이지만 오늘날 하는 것은 변수(變數)이다.
운곡 선사는 일어나기로 예정된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덕성을 확충해야한다고 설명했다. 이로부터, 만일 우리가 단지 밖에서만 찾고 바꾸려고 하면 우리는 “ 안과 밖에서 모두 실패한다 (內外雙失). ”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방문이나 창 등의 배치를 바꿈으로서 환경을 개선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안과 밖에서 실패한 것을 보아왔다. 겉으로는 그들에게 소득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얻기로 예정된 것만을 얻었다. 이것은 아직 그들의 운명 속에 있는 상수이지 변수가 아니다.
악행을 그만두고 착한 일을 하기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가슴으로부터 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사는 또한 “음덕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말했다. 음덕은 남들이 모르는 착한 행동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착한 일을 하고 남들이 칭찬하도록 이를 널리 알리면, 이 일들이 이제 칭찬으로 바뀌었음으로 우리는 공덕을 잃어버리게 된다. 착한 일을 하고 동시에 그 공덕을 지워버리면 우리에게 공덕이 쌓이지 않는다. 착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아니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하면 더욱 좋다. 왜냐하면 이로서 우리의 악업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의 공덕이 숨겨진 채로 우리의 악업과 이에 대한 응징이 감소하거나 아주 소멸되는 일이다.
오늘 날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도 남들이 이를 비판하거나 심지어 중상하면, 우리는 억울하다고 느낀다. 왜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도 나쁜 결과를 얻는가? 실제로는 이것들은 좋은 결과들이다. 만일 우리가 좋은 일을 한 뒤에 즉시 칭찬 받는다면, 우리들은 공덕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남에게 숨기면서 공덕을 쌓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래야만이 진실로 착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 이것이야 말로 당신이 행운을 재창조하는 방법들이다. 이러고도 당신이 그 행운을 향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우리들은 우리가 금생(今生)에 만든 모든 행운들을 즐길 수 있다. 경에 “ 인과(因果)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다 ” 라고 설해졌다. 우리가 금생에 겪는 것들은 전생에서 우리가 한 일들의 결과이고,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우리가 내생에서 겪게 될 일들을 결정한다. 만일 우리가 아주 부지런히 수행하면, 그 보상을 수확하기 위하여 내생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 대신 금생에 우리가 한 일들의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이 원리에 의해 요범 선생은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선행을 쌓아 그 결과를 향유하기 위하여 내생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9 )
[ 역경(易經)은 사람들이 행운을 구하고 불운을 피하는데 (趨吉避兇) 도움이 되기 위하여 쓰여 졌다. 만일 모든 일이 변화의 여지가 없이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일을 하리라고 바랄 수 있겠는가? ]
역경은 고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성립된 철학서(哲學書)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인이 되고 유덕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친다. 이 책은 수학적 계산에 의하여 이 일을 하고, 나누어 진 그리고 안 나누어 진 선(線)들의 64개 모든 가능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그림들을 이용한다. 여기에는 384 개의 가능한 예언들이 있다. 개인들에 영향을 주는 사소한 변화부터 나라와 전 세계에 영향을 주는 변화들이 이 그림들로부터 연역(演繹)될 수 있다. 이 책은 원인과 결과의 자연스런 진행을 결정하기 위하여 수학을 이용한다.
운곡 선사가 수학을 능가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은 역경의 기법(技法)이 통하지 않는 영역에 속한다. 역경은 상수들에 관하여는 잘 맞다. 역경이 변수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이것들을 활용하지 못한다. 이 점이 우리에게 공덕을 쌓고 악행을 금하라고 가르친다. 하나의 유덕한 생각은 하나의 플러스이고 하나의 나쁜 생각은 하나의 마이너스이다. 따라서 매일 매일이 단지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일들이다. 만일 변화의 폭이 그다지 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우리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공 선생이 요범 선생의 운명을 예언한 것에 해당한다.
20년간 요범 선생은 착하거나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늘이거나 줄이지 않고, 그의 운명에 철저히 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착한 생각이나, 불친절한 행동 등 보통 약간의 변화가 있다. 요범 선생은 선행이나 악행 등에 관심이 없이 20년간 한결같았음으로 그의 운명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였다. 만일 변화가 크면 우리들은 상수를 초과하여 “ 행운이 생기고 불운을 면하게 될 것이다. ”
주석(註釋)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모든 생각과 행동이 변할 수 있음으로, 모든 얻음과 잃음, 기쁨과 고통의 결과도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결과들은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눌 수 있어, 개인의 행동에 의하여 가기도하고 오기도 한다. ”
상수는 원인이고 변수는 조건이다. 운명을 바꾸는 열쇠는 조건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것이 불교에서 강조 된다: “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은 조건으로부터 생긴다. ”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수인 조건으로부터 생긴다. 이 변수를 조절함으로서 우리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원과 목표를 추구하여 놀랍고도 완전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은 경에서 “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涅槃) ” 을 말씀하셨다. 이 원리를 이해함으로서 우리는 현인(賢人), 성인(聖人), 아라한, 보살 그리고 부처가 될 수 있다.
[ 역경의 첫 장에서 “선행을 자주하는 집안은 자손에게 남겨줄 여분의 행운이 있다.”고 말했다 (積善之家 必有艅慶). 당신은 이 말을 믿는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
이로부터 우리는 역경을 쓴 사람들이 이 세계와 우주의 원인이 상수임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안다. 이들은 또한 조건이 되는 변수가 있음도 알았다. 이 변수를 작은 규모로 조절하여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큰 규모로 조절하여 이 세상의 지속적인 안정과 평화를 추구할 수 있다.
역경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이 책이 지금 사실상 점치는 책으로 전락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매광희(梅光羲) 선생이 무량수경 서문에 말 했듯이 “원래 아미타경은 우리로 하여금 생사의 윤회를 초월하여 부처가 되도록 돕는 가르침 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죽은 사람을 보내는 장례식에서 독송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미타경이 이 슬픈 상태로 전락한 것은 역경이 점치는 책으로 전락한 것과 똑 같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서글픈 세태의 반영이다.
역경은 우리에게 행복과 세계 평화와 안정을 얻고, 공덕을 쌓아서 우리 운명을 바꾸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었다. 이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회개하고 개심(改心)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선행을 한 가정이 매우 큰 행운을 가져 그 자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을 믿는지 물어보았다. 요범 선생은 믿는다고 대답했다.
요범 선생이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음은 선근(善根)과 행운으로 좋은 조언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운곡 선사를 만나게 된 것은 적절한 조건이 무르익은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 우리의 선근, 행운 그리고 적합한 조건이 성숙하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 운명을 바꿀 수 없겠는가? ”
우(尤) 선생이 그의 주석에서 말했듯이 “ 성인(聖人)으로부터 좋은 조언을 듣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은 악행을 한 것이다. 의심은 기본적인 번뇌의 하나이다. ” 좋은 조언은 이 세상과 그 너머에 있는 성인들의 가르침이다. 후대의 세대들이 이 가르침들을 경전(經典)이라 불렀다. 경전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은 진리를 말한다.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는 과거 수천 년 전과 지금이 똑 같고, 동양이건 서양이건 결코 변하지 않는다.
성인들의 저술과 가르침은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견해에서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러했다면 이것들이 편향(偏向)되었거나 부적절했을 것이다. 역사는 견해들이 아니라 쌓인 경험들로 이루어졌지만, 경전은 진여본성(眞如本性)에서 나온 진언(眞言)이다. 따라서, 경에 있는 가르침은 절대적인 진리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우리가 이 가르침들을 믿으면 이익을 얻고 좋아지나, 믿지 않으면 대단한 이익들을 놓친다. 이래서 우리는 의심이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오만, 의심, 그릇된 견해 등 여섯 가지 기본적 번뇌의 하나라고 말한다.
주석은 또한 “ 친절한 조언을 듣고 믿음을 내는 사람은 행운과 공덕이 생기도록 한다. 이 믿음이 행운의 어머니가 된다. ” 라고 말했다. “ 어머니 ”는 낳아서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운과 공덕은 성인의 가르침을 믿는 것으로부터 생긴다. 만일 우리가 성인들의 가르침과 말들을 믿을 수 있다면, 이로부터 무한한 행운과 공덕이 비롯함을 발견하게 된다. 요범 선생은 실로 희귀한 사람으로서 선사의 가르침을 듣자 이를 깊이 믿었다.
행운을 닦고 공덕을 쌓아 운명을 초월하다
[ 나는 그분의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마음을 엎드려 절하여 바쳤다. 그리고 불상(佛像) 앞에서 크고 작은 내 과거의 모든 과오를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과거에 합격을 바라는 소원을 쓰고 조상과 하늘과 땅에 대한 나의 보은(報恩)의 마음을 보이기 위하여 3천의 선행을 하기로 맹서하였다 ]
여기서 우리는 요범 선생이 진실로 스승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공경함을 볼 수 있다. 그는 “ 스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 라고 가볍게 말하고 잠시 후 다 잊어버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불상 앞에서 그의 모든 과오를 숨김없이 회개한 후 진심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모든 각자(覺者)들에게 그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 주석에는 다음으로 “ 다른 사람들이 우리 비행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이다 ” 라고 쓰여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과오를 숨기면, 그것들은 놀라운 속도로 증대한다. 만일 우리가 영리하다면, 그것들이 알려지도록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비난 받고 이를 고치게 되면, 우리의 업장(業障)은 점차로 지워진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의 실수를 떠들어 대면 비록 우리가 그들이 말하는 것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남들에게 부당하게 비난받으면 또한 우리의 업장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을 변호하거나 또는 반박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변호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과오를 고치도록 돕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죄는 더욱 심각한 것이 될 것이다. 당 태종 (唐 太宗)은 천년 이전 당 나라에 살았었는데 현명하고 교양 있는 위대한 황제로서 기억되고 있다. 왜냐? 그는 그의 결점을 감추지 않았음으로 누구나 그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었다. 비록 황제였지만 그는 그가 아직 고쳐야 할 허물이 있음을 알았음으로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았다. ( 만일 그가 보복했다면 아무도 다시 그에게 충고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요범 선생은 비록 공 선생이 그에게 운명이 아니라 했지만 과거 시험 합격을 추구했다.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3000개의 선행을 하기로 서원(誓願)하였다. 우리에게 운명 지워지지 않은 것을 원해서 얻는 것이야 말로 진실로 구해서 얻는 것이다.
[ 내 서원을 듣고 운곡 선사는 나에게 공과격(功過格)을 보여 주고 매일 내가 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기록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선사는 악한 일은 선한 일을 상쇄한다고 경고했다. ]
공과격은 공덕과 과오를 기록하는 것으로 명(明)나라 후기에 매우 유행했다. 학자와 불자들이 덕을 닦는데 이를 활용하였다. 큰 스님 연지 대사 (蓮池 大師)는 불교로부터 선행과 악행의 기준을 끌어 낸 “자지록(自知錄)”을 작성하였다. 이 것은 불자들이 악행을 끊고 선행을 닦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오랜 기간을 지나며 전해 내려와 현재 우리들이 참조할 수 있는 몇 종류의 공과격들이 있다.
요범 선생은 오백년 전에 살았다. 그의 배경과 생활 방식은 우리들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롭게 그 공과격을 현대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조정하여 아직도 그 원리들을 지킬 수 있다. 아무도 더욱 현대적인 공과격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 원리들은 유효하다.
[ 선사는 나에게 준제주(準提呪)를 외우도록 가르치셨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집중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
밀교(密敎)에서 준제 보살은 대자비 보살의 화신이다. 왜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경을 독송하는 대신 주를 외우라고 했을까? 주를 외우는 목적은 망념을 없애기 위하여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는 산스크리트( Sanskrit )에서 음역(音譯)하였음으로 우리는 그 의미를 따질 필요 없이 소리만 반복하면 된다. 오랫동안 주를 외우면 우리의 마음이 청정해진다. 이렇지 않는 경우에도 최소한 망념은 억눌러진다.
우리가 경을 독송하거나, 주를 외우거나, 부처님 명호를 부르거나 그 목적은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로서, 만일 선사가 요범 선생에게 경을 독송하도록 가르쳤으면, 그는 그 의미를 분석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 독송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에 방해가 된다 ). 이래서 그에게 주가 가르쳐 졌다. 불자들이 “ 경을 독송하는 것이 주를 외우는 것만 못하고, 주를 외우는 것이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만 못하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이러한 것들이 실제 수행을 강조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받았던 기본 교육을 받지 못 했음으로 “양을 잃고 난 후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 ”는 옛 사람들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기본 교육을 매우기 위하여, 수행의 처음 수년간은 무량수경( 無量壽經 ) 외우는데 집중할 수 있다. 배우는데 가장 좋은 시간이 20세 이전임으로 이것은 젊은 사람들에겐 특별히 실용적이다. 만일 우리가 이 경을 기억하여 외울 수 있다면, 우리 남은 인생은 이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완전한 지혜이다. 따라서, 경을 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초가 된다. 만일 우리가 나쁜 일을 그치고 착한 일을 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닦을 수 있다면, 때가 이르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게 된다.
[ 운곡 선사는 부적(符籍)을 그리는 전문가들이 “부적을 그리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그릴 줄 모르면 귀신들이 비웃 는다 ”라고 말한다고 했다. 부적을 그리는 비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념(無念)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점을 이해하고, 원초적 어두움 후의 고요한 마음에서 첫 획을 긋는다. 그리는 과정에서 모든 망념을 버린다. 이렇게 해야만 부적이 영험(靈驗)이 있게 된다. ]
부적을 그리는 것은 불교에서 주문(呪文)을 외우는 것과 같은 도교의 오래된 기술이다. 부적을 그리는 비결은 무념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비주 (大悲呪)로 이것을 보여줄 수 있다. 주(呪)를 외어서 성화(聖化)된 대비수(大悲水)는 어떤 사람에는 큰 영험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영험이 없다. 왜냐? 주를 외울 때, 영험을 본 사람은 시작부터 끝까지 단하나의 망념도 갖지 않았다. 만일 주를 외울 때, 하나의 망념이라도 생기면 그 주는 영험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주가 길수록 성공적으로 외우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능엄주는 매우 영험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이 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왜냐?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주를 외우면서 많은 망념들을 갖게 되고, 단 하나의 망념도 이들의 노력을 무효화(無效化)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원리가 경의 독송에도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정토 수행자로서, 아무런 망념 없이 무량수경 한편을 독송한다면, 이는 경이로운 일이다. 우리의 마음은 전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의 마음과 합치한다. 따라서 우리는 청정하고, 평등하고, 진실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을 독송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망념을 갖고 경을 독송하면, 우리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이 될 수 없다.
이로부터, 우리는 주가 짧을수록 외우고 집중하기 쉬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무 아미타불 ”하고 부르는 것은 더욱 짧다. 만일 이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면, 연지 대사 는 단지 “ 아미타불 ”만 부르도록 가르쳤다. 만일 우리가 이 명호를 한 생각도 없이 부른다면, 영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아미타 부처님에게 팩스(fax)를 보내 그분이 이를 받으신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의 망념이라도 더하면 이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10 )
[ 사람이 어떤 것을 위해서 기도하거나 구할 때 또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할 때, 단 하나의 생각도 내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 사람은 쉽게 감응(感應)을 얻게 될 것이다. ]
우리가 부처님이나 보살 또는 천상이나 지구의 존재로부터 무언가를 구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에 감응(感應)이 있으리라는 생각 없이 그렇게 함이 필요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어떠한 망념도 없이 진정으로 청정해야한다. 이것이 진실하고, 청정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지극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깨달은 존재에게 간구(懇求)해야 만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 원리가 사람들이 조상들의 제사(祭祀)를 모시고 그 위패 (位牌)앞에서 기구할 때에도 적용된다.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소용없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제사를 모시는 것이 매우 특별한 행사였다. 예로서, 그 행사를 주제(主祭)한 사람들은 3일 전부터 단식하고 목욕하였다. 그들은 조그만 방에 머물면서 집착을 끊으려고 노력하면서 청정한 마음을 닦았다. 그들은 마치 조상의 영혼들이 참석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제사를 모셨다. 불자들은 이를 “관상(觀想)”이라 부른다. 제사 때 진정으로 조상들을 공경하면, 영혼들이 나타난다.
우리가 도량에서 각자 (覺者)들을 공경할 때, 그들이 함께 있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들의 형상(形像)이 있다하여도 그들이 그곳에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수행자가, 비구, 비구니 또는 재가 불자이건 마음이 진실하고 청정할 때만 각자들이 함께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각자(覺者)로 둔갑한 마귀들이 오히려 더욱 자주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능엄경에 설명되어 있다.
[ “맹자(孟子)는 오래 사는 것 (壽)과 짧게 사는 것 (夭)에 차이가 없다고 논했다” 처음 생각에 왜 이것들이 같은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이 없을 때, 짧은 생명과 긴 생명의 이중성(二重性)도 없다. ]
짧은 수명과 긴 수명은 완전히 다르다. 왜 이들을 같다고 보는가? 이중성은 망념과 집착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오직 우리 마음이 청정할 때만 비이중성( 非二重性, 不二 )을 본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짧은 수명과 긴 수명은 같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불이(不二)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불이의 경지는 유마힐경(維摩詰經)에 언급되어있다. 정토종에서는 이것이 일심불란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경에는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이 사는 일진법계(一眞法界)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기초 수준 위에 있는 보살들의 마음의 경계이다.
[ 엄밀하게 분석해 보면, 풍작(豊作)과 흉작(凶作)의 이중성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부자이건 가난하건 현재의 우리 상황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
만일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안정되어 일을 할 수 있다. “ 만일 부자가 부자로서 만족하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데로 만족한다면, 사회는 안정되고 세계는 평화롭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 행복한 상태인가? 어떠한 망념이나 걱정 또는 고민이 없는 것이다. 만일 가난한 사람이 지금 그의 상황이 운명의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 또한 만족할 것이다.
이 좋은 예가 20세기 초에 일어났다. 강소성(江蘇省) 한 마을의 어떤 사람이 낮에는 밥을 빌고 밤에는 오래된 폐사(廢寺)들에서 잤다. 이대로 그는 만족했다. 그의 아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부자가 되어 유력(有力)인사가 되었는데 사람들로부터 훈계(訓戒)를 받게 되었다: “ 당신이 어찌 이렇게 불효자식일 수 있는가? 당신이 이렇게 부자이면서 아버지가 계속해서 빌어먹게 할 수 있는가? ” 그 아들은 이것을 듣고 부끄러워져 사람을 여러 곳에 보내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대려와 모셨다. 그러나 아들집에서 한달을 산 후, 아버지는 다시 거지 생활을 하려고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 차라리 아들집에서 행운을 즐기며 사는 것이 더 낳지 않을까? ”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였다: “ 나는 그곳에서 매우 불편했다. 지금, 나는 낮에 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고 갈 수 있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가는 것을 즐길 수 있다. 밤이면 어디든 내 집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집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 그는 그의 분수에 만족하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는 부(富), 욕망 (色), 명예(名), 음식(食), 수면(睡) 등의 5욕에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행복했고, 청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여 바쁠 때, 이 세상을 하나의 유희(遊戱)로 보고 방관자로서 남기를 더 좋아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지혜와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모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고 충족한 생활이 반드시 부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뜻이 아님을 모르고 이를 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운명을 이해하고, 중생의 바람에 부합하도록 적응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덕(有德)한 행위들을 기뻐해야할 필요가 있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들의 일생이 행복하고 충족해질 것이다.
[ 빈(貧)과 부(富) 사이에 이중성이 없음을 이해할 때, 우리의 마음은 높건 낮건 현재의 우리의 사회적 지위에 만족할 수 있다. 또한 오래 사는 것과 짧게 사는 것에도 이중성이 없다. 이렇게 이해하면 길건 짧건 우리의 수명에 만족할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삶과 죽음이다. 따라서 단명(短命)과 장수(長壽)는 유리(有利) 불리(不利)와 , 손해 이익의 모든 상황들을 포함한다. ]
이것은 모든 상황에 순응함을 말한다. 상황이 좋건 나쁘건 모든 것이 명백하고 필연적으로 됨으로 우리는 온전히 편안할 수 있다. 우리들은 복을 받고 얻고 대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삶이다. 진정한 행복은 큰 지혜와 수행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마음을 안정시켜 그들의 운명을 재창조 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부도덕하게 처신하여 더욱 어리석어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짓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종종 어리석은 사람들을 “불쌍한 사람들” 이라고 하셨다.
[ 우리가 우리의 수행이 어떤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운명이 변할 것이다. 이 변화는 우리가 쌓은 공덕과 하늘로부터 감응을 구하는 것에 달려있다. 수행할 때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알고, 마치 병을 고치는 것처럼 이 허물을 고치려고 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재창조되기를 기다리며 수행하지만 이 이것은 하루 밤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들은 게으르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부지런히 개선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알기 위 하여는 미혹되지 않고 깨어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수행이란 3업에서 그릇된 생각, 말, 행동들을 고치는 것이고, 이 허물들을 고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채택하는 것이다.
[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갖지 못하도록 예정된 어떤 것을 바라는 생각이나 어떤 보상을 원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
우리의 선행에 관한 보상의 빠른 수확을 바라는 것은 망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이 장애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오직 수행만 물을 뿐 수확을 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열심히 수행하기만 하면 수확은 자연히 따라온다. 왜 번거롭게 끊임없이 그걸 바라야 하는가?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것, 이것이야 말로 수행의 참된 길이다. 단지 그릇된 행동을 끊고 선행을 하는 데만 집중하면,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건 다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구할 때, 우리가 얻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행 공덕이 우리의 성덕(性德)과 상응(相應)하지 않음으로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원하는 것만 얻게 된다. 구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우리의 성덕과 상응하여 나타난다.
실제로 요범 선생이 얻은 것은 수행공덕이다. 그것은 아직 성덕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여전히 구했기 때문에. 처음엔 그가 학문적 명성과 관직을 원했고 다음엔 자식을 구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 졌다. 만일 그가 소망하는 단 하나의 생각도 갖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오로지 수행만 하고 공덕을 쌓았다면, 모든 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는 장수를 구하지 않았지만 운명지어진 것보다 오래 살았다. 그는 53세에 죽을 운명이었지만, 74세까지 살았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만 찾는 것을 그치고, 순탄한 일생, 충분한 먹을 것, 안전한 거처와 적절한 의복 등 분별 있는 소원만 가진다면 우리는 이익을 얻을 것이다. 작은 집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소박하게 그리고 안락하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낭비에 치러야 할 대가를 모르고 사치스러운 물건들을 소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인상을 주려한다. 그들은 얻는 것보다 더 많이 잃는다. 그 대신 만일, 우리가 우리의 행운을 남과 나누어 가지면 우리의 행운은 공덕의 축적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수행하여 100세대까지 이어갈 충분한 공덕을 쌓았다면, 우리의 자손들이 행운을 누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영리하고 지혜롭다면, 우리는 확실히 우리의 행운을 남과 나눌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심을 가져야한다. 왜 마침 좋은 때에 스스로 오는데 행운이 빨리 오길 바라는가?
[ “이 수준에서는, 실질적 배움과 지혜의 수행인 무심(無心)의 내재적(內在的) 본성에 이르는 경계가 될 것 이오.” 운곡 선사는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이 아직 무심의 경계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준제주 (準堤呪)를 암송 회수를 세지도 않고 연속적으로 그리고 간단없이 외우는 수행은 할 수 있소. 당신이 더 높은 수준인 부단히 잊지 않은 경계에 이르면, 당신은 외우면서 외우지 않고 외우지 않으면서 외우는 경계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이 더 이상 망념을 갖지 않을 때, 주(呪)는 영험이 있을 것 이오” ]
지혜를 배우고 수행하는 것이 참된 지식이다. 내재적 본성(本性)이 “본래의 경계(境界)로 돌아가는 것이다(返本還源).” 우리 본래의 참된 성품이 나타나는 이것은 보통 사람의 경계 (境界)가 아니다. 본래의 경계가 진정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법희(法喜)로 충만하고 고통을 떠나 행복을 얻는 것 (離苦得樂) 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 구하는 것이다.
“원만한 수행과 원만한 성취 (圓修 圓證)” 로 부르는 이 방법을 운곡 선사가 가르쳤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戒)정(定)혜(慧)를 따르는 3학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한다. 화엄경에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 (一卽一切 一切卽一)” 라고 설해졌다. 수행의 요체는 간단없이 그리고 다른 생각이나 방법을 섞지 않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암송 회수를 셀 필요가 있을까? 운곡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그러지 말고 단지 끊임없이 암송하라고만 하였다. 많은 옛 현인들이 수행자들에게 처음에는 회수를 세어가며 암송하도록 요구했다. 왜냐? 그들이 우리처럼 개을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겐 하루에 일만 번씩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처럼 하루의 목표를 갖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목표를 채우는 것이 개으름의 나쁜 습관을 퇴치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암송 회수를 세지 않으면 수행하기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요범 선생처럼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에겐 암송 회수를 계산할 필요가 없다. 그에겐 그렇게 하는 것이 생각들을 섞는 것이 된다. 그의 수행은 진실한 공부였고 정진이었다. 따라서 그는 간단없이 그리고 다른 생각이나 방법을 섞지 않고 수행하였다.
모든 방법들이 같다. 어느 것도 다른 것과 다르지 않다. 성취는 오랜 기간 오직 한 방법으로 깊이 들어감에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대개 독경(讀經)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경전을 독송하건, 주(呪)나 부처님 명호를 외우건 우리는 청정하고 평등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수행하면, 진실로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다.
“무심(無心)”의 경지가 관건(關鍵)이다. 이것은 어떤 망념이나 분별심(分別心)이나 애착을 갖지 않는 것이다. 비록 요범 선생이 운곡 선사와 참선한 3일간 어떠한 망념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는 아직 무심의 경지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집중이 아닌 믿음을 이용하여 번뇌를 억눌렀다. 그는 모든 것이 운명지어 졌다고 믿었다. 그는 인과(因果)를 믿었다. 따라서 선사는 그에게 다음 수준으로 나아가는 길, 집중(集中,定)의 수행을 가르쳤다. 준제주(準堤呪)를 암송하는 것은 끊임없이 집중의 수행(修定) 을 하는 것이다. 망념과 애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서 우리의 진성 (眞性)이 나타난다.
부처님은 자주 “법이자연(法爾自然)” 을 말씀하셨다. 정토수행자는 이것을 일심불란이 진실로 그리고 완벽하게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 수행의 목표이다. 이것이 “ 외우면서 외우지 않고, 외우지 않으면서 외우는 ”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종종 “ 외우는 행위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외우면서 외우지 않고, 외우지 않으면서 외우는 것 ” 이라고 설명된다. 우리는 부처님 명호를 외우나 경전을 독송하거나 이렇게 한다. 우리가 무량수경을 집착 없이 독송할 때, 먼저 끊임없는 아미타불 염불의 경지에 그리고 다음에 일심불란의 경지에 이른다. 비록 방법들이 다를지언정 원리와 목표는 같다. 우리가 무심의 경지에 이르면 암송은 우리의 제2의 천성이 되어 자연스레 감응(感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취에 3가지 수준이 있다. 상위의 수준은 깨달음의 일심불란 (理一心不亂)이고 , 중위의 수준은 잊지 않은 일심불란 (事一心不亂)이고 하위인 첫 수준은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 功夫成片 )이다. 우리의 성취가 어떤 수준에 이르렀을 때 만족할 수 없다. 그리하면 우리가 더 향상하는 것에 지장이 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염불의 상위 수준에 이르면 우리는 마음대로 이 세상을 초월하고, 언제고 원할 때 떠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언제고 우리가 가기를 원하면, 아미타 부처님이 우리를 서방 정토로 인도하러 오실 것이다. 비록 우리가 이 수준의 성취를 이루어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도 이 세상에 더 오래 머무는 것이 최선(最善)이다. 왜냐? 우리는 무량수경에서 이 사바세계에서 하루 수행하는 것이 정토에서 백년 수행하는 것과 같다고 읽는다. 우리는 이곳에 우리의 인욕을 수행하기 위하여 머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정토로 가는 것을 격려하기 위하여 머문다.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도 같이 그곳에 왕생할수록 도울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좋은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가르치고 격려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도 같이 하도록 고무할 수 있다면 우리의 공덕은 완전해 진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깨달은 분들이 우리에게 베푼 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11 )
[ 내 이름은 본래 “넓게 배우다 ”는 뜻의 학해 (學海)였다. 그러나 운곡 선사로부터 이 가르침을 배운 후 이름을 “평범(平凡)함을 초월하다”는 뜻인 요범(了凡)으로 바꾸었다.]
과거에 중국 사람들은 3벌의 이름을 가졌다: 즉 공식적인 이름(名)과 예의적인 이름(字) 그리고 가장한 이름(號)이다. 공식적인 이름은 부모가 자식들에 대한 희망을 담아 지워 준 이름이다. 이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 희망을 저버리는 것과 같아 진실로 불효한 행동이다. 남자가 20세 그리고 여자가 16세에 이르러 성인이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 공식적인 이름들로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르는 것이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이 때 그들은 성인이 되는 의식(冠禮)을 갖는다. 이 의식에서 동년배나 더 나이 많은 형제나 같이 공부하는 친구나 그냥 친구가 예의적인 이름을 지어주고 이 이름을 나머지 평생토록 쓴다. 훗날 어떤 사람이 관리나 또는 비록 황제가 된다 해도 사람들은 그를 이 예의적인 이름(字)으로 부른다. 만일 어떤 성인(成人)이 공식적인 이름(名)으로 불린다면 아마 틀림없이 그가 범죄를 저질러 구형받아 처벌되는 경우일 것이다.
더욱 존경해야할 경우에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가장한 이름(號) 또는 그가 태어난 지명(地名)으로 부른다. 이것은 그가 어떤 특정한 곳 출신인 매우 존경받는 중요한 인물임을 가리킨다.
요범과 학해는 요범 선생의 가장한 이름들이다. 오직 부모와 스승만이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된 후에도 공식적인 이름으로 부르고, 조부모나 삼촌이나 황제까지도 예의적인 이름으로 부른다. 이리하여, 사회가 스승에게도 그 부모와 동등한 감사와 존경을 부여했다.
[ 이것은 내가 우리가 우리 운명을 재창조할 수 있음을 알고, 운명에 지배받는 다른 범인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생각하거나 행하는 일은 무엇이건 매우 조심하기 시작했다. 곧, 나는 예전과 사뭇 달라짐을 느꼈다. 이전에는 나는 조심성이 없었고 자제할 줄 몰랐다. 지금, 나는 내가 자연스레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되었음을 발견한다. ]
이 부분은 요범 선생이 그의 잘못들을 고치도록 수행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결심을 이야기 한다. 먼저, 그는 그의 가장한 이름을 학해에서 요범으로 고쳤다. “요(了)” 는 이해와 각성을 의미한다. “범(凡)”은 범인임을 의미한다. 요범은 세상일을 이해하고 우리가 우리 운명을 재창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시점에서, 그는 세상 모든 일을 이해했고 깨달았다. 그는 진실로 오직 개인만이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원리와 방법을 이해했고, 그때부터 그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그가 개심(改心)하기로 결심한 후, 모든 것에 대한 그의 감각이 변했다. 그 때부터 그가 인생을 마칠 때가지 줄곧 그는 끊임없이 그의 생각과 행동을 의식했고, 항상 방심하지 않았고, 더 이상 미혹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자제할 줄 몰랐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고, 날마다 목적 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는 그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 왔던가? 그는 방향도 목표도 없었으므로 어떤 생각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운명에 구속되고, 밝은 미래를 재창조 할 수 없게 된다.
개심한 후, 그는 자신이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서 자연스레 조심스러워 지고 주의 깊어짐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고친 후 인생과 우주에 관한 그의 믿음과 견해가 극적으로 변했다. 이전에는 그는 모든 것이 운명에 구속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운명을 재창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단호하고 낙관적이 되었다.
[ 나는 홀로 있을 때에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한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알 수 있는 하늘과 땅의 귀신들이 어디에나 존재함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 때문에 그들이 화내지 않도록 조심한다. 비록 나를 싫어하거나 중상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그들의 모욕을 인내와 평화로운 마음으로 견디고, 굳이 그들과 다투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
보통 사람들이 개심할 수 없는 것은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 더 정통한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생각, 말과 행동에서 요범 선생보다 더 조심스러워 질 수 있다.
정토(淨土)의 인구는 수로 셀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이 세계의 모든 컴퓨터를 동원해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계산할 수 없다. 이들 각자는 모두 아미타 부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진다. 모두 모든 것을 보는 천안(天眼)과 모든 것을 듣는 천이(天耳)를 가지며 온 우주 모든 존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생각을 아는 능력을 갖는다. 이래서 아미타 부처님, 대자비보살, 대세지보살과 정토의 모든 존재들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나쁜 짓을 안다.
비록 우리가 아무도 우리를 볼 수 없는 곳에 홀로 있어도 우리는 스스로 자제하고 단 하나의 삿된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진실로 자기 훈련과 제어를 이룰 수 있다. 정토 수행자로서 우리는 정토왕생과 스스로 덕행(德行)의 성취를 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속인다면 우리는 성취할 수 없다. 공자는 고상한 사람은 홀로 있을 때도 조심한다(君子愼獨) 고 말했다. 홀로 살면서도 우리는 자신을 훈련하고 방종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진실로 수행하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어떠한 실제적인 자제도 없이 끊임없이 방종 한다. 공공연히는 조심하고 자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제 멋대로 한다.
이것이 과거의 도량에 많은 수행자들이 한 방을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만약 방 하나에 한 사람만 있다면 그는 수행에서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방에 10인 이상이 있으면 모두가 항상 바르게 처신한다. 이것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자기 훈련을 강요하는 것이다.
오늘 날 스스로 자제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고 쾌락을 즐기는데 열중한다. 좋다! 우리는 이승에서 인생을 즐길 수 있고 깨달음의 길에서 성공하지 못한 탓으로 내생에도 또한 3악도(三惡道)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큰 단체 안에서 살게 되면 모두 함께 일할 필요가 있다. 도량에 작은 독방(獨房)들이 몇 개 있지만 이것들은 특별히 연로한 수행자들의 몫이다. 또한 높은 지위에 있거나 주지나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어 많은 책임을 가진 스님들은 독방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함으로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고 언제든지 일을 감독할 수 있다. 따라서 진실한 수행자는 6화(六和)의 하나인 “ 조화롭게 함께 사는 것 (身和同住) ”을 실행한다.
한 개인이 독방을 갖는 것은 부적절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두서너 사람이 한방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 나는 저 사람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아 ”라고 쉽게 생각할 것이다. 이러면 이 사람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끊임없이 아미타부처님을 염불(念佛功夫成片)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왜냐? 이들은 분별하고 청정하지 못한 마음 즉 불쾌함을 싫어하고 피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곳에서 청정하고 분별하지 않은 마음을 닦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같이 살거나 또는 사귀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잘못 된 일이다. 요범 선생은 그 자신의 허물들을 찾아 진실하게 이를 고쳤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허물들을 다룰 때, 우리는 이들을 고치는 대신 끊임없이 자기변명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할 때, 우리가 어떻게 수행에 성공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승단(僧團) 안에서 수행의 출발점은 단체 속에서 함께 살 때 따라야 할 기본 지침인 6화경(六和敬)이다. 모든 개인은 5계(五戒)와 10선(十善)을 지킬 수 있다. 과거에 도량에서는 사미률의(沙彌律儀)를 기준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10계(十戒)와 24문위의(二十四門威儀)를 포함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까지 엄격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은 재가 불자나 비구 비구니이건 5계와 10선을 기준으로 사용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기준이 그 이하로 내려갈 수는 없다.
단체 속에서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6화경을 지켜 우리의 허물과 나쁜 버릇들을 고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요범 선생은 그를 싫어하거나 심지어는 중상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신경 안 쓰는 그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들의 모욕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참을 수 있었고 더 이상 굳이 그들과 다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경박하고 참을성 없어 조그마한 불편이나 부당한 대우도 참을 수 없었던 전과는 달리 평온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수행함으로서 개선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참다운 불교 수행자는 깨달은 존재이건 또는 악마나 귀신일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누구하고라도 잘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들은 환경이나 상황에 무관하게 내면의 평화를 찾아 이에 머무를 필요가 있다.
선(禪)의 6조 혜능(慧能) 대사께서 깨달으신 후 사냥꾼들의 시중꾼 노릇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매일 그는 그들이 사냥하고 살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고기를 대접하고 그들을 보살폈다. 사냥꾼들이 그의 주인이었고 그는 그들의 하인이었다. 그는 이 일을 짧은 기간이 아니고 무려 15년간 했다.
우리라면 이를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는 이를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만족했고 어떠한 분별하는 망상이나 애착도 가지지 않았다. 이것이 15년 동안의 진정한 수행이다. 그는 중국 남부의 황매(黃梅)에 있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 상황이 좋건 나쁘건 그는 청정한 마음, 평등한 마음, 대자비의 마음 , 그리고 친절한 마음을 닦아 나갔다. 우리의 수행에서 이 4가지 덕성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없고, 이들을 그가 닦았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상황들에 관계할 때, 우리는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에서도 마음의 청정을 닦아나가는가? 만일 우리가 마음의 청정을 닦아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올바르게 불교를 수행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혜택도 입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학문적 추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매일 경전들을 독송하고 이들을 매우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어도, 우리의 번뇌는 더욱 증대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3악도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참된 수행자들은 문자(文字)들, 말해진 것(言說相), 이름 지어진 것(名字相), 또는 생각(心緣相)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직관(直觀)을 사용한다. 이들은 우리의 본성(本性)인 청정한 마음, 무분별의 진심(眞心)을 찾는다. 이들은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찾는다.
정토수행자인 우리들에게는 또한 청정하고 평등한 마음 즉 끊임없는 아미타불 염불(功夫成片)을 성취하는 것이 목표이다. 끊임없는 염불은 오염되지 않은 무분별의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진심(眞心)에는 아무런 장애도 없다. 만일 우리가 아직 분별하는 생각과 집착을 갖고 있다면 끊임없는 염불을 이룰 수 없다. 이러한 분별심과 집착을 끊으면, 우리는 끊임없는 염불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수행이다.
[ 내가 운곡 선사를 만난 그 다음해, 나는 공 선생이 3등하리라고 예언한 예부(禮部) 과거시험을 보았다. 놀랍게도, 나는 1등을 했다! 공 선생의 예언은 틀리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전혀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 하리라 예언했는데 그해 가을 나는 합격했다! ]
요범 선생은 시험에 3등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선행을 하고 공덕을 쌓음으로서 그는 그의 지위를 3등에서 1등으로 끌어 올렸다. 공 선생의 예언이 틀리기 시작하자 요범 선생은 그가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는 상수뿐만이 아니라 변수가 있음을 직접 보았다.
다음에, 그는 더 상위 시험에 합격하는 원을 세웠고 다시 그의 원은 이루어 졌다. 우리가 가질 수 없도록 운명 지워진 것을 얻는 것이 진실로 구하여 얻은 것이다.
[ 비록 내가 많은 허물들은 고쳤지만,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성심으로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내가 그 일들을 하였어도, 강요된 것이었고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마음 속으로 반성했고 아직도 많은 결점이 있음을 알아냈다. 예로서 선행을 해야 할 기회를 보고도 충분히 열성적이지 못 했던 것 또는 남을 도울 때 의심을 했던 것 등이다.
때로는 억지로 친절하게 행동하려고 했었으나, 내 말은 아직도 자제함이 없고 불쾌했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자제할 수 있었으나, 몇 잔 마시면 자제력을 잃고 행동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었다. 비록 내가 가끔 선행을 하고 공덕을 쌓기도 했지만, 내 허물과 잘못이 너무 많아서 내가 한 선행보다 더 무거운 것처럼 보였다. 많은 시간을 쓸데없이 그리고 가치 없이 낭비해 버렸다. ]
우리가 남을 도울 때 아무런 대가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에. 공자와 다른 성인들은 5 가지 인간의 관계 ( 五倫 )과 10 가지 도덕적 책임 ( 十義 )를 우리에게 가르쳤다. 전통적인 도덕적 원리에 의거한 5 가지 인간의 관계는 부부(夫婦), 부자(父子), 형제(兄弟) 친구 그리고 군신(君臣)간의 인간적 관계를 포함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우리 본성의 덕(性德)이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들을 보호하고, 사랑하고 교도(敎導)하는 것처럼 당연히 우리의 책임에 속한다. 자식으로서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분들을 명예롭게 하고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에 속한다. 형제이거나 친구이거나 모두 서로 존경해야 한다. 친구로서는 서로 믿을 수 있고, 정직하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리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
요범 선생은 비록 아직 완전하고 청정하게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이해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들이 아직도 개인적 이익 및 불이익과 섞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의심하게 되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청정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성심껏 도울 수 없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비록 선행을 한다 해도 아직 충분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자께서 “다른 사람들이 선을 이루도록 돕는 것 (成仁之美)” 에 있는 공덕과 선이 공덕임을 가르치셨다. 우리가 남들이 선행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왜냐? 하나의 선행이 지역 사회 그리고 그 이상으로 전 사회에까지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서, 도로 하나를 수리할 필요가 있고 어떤 사람이 자원해서 이를 수리 하려고 나서면 우리는 그 사람이 그 일을 끝낼 수 있도록 열성적으로 도울 수 있다. 사회에 이익을 가져오는 이러한 종류의 일은 우리 모두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요범 선생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동참은 할 수 있었지만 열성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조금만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는 아직도 어려운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의심했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많은 우리들은 우리가 그래야 하는지 회의적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우리는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중 일부는 방탕 하는데 낭비하려고 돈을 요구하는 사기꾼들이다. 이러한 일이 생기면 우리의 선행이 나쁜 일이 된다. 따라서 선행을 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 하여는 자비와 함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비는 남을 돕는 일의 배후에 있는 순수한 추진력이지만 지혜는 우리가 도와야 할지 말지를 조사하고 판단하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그래야 한다면 우리는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우리를 속이려하고 또 우리가 그들이 하는 짓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교도할 필요가 있다. 만일 그들이 늙거나 병들지 않고 건강하고 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살기 위하여 바르지 못한 수단을 쓰는 대신 올바른 일을 하도록 격려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고치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과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시작 단계에서 어려움이 불가피하다. 말은 조심성도 없고 분별없이 하면서 행동만 예의바르게 하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예로부터 말은 행운과 불행의 원인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말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우리에게 네 가지 공부(四科)를 가르치셨다. 그중 첫째는 덕행(德行)이고 이것이 품위 있는 사람이 되는 기초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도덕교육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에 관심이 적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공부는 언어이다. 공자는 우리가 사려 깊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언어를 적절히 그리고 공경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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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12 )
우리는 종종 조심성 없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우리가 상처를 준 사람들이 화가 나서 원한을 품고 훗날 보복할지 모른다. 이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오해로 생기고, 우리가 말한 것들 때문에 원한이 생긴다. “말하는 사람은 그러한 의도가 없었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게 이해했다.(說者無心 聽者有意)” 우리들은 말을 조심하고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 적게 말할수록 실수가 적어질 것이다.
우리자신의 성취를 위해서는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또한 다른 정토수행자들도 역시 아미타불을 부름으로서 마음을 청정히 닦도록 격려해야한다. 이리하여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험담하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냥 아미타불을 부른다. 더 많이 험담하면 또 다시 아미타불 부른다. 그들로 하여금 이 염불을 몇 번 듣도록 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그치면 우리는 들었지만 그들이 말한 것을 무시해버린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들에게 아미타불을 염불해준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좋다. 왜냐하면 많이 말하지 않은 것이 가장 좋기 때문에. 우리들은 요범 선생이 너무 많이 말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 것을 알았었다.
술을 제한하는 것이 불교에서 오계(五戒)의 하나이다. 부처님은 사람들이 술에 취하면 어리석게 행동함으로 음주를 금했다. 따라서, 계는 우리에게 한 방울도 마셔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금한다. 왜냐? 우리가 자제력을 잃고 추가로 다른 계들을 깨트리는 등의 문제를 일으킬까 두렵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술을 적당히 마시고 취하지 않는다면 이 계에 대한 예외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과거에 내가 대만 태중(台中)에서 공부할 때 나의 작고하신 스승 이 병남(李 炳南) 선생이 례기(禮記)를 강의하셨다. 동한 (東漢) 시대의 박식한 학자인 정 강성(鄭 康成) 선생이 직관과 덕이 결합된 례기에 관한 주석(註釋)을 지었다. 정 선생은 그 당시 또 하나의 뛰어난 학자인 마 융(馬 融)선생의 제자였다. 그러나, 마음이 좁은 마 선생은 그 제자 중 한 사람의 업적이 그의 업적을 능가할 때마다 매우 불쾌해 하였는데 정 선생의 업적이 바로 그러했다. 그러한 상황을 감수할 수 없어 그는 그의 뛰어난 제자를 죽이려고 어떤 사람을 고용했다!
정 선생이 그 선생을 떠날 때, 마 선생은 제자들을 마을에서 10 리 떨어진 곳 정자에 대려가 송별연(送別宴)을 열고 모두에게 건배(乾杯)하도록 권하였다. 결국 정 선생은 300잔을 마셨다! 마 선생은 정 선생을 취하게 만들어 살인자로 하여금 더욱 쉽게 죽이도록 계획하였었다. 그는 술이 정 선생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음을 몰랐다. 정 선생은 시종 예절바르고 품위 있었다. 이 선생은 만일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많이 마시고도 취하지 않은 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결코 이 계를 만드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왜 우리에게 이 계와 다른 계들을 주셨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재가 불교 수행자들이 요리할 때, 맛을 내기 위하여 포도주를 사용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취하지는 않을 터니까. 또한 술은 혈액 순환을 도우므로 노인들이 식사 때 한 잔쯤 마시는 것은 괜찮다. 이 경우들은 예외이지 범계(犯戒)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불자들에게 먹지 않도록 권하는 오신채(五辛菜)가 있다. 즉 마늘, 달래, 무릇, 김장파, 실파들이다. 마늘은 특별히 금한다. 왜 부처님이 이 들을 금하는가? 능엄경에서 마음의 청정이 수행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이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떠한 성취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과 음료는 우리의 판단에 해로운 영향을 준다. 일단 우리가 어떤 경지에 이르러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면 우리는 환경에 영향 받는 대신에 이를 좌우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떠한 장애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이 오신채를 날로 먹으면 흥분하기 쉽게 된다고 가르치셨다. 이들을 요리해 먹으면 호르몬 분비와 성적 충동을 증대시킨다. 이래서 부처님이 이러한 계를 정하신 이유가 있다. 날로 먹거나 익혀 먹거나 이 오신채는 우리의 번뇌를 키우기 때문에 금지되어있다.
어떤 재가 신자들은 만일 그들이 이러한 오신채들을 먹을 수 없다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에 관심 없다고 이야기 해왔다. 우리는 이 것을 금하는 배후의 목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 채소들이 요리에 맛을 내기 위하여 한두 개의 마늘을 쓸 때처럼 양념으로 사용한다면 어떠한 해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추론(推論)을 이해한다면 불교가 매우 논리적이고, 융통성이 있고, 합리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계를 받은 후에도 이들을 엄격히 지키는데 예외가 있다. 이러한 예외들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불교를 소개하고 모든 사람들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현명하게 처신하고 상황에 우리를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 사람이 이 가르침을 만난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드문 기회이므로 우리는 가르침을 남들에게 소개하는데 어떠한 기회도 모두 이용해야 한다. 술을 마시거나 식사할 때도 우리는 그들에게 불교를 설명하고 선근(善根)을 심어줄 수 있다. 이들은 낭비해서는 안 될 드문 교육적 기회들이다.
[ 내가 하기로 맹세한 3천 선행을 마치는데 10년 이상이 걸렸다. 수년 후 내가 남쪽에 있는 내 고향에 돌아 올 때까지 나는 이 3천 선행의 공덕을 절에서 회향할 수 없었다. 그 때 나는 두 스님에게 나를 위해 그 공덕을 회향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
요범 선생이 군(軍)에 직책을 가져 항상 여행해야 했음으로 그 공덕을 회향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맹세한 3천 선행을 다 실행한 해가 지나기 전까지 그는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어떤 절의 몇 스님에게 그 대신에 공덕을 회향하는 불사를 약속받았다. 그가 서원을 발했을 때, 그는 진실하고 간절하게 새 인생을 열고 공덕을 쌓겠다고 맹세하였다. 3천 선행을 완수한 후, 그는 이 공덕을 은혜에 보답하고 그의 소원을 이루는데 바쳤다.
[ 그리고 자식을 구하는 둘째 원을 발했다. 나는 또 하나의 3천 선행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몇 년 후, 너의 어머니가 너를 낳았고 천계(天啓)라고 이름 지었다. ]
요범 선생은 자식을 가질 운명이 아니었으나, 갖겠다는 원을 세운 후 그 것이 이루어 짐을 보았다. “올바르게 구하면 얻게 될 것이다” 그는 그의 소원을 옳은 추구와 수행으로 이루었다. 그가 두 번째 3천 선행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처가 첫 아들 천계를 낳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진실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원을 세우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그가 맹세한 3천 선행을 완수하기도 전에 아들을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맹세를 지켜나갔다. 이 것은 전에 일어난 일과 같다. 그는 과거 시험을 보았다. 그가 그의 맹세한 바를 끝내기도 전에 3등으로 합격하게 될 운명이었으나 1등으로 합격하였다. 이것이 일치하는 것(感應道交)이고, 이러한 일치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실로 불가사의하다.
[ 내가 하나의 선행을 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책에 기록하였다. 너의 어머니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음으로 잉크에 적신 거위 깃털을 이용하였다. 그녀는 하나의 선행을 할 때마다 달력 위에 붉은 원을 그렸다. 때로 그녀는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시장에서 생물들을 사서 들판에 놓아주었다. 그녀는 모든 이런 일들을 달력 위에 원을 그려 기록하였다. 때로는 그녀는 하루에 열개 이상의 원을 그리기도 했다! ]
만일 우리가 붙잡힌 동물들을 풀어줄 마음이 있다면, 속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들을 사서 단지 풀어주기 위하여 애완동물 가게로 간다. 그러나, 이 동물들은 이 목적을 위하여 특별히 붙잡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수요(需要)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 가게들은 더 많이 잡아 가득 채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더 많은 동물들을 위태롭게 하고 좋은 일 보다 더욱 많은 해를 끼친다. 그 결과로 우리는 공덕보다 오히려 죄를 쌓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동물들을 풀어줄려고 할 때 우리가 식료품 가게에 가서 우연히 만난 것들에게만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의도적으로 그들을 찾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한 대신 그렇게 할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우연히 하나를 마주치게 되면 그것이 독자적으로 살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사지 않고 대신 그 돈을 다른 공덕을 쌓는데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들은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으로가 아니라 지혜롭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붙잡힌 생명들을 풀어주는 것은 단지 동물들이나 새들을 자유롭게 놔주는 것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채식주의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존재들을 죽이지 않고 사랑하도록 격려하는 것도 포함한다. 예로서, 우리는 “인생의 사랑”으로 불리는 책을 인쇄하여 무료로 나누어 줄 수 있다. 이 책은 더 많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생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진실로 방생(放生)의 본질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 그냥 하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진 것들의 배후에 있는 정신과 깊은 의미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보시로 말하자면, 재시(財施), 법시(法施)와 무외시(無畏施)를 포함하는 많은 종류가 있다. 이들 각기 불가사의하게 넓고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요범 선생과 그의 처는 악행을 삼가고 선행을 했었다. 분명히 그들은 때때로 하루에 하나의 선행도 못하고 며칠 걸리던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이것이 처음 맹세한 3천 선행을 끝내는데 10년이 걸린 이유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하루에 10 이상의 선행을 할 수 있었고 이것은 대단한 진보였다. 개심(改心)하기는 매우 어려웠으나 그들은 모두 끈기와 인내심으로 그렇게 했다. 의지와 결심 없이 우리의 나쁜 습관들과 허물들을 뿌리 뽑는 것이 쉽지 않다. 이것이 많은 우리들이 깨달음의 길에서 진보보다 후퇴를 더 많이 하는 이유이다.
[ 매일 우리는 이렇게 실행했고 4년에 3천 선행을 완수했다. 또 나는 전의 그 두 스님들을 이번에는 내 집으로 초청하여 그 공덕을 회향했다. 그해 9월 13일에 나는 최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는 세 번째 소원을 세웠다. 나는 또한 1만 선행을 하기로 맹세하였다. 3년 후 나는 시험에 합격하여 소원을 성취했다. 또한 보지(寶?)현의 현장(縣長)이 되었다. ]
첫 번째는 3천 선행을 완수하는데 10년 이상이 걸렸지만 두 번째는 1580년에서 1583년까지 오직 4년만 걸렸다.
요범 선생은 이 특별한 과거 시험에 합격할 운명이 아니었다. 또한 자식을 가질 운명이 아니었지만 구하고 수행해서 하나를 얻었다. 비록 그가 시험에 합격할 운명이 아니었지만 합격을 바란 그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이것 또한 변수이다. 운곡 선사가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 진실임이 증명된 것이다. 이제 그는 일만 선행을 완수하기로 맹세 하였다. 이 맹세를 한 후 단 3년이 지난 1586년에 기대한데로 그는 시험에 합격하는 소원을 이루었다.
이 후 그는 조정(朝廷)으로부터 북경에 가까운 보지현의 현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위는 원래 그의 운명이 아니었다. 그전에는 그는 북경에서 먼 중국 남서부 사천(四川) 한 현(縣)의 현장(懸長)이 될 운명이었다.
[ 나는 내 공덕과 허물을 기록하는 치심편(治心編)이라는 작은 책을 만들었다. 내가 매일 아침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할 때 하인이 그 책을 가져와 문지기로 하여금 내 책상 위에 놓도록 하였다. 나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 지라도 좋건 나쁘건 내 행동을 기록하였다. 밤에는 나는 송나라의 관리인 조 열도(趙 閱道) 선생을 본받아 안뜰에 제단을 세우고 관복을 입었다. 나는 향을 사루고 내 모든 행동을 하늘에 보고했다. ]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관리가 된 후 공무(公務)의 처리와 남에게 행운을 만들어 주려는 그의 바람에 대하여 그가 어떻게 느꼈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 당시에는 시장이나 현장은 선출되지 않고 조정에서 임명했다. 요범 선생은 매우 좋은 현장이었다. 그는 비행을 삼가고 선행을 닦고 공덕을 쌓았다. 취임 초기에 그는 빈 책을 만들어 치심편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매일 착하거나 악한 생각이나 행동들을 기록하는데 그 책을 사용하여 그가 언제 맹세한 일만 선행을 완수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조심하였다.
밤에는 그는 천제(天帝)와 귀신에게 그가 그날 한 모든 일을 숨김없이 보고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이를 따라했다. 몸과 마음이 청정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모든 것을 시인해야 한다. 불자들은 이것을 “대중에게 고백하고 사죄하는 것(發露懺悔)”이라 부른다.
[ 한때 너의 어머니가 내가 많은 공덕을 쌓지 못한 것을 보고 걱정했다. 전에는 그녀가 우리가 선행을 쌓는데 나를 도울 수 있었고 우리는 삼천 선행을 완수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일만의 더 많은 선행을 하기로 맹세했으나 공관에서 그 일을 할 기회가 더 적었었다. 그녀는 내가 내 맹세를 완수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걱정했다. ]
관리가 되기 전에는 요범 선생은 그처럼 일로 바쁘지는 않았다. 그의 처 역시 그가 선행을 하는 것을 돕는 것이 쉬었다. 그러나 관리로서 그와 그의 처는 공관에서 살았다. 그 당시에는 공관에 사는 사람들, 특히 그들의 가족들과 대중과의 접촉이 적었다. 따라서 그의 처는 더 이상 그가 수행하고 공덕을 쌓는 일을 도울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 그들이 맹세한 바를 이행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 그날 밤 그는 한 신인(神人)을 꿈꾸었는데 그에게 일만 선행을 완수하는 어려움을 이야기 했다. 그 신인은 내가 현장이 되어 농지에 대한 세금을 감면한 것을 상기시켰다. 그 한 선행이 일만 선행의 값어치가 있었다. 나의 맹세는 이미 완수된 것이었다!
내가 시장이 되었을 때, 보지현의 농부들에게 과다한 세금이 징수되었었는데 나는 그것을 거의 반으로 감면해 주었다. 나는 어리둥절했고 아직도 의심을 가졌었다. 어떻게 단 하나의 선행이 일만 선행의 값어치가 있다는 것일까? ]
세금의 감면은 상당했고 그 현의 모든 농민들에게 이익을 주었다. 실제로 그 현의 일만이 훨씬 넘는 농민들이 혜택을 입었다. 이리하여 이 일이 쉽게 맹세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이유로 불편했다. 어떻게 신인이 그가 한 일을 알았고 또 어떻게 이 한 행위가 그렇게 많은 공덕의 가치가 될 수 있었을까?
이로부터 우리는 왜 정부의 공직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좋은 자리라고 말하는 지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통상 행운과 공덕을 닦을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갖지 못한다. 만일 요범 선생이 현장이 되지 않았다면 그가 맹세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 것인가? 그 때, 그는 관직을 가졌음으로 하나의 행위로 수천의 농부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한 선행이 일만 선행과 동등하였던 것이다.
공덕을 쌓는 것이 쉬운 것은 마치 악행을 범하는 것이 쉬운 것과 같다. 만일 국가의 정책이 국민을 이롭게 하지 않고 해롭게 하면 이 행위는 일만의 비행이 된다. 행운과 불행은 우리의 생각에 달려있다. 우리의 지위가 높을수록 행운이나 불운을 만들 가능성이 더 커진다. 예로서, 만일 어떤 현의 지도자가 한 정책을 실행하여 모든 시민들에게 유익한 것이 증명되면 실제로 수천 아니 수백만의 선행을 이루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마일 그 지도자가 해로운 정책을 실행하면 그는 수천 아니 수백만의 악행을 범한 셈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기회들이 제한되어 있음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과 악에도 제한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위와 신분이 있어 기회를 갖게 되면 그는 모든 행동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행을 닦음으로서 그는 밝은 미래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틀림없이 삼악도에 떨어져 그 곳에서 고통을 당할 것이다. 왜냐? 그의 높은 지위와 신분 때문에 그의 행동들의 결과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13 )
[ 때마침, 환여(幻余) 선사가 오대산(五臺山)으로부터 여행길을 떠나 보지(寶?)에 들리셨다. 나는 그 분을 관저에 초청하여 내 꿈 이야기를 하고 믿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선사는 말씀했다: “만일 사람이 이렇게 진실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행을 할 수 있다면 하나의 행동이 일만 공덕의 가치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현(縣)에서 세금을 감면한 당신의 조치는 일천이 넘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다! ]
꿈을 꾼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우연히 선사를 만나게 되어 맹세를 완수한 것이 가능했던 것인지 물어보았다. 만일 그의 맹세가 정말로 완수되었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러한 행동을 완수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했었다. 환여 선사는 그에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진실로 행한 하나의 행동이 일만 선행의 공덕에 값나갈 수 있다.
이 원리 즉 “하나를 닦는 것이 모든 것을 닦는 것이다 (一修一切修)” 가 화엄경에 설해져 있다. 그것이 무애(無碍)를 배우고 닦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진성(眞性)에서 일어난다. 만일 수행이 진성과 합치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진성으로부터 비롯하지 않은 선행들을 한다면, 우리가 구하기 때문에 구하는 것만 얻을 뿐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진성으로부터 구한다면 우리는 구하는 것을 얻을 뿐만 아니라 무한한 이익을 얻을 것이다.
무엇이 마음의 본성인가? 이해하기 쉬운 하나의 예가 정토종에서 청정심(淸淨心)이라 불리 운다. 우리의 마음이 청정할 때 우리의 모든 행위는 선행이 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단지 일만 선행뿐만 아니라 이를 훨씬 초과하는 공덕을 쌓게 된다. 아미타불은 무량한 공덕을 가진 명호이다. 우리가 점차로 실상(實相)을 알게 됨에 따라 우익(藕益) 조사가 말한바 즉 아미타불이 무한한 수행 방법을 그 안에 포함한다는 것이 논리적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말씀 하셨다: “우리가 아미타불을 염불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불교 대 경전의 지혜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선종의 1700 공안(公案)의 인도(引導)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선종과 다른 종파들의 수행이 모두 아미타불 안에 포함되어 있다. 우익 조사는 또한 3천위의(三千威儀), 8만세행(八萬細行), 3취정계(三聚淨戒)가 모두 아미타불 안에 있다고 말씀했다. 모든 계(戒),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세속적인 가르침들이 또한 아미타불에 포함되어있다. 모든 방법, 모든 수행법이 이 명호 안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 ( 一卽一切 一切卽一)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청정을 얻었을 때, 우리는 무량한 방법들을 완전히 얻은 것이다. 아직도 아미타불 명호 안에 있는 무한한 이익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생각들을 일으킬 때, 모든 부처님, 보살, 천지(天地)의 귀신들이 이것을 안다. 진심(眞心)은 한계나 경계가 없음으로 우리가 아무리 사소한 행동을 해도 만일 이 한 생각이 우리의 진성(眞性)으로부터 나오면 그것은 진심과 합치하게 된다. 그러면 그 행위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결과는 전 우주에 이익을 준다. 요범 선생은 아직 이 경지의 마음에 이르지 못 했다. 그는 단지 사상적(事相的) 이익을 대중에게 주었을 뿐이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의 선행을 하면 이 행위는 실로 일만 선행의 공덕에 값나간다. 환여 선사는 요범 선생에게 현에서 세금을 감해준 그의 조치는 모든 농부들을 무거운 세금의 고통에서 구해 주었고 일만이 넘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범 선생은 아직 이점을 이해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가 완수한 일만 선행은 사상적(事相的) 측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 일을 그의 진성으로부터 했다면 즉 그의 진심으로부터 수행했다면 하나의 선행이 단지 일만이 아니라 무량한 선행의 공덕에 값나갔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필요한 것을 보고 일 달라(dollar)를 그저 주면 이 공덕은 우리의 진성과 합치한다. 왜냐하면 그 때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과 우리 그리고 구걸하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분별심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을 분별하지 않았다. 우리는 집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일 달라를 주는 공덕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이 것은 우리의 성덕(性德)을 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수 백만 달라를 주는 공덕이 진실한 마음으로 준 일 달라의 공덕보다 적을 수 있다. 왜냐? 우리가 이 돈을 우리의 8식(八識)들로부터 주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분별하는 생각과 집착하는 이러한 마음은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분별하는 이러한 장애를 깨뜨릴 수 없다.
우리의 공덕이 부처님과 보살의 공덕과 비교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마음과 의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환경은 마음에 따라 변한다. 보통사람으로서 우리들의 마음은 좁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행운과 공덕을 우리가 닦은 다 해도 우리는 분별하는 생각과 집착에 의하여 구속된다. 그러나 이것들이 더 이상 보살이나 아라한을 구속하지는 못한다. 비록 그들이 작은 일을 한다 해도 그들의 공덕은 무한하다. 이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생각은 원만해 지고 우리의 공덕은 무한해 질 것이다. 요범 선생은 아직 이러한 마음의 경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상적(事相的) 측면에서 실행했고 따라서 오직 일만 명의 사람들에게만 이익을 주었을 뿐이다.
[ 이 말을 듣고 나는 내 모든 저축을 그 분께 오대산으로 갖고 가도록 드렸다. 나는 그 돈을 일만 스님의 음식을 공양하는데 쓰고 그 공덕을 나를 위해 회향하도록 부탁드렸다. ]
요범 선생과 같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의 저축을 일만 스님의 음식 공양을 위하여 주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보통 재가 불자가 아량을 보이고 싶을 때, 일천 스님들의 음식을 제공 한다. 그러나 요범 선생은 일만 선행을 하기로 한 그의 큰 맹세를 이루기 위하여 일만 스님에게 그러하기를 원했다.
우(尤) 선생은 그의 주석에서 설명했다: “싫어함이나 인색한 마음이 조금도 없이 그렇게 빨리 관대하게 주기로 결심한 사람은 그 보답으로 무한한 행운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발적인 관대함은 요범 선생이 정직하고 전혀 부패하지 않은 관리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가 일만 스님들의 음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저축금을 주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돈을 그가 가질 수 있었을까? 그는 가난하나 정직한 가문의 출신이다. 그는 매우 비범해서 인과의 법칙을 깊이 이해하고 믿었다. 그는 그의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어떤 것도 취하지 않았었다. 우리가 선행을 할 때, 대부분의 우리는 아주 적게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좋은 원인을 위해 100 달라를 주고 스스로 매우 기뻐할지 모른다. 요범 선생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었다. 그는 실로 매우 희귀한 사람이었다.
[ 공 선생은 내가 53세에 죽으리라 예언했다. 그러나 나는 하늘에게 장수를 구한바 없지만 병 없이 그 해를 넘겼다. 지금 나는 69세이다. ]
요범 선생은 53세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것은 매우 정확한 예언이었다. 가혹한 재난을 당해 그는 8월 14일 오전 1시에서 3시 사이에 그는 집에서 죽게 되어있었다. 요범 선생은 그의 책을 69세에 썼다. 그는 53세를 넘어 살기를 구하지 않았지만 그해를 아무런 가혹한 재난도 맞지 않고 건강하게 넘겼다.
분명히 생사(生死)와 장수(長壽)는 우리 인생에서 지극히 중요한 문제들이다. 만일 장수가 구해질 수 있다면 구해서 얻을 수 없는 무엇이 있겠는가? 장수하지 않고서는 성취도 공명, 부귀와 자식의 즐거움도 구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구하는 것은 가르침과 합치하여 지극히 진실한 마음과 가슴으로 온당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만일 우리 밖으로부터 구한다면 운곡 선사가 말했듯이 안과 밖에서 모두 잃게 된다. 우리가 불자로서 행운, 지혜 그리고 정토왕생을 구하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행운, 장수 및 천상에 태어나기를 구하건, 온당하고 진실하게 구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정말로 우리들은 더 많은 행운, 훨씬 더 긴 수명 그리고 손자들을 구하여 얻을 수 있다.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요범 선생이 그의 운명의 상수를 완전히 초월하여 행운, 장수와 자식들을 얻었음을 보았다. 이것들은 그에게 운명 지워진 것이 아니었음으로 수행을 통하여 얻은 것이다.
[ 서경(書經)에 설명되었다. “운명은 존재하나 변할 수 있다” ]
서경은 고대 시대의 법령과 규정의 제도를 기록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문헌이다. 우리의 운명은 수(數)의 계산에 의하여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 상수, 운명은 존재하나 그것이 그대로 머물리라고 믿기는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가감승제(加減乘除)에 의한 변수들이 존재하게 때문이다.
요범 선생은 악행을 하는 것을 삼가고 선행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점차 악행을 줄이고 선행을 늘여나갔다. 세금을 감면한 그의 조치는 더하는 것이 아니고 곱하는 것의 하나가 되었다. 이리하여 일만의 선행이 며칠 사이에 완전하게 수행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나쁜 일을 많이 했다면 그것은 한 순간에 그것은 빼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행동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결과로 더하고 빼는 것 만 아니라 곱하는 것이 되는 행동들이 있다. 이것들이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는 변수들이다.
상수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고정된 것들이 아니고 변한다.
서경은 운명은 존재하나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 어렵다고 설명한다.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은 “불운이나 행운도 이유나 조건 없이 오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불러 온다 ( 禍福無門 惟人自招)” 라고 부연(敷衍)한다. 다른 말로 그들은 우리가 과거에 한 행동들이 가져온 보복이나 보상이다.
[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고 우리자신에 의하여 창조되고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이 진실이다. ]
이것도 역시 서경에서 나온 말로서, 공덕의 수행과 변수가 어떻게 상수를 능가하는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옛 성인과 유덕한 사람들의 가르침들은 진리이고 따라서 변하지 않는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들을 “경”이라 부른다. 우리가 그 가르침들을 오늘에 적용해도 아직도 틀림이 없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믿지 않고 대신 우리들의 의견들을 따라 비행을 저지르면 우리들은 단지 우리들의 죄만 증대시킬 뿐이다. 비록 우리가 조그만 이익을 얻을 지래도 단지 우리 운명에 의하여 갖게 된 것을 얻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덕을 닦는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가 얻은 것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부(富)를 지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수명(壽命)도 지속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수명을 지속할 수 없다면 거대한 재산을 가져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세상은 언제나 재난들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우리들은 어느 순간에도 생명을 잃을지 모른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다른 무엇을 갖는 것이 중요할까?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진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것이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普賢菩薩行願品)”에 분명히 설해졌다.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우리 가족이나 친구들, 위신, 또는 재산, 어느 것도 내생으로 가져갈 수 없다. 이것들에서 어떤 것도 가져가지 못 한다! 우리가 함께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를 끊임없이 지녀 정토로 우리를 인도하는 보현보살의 10대원왕(十大願王)이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업을 빼고는 아무 것도 내생으로 가져갈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의해야할 중요한 말이다. 우리의 업이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옴을 알 때, 우리들은 부지런히 선행을 닦아 나쁜 업을 우리와 함께 내생으로 가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쁜 업은 우리를 3악도(三惡道)로 이끌기 때문에. 좋은 업은 우리를 3선도(三善道)로 이끈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미타불을 염불함에서 비롯한 청정한 업은 우리를 서방정토에 왕생하도록 인도한다. 이로부터 우리가 금생에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해 진다. 우리는 사소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우리의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대신에 우리의 지각(知覺)을 넓히고 사고(思考)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매우 짧다. 만일 우리가 금생에 더 많은 선행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면 엄청난 공덕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옛 성인과 유덕한 사람들의 가르침들을 읽고 이를 믿고, 받아들이고 또 지킬 수가 있다면 우리는 무한한 공덕과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가르침들을 의지할 수 없는 동화(童話)라고 생각하고 믿을 수 없다면 이것은 우리 업장(業障)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이 무상(無上)의 수승한 기회를 놓질 것이다.
[ 나는 행운과 불운이 모두 우리 자신의 행동의 결과임을 믿게 되었다. 이것은 진실로 성인과 유덕한 사람들의 말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운과 불행이 하늘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보통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
이것들은 요범 선생의 깨달음의 말들이다. 위대한 성인이나 유덕한 사람들은 참된 지혜가 있어 실상(實相)을 명확히 볼 수 있다. 부처님과 보살들은 무상의 성인들이다.
이 진술은 상수에 관하여 말한다. 공 선생이 요범 선생의 운명을 예언한 것은 통속적인 이론에 근거했다. 운곡 선사가 그의 운명을 바꾸는 것에 관하여 가르쳐 준 것은 성인과 유덕한 사람들의 가르침들이다. 이것을 알 때, 왜 우리가 우리 운명에 관한 예언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점 잘 치는 사람의 조언을 구할 필요가 있는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성인과 유덕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믿고 우리의 운명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고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밝고 빛나게 재창조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 천계, 내 아들아. 나는 네 일생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구나? 우리는 항상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따라서, 번영할 때에도 그러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한다. 일이 네 뜻 데로 잘 풀릴 때, 역경을 생각해라. 네가 충분한 음식과 의복을 가졌을 때, 궁핍을 생각해라. ]
요범 선생의 운명은 정확하게 예언되었으나 그의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무슨 일이 그 아들에게 생길지 알지 못 했다. 실제로, 알 필요가 없었다. 요범 선생은 그에게 번영할 때에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함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비록 그가 큰 재산과 사회적 신분을 얻고 권력과 세력을 가진 고위 관리가 될 지라도 그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때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 비록 미래에 우리가 번영하게 되어도 겸손하고 예절바르게 남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부와 위신을 가졌다고 오만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겸손하게 남을 수 있다면 우리는 참된 덕과 행운을 기를 것이다.
모든 일이 매우 잘 되어나갈 때일지 라도 우리들은 어려웠던 시간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여 일들이 우리 뜻 데로 진행될 때에도 우리들은 조심스럽게 지낼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충분하고도 남는 음식과 의복을 갖고 있을 때에도 우리들은 근검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부와 위신을 가질 때 항상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도덕과 선행을 높일 수 있다.
한 좋은 예가 매우 가난한 집안의 출신인 범 중엄 (范 仲淹) 선생이다. 그가 젊어서 도량에서 공부할 때 먹을 것이 적었다. 가난한 상황에서 살면서 그는 매일 죽 한 단지를 만들어서 4개로 나누어 식사 때 마다 하나를 먹었다. 그가 그 후에 성공하여 정승이 되었을 때, 그는 황제의 직접 감독을 받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 (一人之下 萬人之上). 그러나 그는 그의 소박한 생활양식을 견지했고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가 더 많이 벌었을 때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도와주었다. 그의 전기로부터 우리는 그가 300이 넘는 가정들을 도왔음을 알게 된다! 그의 수입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부양하는 일을 도와줌으로 우리는 그가 가난한 상태로 살 수 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진실로 중국의 가장 위대한 현인 중의 한분이다. 인광 (印光) 대사의 그분에 대한 존경은 오직 공자 다음이었다. 범 선생의 자손들은 그분이 일백 세대가 넘는 자손들이 누릴 공덕을 쌓았으므로 20세기 초까지 번영하였다. 공자의 가족이 오래되고 잘 알려진 가족으로서는 수위(首位)이고 그 다음이 범 선생의 가계(家系)로서 그의 예외적인 수행과 공덕의 쌓음으로 800년간 튼튼했다. 그의 자손들은 남을 돕는 가족의 전통을 지켜왔다. 중국 역사를 통하여 이렇게 많은 공덕을 쌓은 가족은 드물다.
우리는 커다란 행운은 남과 함께 나누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누리는 행운이 끝없는 것이 될 것임으로.
제 1 교훈 운명을 세우는 공부 ( 14 )
[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때 두려워하고 조심해라. 가족이 크게 존경받을 때 너 스스로 겸손히 처신해라. 그리고 너의 배움이 넓고 깊을 때, 항상 네가 더 많이 배울수록 아는 것이 더 적다고 느껴라. ]
기대하지 않은 호의에 놀라다(受寵若驚)는 옛 중국의 격언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러한 돌봄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우리들은 끊임없이 우리들의 부족함을 걱정하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덕을 닦음에 정진하고,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겸손하고 우리의 앎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오만을 뿌리 뽑는데 도움이 된다. 오만은 5가지 큰 번뇌 중의 하나이고 다른 4가지 번뇌인 탐욕, 화냄, 무지 및 의심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들은 번뇌를 근절하는 일을 시작하기 위하여 겸허함을 닦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완전하게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성덕(性德)을 나타내어 공덕의 수행에서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 과거에 관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우리 조상들의 공덕을 선양(宣揚)하는 가를 생각할 수 있다. 현재에는 우리 부모들의 허물을 어떻게 덮는 가를 생각할 수 있다. 나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는 가를 생각할 수 있다. 가족에 관해서는 어떻게 가족의 행운을 가져오는 가를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는 우리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가를 생각하라. 그리고 우리의 내부에 관해서는 어떻게 삿된 생각과 행동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가를 생각해라. ]
여기에서 요범 선생은 우리에게 운명을 재창조하는 중요한 열쇠를 주고 있다. 우리의 생각들이 우리의 덕과 도덕을 증대하고 선행을 개발하는 지침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 중국의 교육은 우리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사람과 귀신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가르쳤다. 그것은 우리에게 조상들의 공덕을 명예롭게 하고 알리기 위하여 항상 먼 과거를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도덕과 학문 그리고 사업에서 사회로부터 존경받으면 우리는 우리 조상들을 명예롭게 하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배후의 추진력은 무엇인가? 부, 명예 그리고 권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들을 얻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만일 얻을 부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려고 하겠는가? 거의 없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배후의 추진력은 효도였다. 조상과 부모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명예롭게 하기위하여 그들 대신에 공덕을 쌓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 추진력이 부, 명예, 그리고 권위를 위한 추진력보다 훨씬 가치 있고 고상하다. 이것이 수 천 년 간 중국 문화와 유교적(儒敎的) 가르침의 전통이 되어왔었다.
불교도 역시 효도의 기초 위에 서 있다. 이리하여, 효도가 중국 문화의 궁극적 뿌리이자 기초임으로 제사(祭祀)와 사당(祠堂)의 건립은 높이 평가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부모와 조상에게 효도할 수 있다면, 우리의 뿌리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바르게 생각하고 처신하고 그리고 악행을 삼갈 수 있을 것이다.
“ 현재에는 우리 부모들의 허물을 어떻게 덮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 이것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자녀들이 효도하고 사회에 공헌한 바 있으면, 비록 부모들이 작은 죄를 범했어도 사람들이 이를 눈감아주고 그렇게 효성스러운 자식들을 기른 것을 칭찬할 것이다.
“ 나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 가를 생각할 수 있다 ” 우리 위에 나라나 또는 정부가 있어 국민들에게 책임감 있는 지도자, 부모, 그리고 스승의 임무와 그리고 사람들이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고 일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임무를 갖는다. 그 보답으로 국민은 나라에 충성하고 애국하고 그들 자신을 바칠 수 있다.
“ 가족에 관해서는 어떻게 가족의 행운을 가져올 수 있는 가를 생각할 수 있다. ” 우리 아래로는 가족이 있다. 가족을 생각한다는 것은 단지 핵(核)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생각했던 확장된 가족을 의미한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단지 직계 뿐 만이 아니고 전체의 행운을 창조하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따라서 한 사람이 행운을 얻으면 확장된 가족이 그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 다른 사람에 관해서는 우리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가를 생각해라. ” 항상 사회의 이익을 생각하라. 우리들은 사회에 봉사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행운을 창조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오늘 날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도덕 교육을 부활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 우리 내부에 관해서는 어떻게 삿된 생각과 행동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가를 생각해라. ” 우리들은 망념과 분수에 어긋난 생각을 억누르고 우리가 하기로 된 일들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과도한 야망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해 우리의 책임을 완수할 수 있다면 사회는 행복하고 조화로워 지고 세계는 평화로워 질 것이다. 맹자는 말했다, “만일 고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그들의 책임을 다할 수 있다면 진리가 드러날 것이다 ( 君子本務 本立而道生 ).”
유교의 가르침에서 이 책무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 친구, 그리고 지도자와 추종자를 포함하는 인간 사이의 다섯 가지 관계(五倫)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가족과 사회의 행운을 창조하기 위하여 사회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책무를 성실하고 부지런히 완수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매일 우리의 허물들을 찾고 이를 즉시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허물들을 찾아낼 수 없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허물들을 고칠 수 없다면 향상이 불가능 할 것이다. ]
각성 - 깨달음의 시작 - 은 매일 우리들의 허물을 찾을 수 있음이다. 우리가 처음 등각보살(等覺菩薩)이 되려는 서원을 세울 때 이 과정을 시작한다. 우리가 매일 우리의 허물들을 발견하면 그것들을 고쳐야 한다. 이것이 수행이다. 이것이 위대한 성인과 유덕한 사람들의 수행에서 참된 성취이자 우리 운명을 바꾸고 고통을 떠나 행복을 얻는 열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一生)에서 유덕한 사람이나 성자가 될 수 없고 수행에서 성취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매일 우리의 허물을 아는 것이 매일 깨닫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한 허물을 찾으면 우리는 진지하게 그것을 고친다; 이것이 우리의 수행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만일 하루에 하나의 허물만 찾아 고쳐나가면 3년이면 성인이나 유덕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미타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수행자로서 만일 우리가 매일 하나의 허물을 고치고 염불할 수 있다면 3년만 지나면 우리는 정토의 상품이나 중품에 왕생할 것이다. 이것이 부처가 되는 수행법이다. 문제는 우리가 기꺼이 진실하게 그렇게 하느냐에 있다. 만일 우리가 매일 하나의 허물도 찾을 수 없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허물들을 알지 못하면 그것들을 고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 우리가 어떻게 향상하리라 바랄 수 있겠는가? 향상이 없을 때 퇴전(退轉)이 있다. 우리 자신이 결코 잘못이 없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다.
[ 세상에는 도덕과 공덕의 수행이나 하는 일에서 향상할 수 없는 수많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있다. 금생에서 그들이 실패는 개으름 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 탓이다. ]
만일 우리가 현재 만을 위하여 살고 게으르면 우리는 운명에 구속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서 죽고, 죽은 후 어디로 가고 하는 것이 모두 우리의 운명과 일치한다. 운곡 선사는 정해진 운명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이러한 사람들을 보통 사람, 속물로 불렀다. 그들이 부처님이 “ 불쌍한 사람들 ”로 불렀던 사람들이다. 요범 선생이 그 자식에게 가르쳤던 이 원리들은 세간(世間)의 교육과 불교를 위한 원리들로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
[ 천계야, 운곡 선사의 가르침들은 가장 귀하고, 심오하고, 실제적이고 적합하다. 나는 네가 이들을 잘 배워서 부지런히 실행하기를 바란다.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고 무익하게 보내지 말라. ]
요범 선생은 운곡 선사가 그의 운명을 바꾸는데 가르쳐 주었던 원리와 방법들을 주의 깊게 적어 그 자식 또한 이 방법을 따라 수행하기를 바라면서 자식에게 넘겨주었다. 요범 선생은 이 수행으로부터 훌륭한 결과를 얻었고 따라서 선사가 가르쳐준 모든 원리와 방법들을 확고히 믿었다.
우리들이 운곡 선사의 가르침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이에 매우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가르침들을 끊임없이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을 맛보고 우리 행동의 기초로 활용하고 이를 열심히 수행하게 될 것이다. 금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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