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15.12.19[일] 산청[남명 조식] 답사

강나루터 2017. 4. 10. 06:53

교육활동 기본계획

 

1.일자: 20151219(토요일)

2.장소: 산청일원(남명기념관, 산천재, 덕천서원, 남사예담촌, 문익점목화시배지)

출발시간 및 장소 : 2015121908:00 사하 전신전화국 맞은편

도착시간 및 장소 : 2015121917:30 사하 전신전화국 앞

3.참가자

(1) 교사( 2): 김세열(010.8369.3643). 박경연

(2) 학생( 29):

4.준비물 : , 긴옷, 배낭, 손수건, 모자, 필기구, 메모장, 개인상비약 등

5.행사일정

시간

장소

체험 내용

이동수단

12/19()

08:00

사하 전신전화국 맞은편

 

버스

10:30-11:00

문익점목화시배지 기념관

055.973.2445

 

11:00-12:00

남사예담촌

노창문해설사

010.2987.9984

 

12:10-13:00

점심식사

노들강변(쌈밥) 055.973.4493

 

13:10-14:00

남명기념관

조종명선생님(이후~)

 

14:00-14:30

산천재

남명학

 

14:40-15:10

덕천서원

서원의 역사와 선비체험

 

17:30-

사하 전신전화국

종료 후 가정에 도착유무 보고

 

 

 

 

 

 

 

 

 

 

 

 

 

 

 

 

 

 

 

문익점 시배지에서

 

문익점시배지 단체로..

 

 

남사예담촌의 600년 감나무

 

 

사양정사

 

남사예담촌에서 - 살아 있는 눈빛들

 

남사마을의 이모저모

남사마을의 사당

 

 

 

 

 

 

 

남사 마을의 대표와 같이 되어 버린 부부 회화나무

 

 

 

 

 

 

남명 조식 기념관에서--조종명선생님의 강연과 열공 중인 애들

 

 

 

 

 

산천재의 이모저모

 

 

 

산천재에서 단체

 

덕천서원 입구의 세심정

 

 

덕천서원에서 마지막 공수례로 마무리 하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해설사를 그만 두시는 조종명선생님과 함께.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하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출생 : 1501년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626일 부친 언형(승문원 판교를 지냄)과 모친 인천 이씨(이국의 딸, 좌의정 최윤덕의 외손녀)35녀중 2남으로 태어남.

* 외가인 이씨의 집이 명당으로 닭띠 해에 태어나는 아기는 자라서 현인이 된다고 예언했는데 선생이 닭띠 해인 신유년 생.

* 외조부는 외손자를 보아 기뻐하면서도 자기네 운이 사위의 집안으로 갔다며 아쉬워 함.

 

성장 : -남명(南冥)-건중.

- 17: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느라 두 손에 물그릇을 들고 밤을 샘.

- 20: 생원. 진사 양과 1.2등 급제함. 기묘사화(1595)로 조광조 등이 죽음을 당하고 숙부(언경)도 이에 연루되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잘못된 정치의 폐단을 슬퍼하며 벼슬 단념.

- 26: 부친 상. 가난과 싸우며 서민들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 사상 속에 항상 민생을 잊지 못한 것은 이때 어려움을 직접 겪었기 때문.

- 30: 처가(김해)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山海亭: 태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는 기상)을 짓고 학문을 정진하면서 제자를 가르침. 기묘사화 후 무너진 사기(士氣)를 응집.

- 48: 고향인 삼가의 토동으로 돌아와 계부당(닭이 알을 품는다는 뜻. 정신수양과 인재양성의 도장)과 뇌룡정(연못처럼 고요하다 용의 꿈틀거림처럼 뇌성을 발함. 초야에 사는 처사로서 냉정하게 세상을 살피다 가차 없이 국정을 비판하고 국책을 건의함)을 짓고 제자를 가르침.

- 55: 을묘년의 사직상소문(단성소(丹城疏))를 올려 사림의 기개를 드높임.

- 61: 진주목 덕산의 사륜동에 산천재를 지어 후진을 양성. <산천(山天): 주역의 대축괘의 상징으로 대축이란 선현의 말씀과 행실을 많이 배워 그 은택을 비축한다는 뜻>.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궁마, 항진 등의 학문도 가르쳐 임란 시 제자 중 의병장이 50여명 배출 국난극복의 원동력이 됨(곽재우, 정인홍 등).

- 66: 선조임금이 여러번 벼슬를 내리자 독대하여 치국방책과 학문의 요령 등 정책 진언. 일생동안 선비의 삶을 올곧게 지키며 국정의 쇄신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함.

- 72: 157228일 산천재에서 운명함. 운명 전 문병 온 노옥계, 김우옹, 정구, 하항에게 사후 칭호는 처사로 할 것과 자기의 학문은 경의(敬義)

* 4대 사화(士禍)

1)무오사화(史禍)(연산군 4.1498):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김일손·권오복·이목 등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

-계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 회왕(의제)을 추모하는 제사문으로, 세조에게 살해 당해 물에 던져진 단종의 상활과 유사아혀 세조의 왕위을 비꼼)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것이 발단.  

-사초와 관련되어 사화(史禍)라 함.

2) 갑자사화(연산군 10.1504):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로 훈구, 사림 등 많은 선비가 죽고, 부관참시 당함. 훈구+사림세력에 의해 연산군 축출 당함.

3)기묘사화(중종 14.1519):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김정, 김식 등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공신의 위훈삭제,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破字)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함으로써 위기의식을 갖게

4)을사사화1545(명종 즉위)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 일파의 정쟁으로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

-계기: 중종: 1계비 윤씨(장경황후)-인종, 2계비 윤씨(문정황후)-명종을 낳음.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 후 8개월 후 죽고, 명종 즉위 후 보위를 굳게 하기 위해 사림파를 통해 대윤파를 제거하고자 했으나 사림파가 반대함. 중신을 이용해 대윤파을 제거하고 이에 사림파가 부당함을 주장하므로 일부 사림파도 화를 당함.

2. 사상

1) 학문의 형성과정

<소년기> : 일반 사대부의 자제들처럼 육경과 사서를 읽음

<청년기> :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고, 현실에서 실천을 표방함. 관념적보다 행동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으로 자칫 현실과 타협에 빠지기 쉬우나 전혀 현실과 타협이 없었고, 높은 뜻과 기상을 가짐. 이는 노장사상과 불교 등 여러 학문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

<25세 산사> : 성리대전을 읽고 성현의 학문과 뜻을 일생의 지표로 세우고 정진 함. 안연을 닮고자 수행함.

<25세 이후> : 성리학과 원시유학 즉 안연의 고풍, 맹자의 의리, 대장부론, 호연지기를 체득하고 관념론적 이론이 아닌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을 이루어 성실신의를 근본으로 하고, ‘정신수양정의실현을 위주로 사회도덕민생구제’ ‘국방안전을 강론하고 일상에서 사리에 올바르게 실천 함.

 

2)()과 의(): 두 글자로 집약.

() :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

() : 경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일을 대처함에 있어 밝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

패검(경의검)내명자는 경이요, 외단자는 의하고 새겨 항상 휴대함.

행동을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나, 행동 이전의 근본을 세우는 것을 더욱 중요시 함. 지식을 섭득함과 담력과 정신력을 기른 이유도 광명정대한 학문도 의지를 갖춘 뒤에 확고하면서도 적절한 행동이 뒤따라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를 동시에 강조 함. 조선조 실학의 선구자.

선생은 삶이 일치되는 것을 강조하였고, 항상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을 마음 아파하며 위민 정치를 역설

3) 우국애민의 선비정신
군신관계 :

- 상하주종관계 정치체제(군신간의 위상은 영구히 바뀌지 않는다)횡적 평등관계(외민사상)로 주장: <민암부> 지음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원시유가를 주장.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엎을 수도 있는 것처럼, 백성은 군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뒤엎기도 한다. 물은 백성이요, 배는 임금이다. 배는 물 위에서 배이지, 물이 배의 물일 수 없다. 고로 배는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하듯이 백성을 두려워해야 된다

관민관계 : 친민사상(親民: 백성과 함께 한다) 주장.

- 신민(주자: 백성을 깨운다)위민(왕양명: 백성을 위한다)친민을 주장.

 

<선비>, <처사>의 개념과 역할

- <처사>: 운동 경기의 심판장과 같은 것으로 세상의 돌아감을 지켜보고, 올바른 도리를 밝혀 전하고, 그 마저 어려움에 처할 때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도리를 밝히고, 도덕을 전파하고 인간의 올바른 도리를 수련하는 사도.

- <선비>:

선비의 직능: 백성의 편에 서서 통치자를 올바르게 비판하고, 공정하고 깨끗한 언론을 일깨우는 것

선비의 사명: 한 사회국가 속에서 국외자의 안목과 주체적 입장에서 정의와 합리에 기초한 가치기준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나라와 백성의 노고에 보답하는 길.

선비는 위와 같은 사명과 직능을 갖는 것이므로 선비의 나아감과 물러섬이 가벼울 수 없다. 정의와 진리, 진실과 허상을 엄격히 구분 함.

선비가 현실정치에 실패하는 원인: 귄세에 유혹되고, 허명에 만족하고, 권세를 탐해 탈취하고, 상하좌우의 눈치나 살피고, 사로써 공을 움직이고, 관직이나 차지하므로 실제 일은 해낼 수가 없기 때문.

집권자는 선비의 비판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실제 할 일도, 권한도 없는 한직에 명망 있는 선비를 끌어들이는데 허명을 좋아하는 선비는 모두 이 낚시밥에 걸려든다고 주장.

 

<>: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역사문화를 추동하는 주체로서 선비정신을 일깨우고, 속되고 부패한 선비를 질타하여 지식인 사회의 기풍을 되살림.

 

3. 신명사도

1) 신명사도 해설

신명사도는 인간이 안팎으로 마음을 다스려 지극한 선에 도달하는 것을 도식화한 것으로, 군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 지치를 이룩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마음 다스리는 것을 나라를 다스리는데 비유한 것은 마음을 잘 다스리기가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가 심학에 있다는 것을 뜻함.

 

2) 신명사도의 구성원리

크게 원곽내(원형의 그림), 원곽외, 하면으로 되어 있다. 원곽내는 존양, 원곽외는 성찰(省察)-심기(心機), 극치(克治), 하면(下面)은 수양(修養)의 목표인 지어지선(至於至善)을 나타냄.

원곽내: 인간의 신체를 뜻하고, 이 안에 신체를 주재하는 태일군(太一君)이 거주. 태일군이 거주하는 집이 신명사(神明舍)이다.

태일군은 인간의 마음, 곧 신명이다. 마음 다스리는 것을 나라 다스리는 것에 비유했기 때문에 태일군이라 했다. 임금이 정사를 펼 때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이고, 이것은 인간이 마음을 수양할 때도 지표가 되는 것이다. 천덕은 외물과 접촉을 통해 내적으로 다지는 마음가짐이고, 왕도는 외물과 접촉을 통해 시비, 선악, 사정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 ()이다. 따라서 원곽내은 태일군이 천덕과 왕도를 펴는 곳으로 총재인 경이 모든 일을 관장한다.

원곽외: 인간의 신체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칭한다. 원곽외의 일은 백규(百揆)와 대사구(大司寇)가 담당하는데, 백규는 ()를 기준으로 심기의 사심이나 사욕을 치찰(致察)하고, 대사구는 그것을 극치(克治)한다. 그렇게 하여 지어지선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면(下面): ()-지지지지(知至至之)와 지()-지종종지(至終從之)가 있는데, 이것은 주역의 진덕(進德)과 거업(居業)을 뜻한다. 학자가 공부를 하면 반드시 지어지선에 뜻을 두어야 하는데, 그것은 충신, 치지의 진덕과 입성(立誠), 역행(力行)의 거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지어지선에 도달하는 학문의 시종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면은 학문의 시종과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4. 문화재

 

1)덕천서원

덕천서원 입구에는 450여년 된 은행나무가 그 역사를 말해 주는 듯 서원을 지켜보고 있고 앞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덕천서원을 마주보고 강가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이곳은 지리산에서 발원된 물이 중산리 쪽과 대원사 쪽에서 내려오는 천()이 합류하여 덕천강을 이룬다. 이곳을 무릉도원이라고도 부르는 시가 있다.

두류산(頭流山)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으라
아이야, 무릉(武陵)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그리고 세심정 옆에는 큰 돌에 선생님의 시가 새겨져 있다.
욕천(浴川) 냇물에 목욕하고서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사십 년 동안 더렵혀져 온 이네 몸. 천 섬 되는 맑은 깊은 못에 싹 씻어 버린다.
만약 오장(五臟)속에서 티끌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 갈라 흐르는 물에 던지리라

이 시를 살펴보면 1549년 거창의 감악산을 유람할 때 삼가와 함양 등지의 선비들과 목욕하며 읊은<욕천浴川>이라는 시() 인데 선생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학문과 삶이 잘 나타나 있다. 처절하리만큼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지켜가려는 굳은 의지가 이시에 매섭게 표현되어 있다.

 

2) [산천재]

請看千石鍾(청간천석종).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십만근 나가는 크다란 종을 보소서! 크게치지 않으면 소리나지 않는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頭流山)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조그만 종은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소리가 나지만, 아주 큰 종은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사람은 조그만 유혹에도 넘어가지만, 큰 인물은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지절을 지킨다. 때가 되어 자신의 경륜을 펼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질 때 세상에 나가서 일한다. 지리산은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쳐도 그 본래 모습을 조금도 변치 않는다. 남명은 지리산을 단순이 좋아한 것이 아니고 지리산에서 그런 자세를 배우고자하여 지리산이 잘 보이는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살면서 자신의 인격을 도야해 나갔던 것이다.
산천(山川)이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산천재 네기둥에는 다음의 시가 새겨져 있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마는. 다만 천왕봉 하늘나라 가까와 사랑한다네.
맨손으로 들어와서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리니 먹고도 남겠네.

남명은 지리산을 사랑하여 열두 번 찾아갔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서 마침내 덕산에 살 곳을 정하고 산천재를 지었다. 장중한 지리산 천왕봉의 기상과 맑은 덕천강 흐르는 물에 남명은 감정없는 자연으로 보지 않고 살아 있는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다. 천왕봉처럼 장중하게 덕천강처럼 깨끗한 인물이 되고자 스스로 기약했던 것이다.

3) [묘소]
국가문화재 사적 305호인 산천군 시천면 사리에 위치한 이곳 기념관 뒤편 200m 위치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157228일에 72세로 별세하자 3개월의 빈장(殯葬)을 치른뒤 46일 여기에 모심. 선생이 생전에 직접 정해 두었던 곳이라 함. 묘소는 정남향에서 동쪽으로 15도 기운(壬坐原)방향으로 쓰여졌다. 비문은 선생의 가장 친한 벗이였던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이 지었다. 선생의 묘소 아래는 숙부인(淑夫人) 은진 송씨의 묘가 있고 정경부인(貞敬夫人)의 묘는 부인의 고향인 김해 산해정의 앞산에 있다.

4)단속사지(斷俗寺址) ,서 삼층석탑
보물 제72,73호로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위치.

단속사지의 법당자리 앞에 동, 서로 세워졌던 통일신라시대(헌강왕)의 쌍탑. 기단은 이중으로 아래 기단은 각 면이 하나의 돌로 구성되고, 수평을 이루고 있는 지붕돌 아래에는 다섯 개의 옥개석 주름이 있음.

동서 두 탑은 양식이나 규모가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으나 서탑은 파손이 심한 편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1967년 해체 보수 때에 서탑의 1층 몸돌의 윗부분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넣은 둥근 모양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이 탑들은 신라계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다소의 생략을 보이는 9세기 석탑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100m 앞에는 당간지주

길이 356, 직경50의 당간지주 2기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체 방치되어 있는 것을 845월 부분을 찾아 1기는 복원하고 1기는 부분만 복원 현존하고 있다.

단속사지 터 뒤편에는 정당매(政堂梅).

이곳 정당매는 통정공 강희백 선생과 통계공 강희중 형제분께서 사월리 오룡골에서 출생하여 유년시절 지리산 자락 신라고찰 단속사에서 수학(修學) 할 때 심은 매화나무다. 그 후 통정선생께서 벼슬이 정당문학겸 대사헌에 이르렀다하여 후대인들과 승려들로부터 정당매라 불리면서 630여년 오늘 날까지 보존되어 오던 중 19821110일부터 경상남도 보호수 12-41 260호로 지정되었다.

원정공 하즙(河楫)선생께서 심은 원정매(元正梅), 통정공께서 심은 정당매(政堂梅), 남명 조식 선생께서 심은 남명매(南冥梅)를 산청의 삼매(三梅)로 불린다.
이곳 역시 남명선생 시비(詩碑)가 있다.
증 산인 유정(贈 山人 惟政: 유정 산인에게 준다).
花落槽淵石(화락조연석), 春深古寺臺(춘심고사대)
別時勤記取(별시근기취), 靑子正堂梅(청자정당매)
꽃은 조연(槽淵)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를
이 시는 남명선생이 단속사에 들린 사명당에게 준 시다.

5)삼가 토동 뇌룡정에서
뇌룡정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29호로 남명선생은 48세 때 부터 61(1561) 때 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장소.
양기둥에 연묵이뇌성(淵黙而雷聲),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이라 쓰여 있다.
어원은 장자莊子』『재유在宥에서 따온 글로서 뜻은 깊은 연못처럼 고요히 침참해 있다가 때가되면 천둥처럼 세상을 울리고,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신묘한 조화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또한 시내 건너 산기슭에 계부당(鷄伏堂:계부는 닭이 알을 품는다는 뜻)을 지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근처 절벽에는 선생의 노닐던 곳인 영파대(暎波臺)가 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일명 단성소(丹城疏))를 지어 올린 곳도 바로 이곳이다.

    

南冥의 신명사도(神明舍圖)에 나타난  ()-원문-번역문

 

 신명사명(神明舍銘)

안으로 자아를 완성하는 것이 이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이다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하는>

태일진군(太一眞君)                    

명당(明堂)에서 정사(政事)를 편다.  

집 안에서는 총재( )가 관장하고,      

밖에서는 백규(百揆)가 살핀다

추밀(樞密)을 받들어 言語의 출납을 맡아,

진실되고 미덥게 언어로 표현한다
네 글자의 부절(符節)을 발부하고

백 가지 금지(禁止)의 깃발을 세운다.

아홉 구멍의 사악(邪惡)함도,  

세 군데 요처(要處)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낌새가 있자 마자 용감하게 이겨내고,

나아가 반드시 섬멸[ ]토록 한다

승리를 임금께 보고하니,      

요순(堯舜)의 세월이로다.

세가지 관문을 닫아두니

맑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 있다.  

하나에로 되돌아가니, -돌아가    

 시동(尸童)과도 같으며 연못과도 같도다.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으며,   

마음에는 두 주인이 없다.

삼천 명이 한 마음이 되면

억만의 군사도 쓰러뜨린다.  

사악한 마음을 막아 정성을 보존하며,

언어의 표현을 다듬어 정성스런 마음을 세우라.

정밀하고 한결같은 경지를 추구하려거든

()을 통하여 들어가라

마음의 소리는 메아리와 같고,   

그 자취는 인장(印章)과 같으니라

內明者敬

外斷者義

 

太一眞君 

明堂布政

內家宰主

外百揆省

承樞出納

忠信修辭

發四字符

建百勿旂

九竅之邪

三要始發

動微勇克

進敎厮殺

 丹墀 復命

堯舜日月

三關閉塞

淸野無邊

還歸一

尸而淵

國無二君

心無二主

三千惟一

億萬則仆

閑邪存

修辭立

求精一

由敬入

心聲如響

其跡如印

  
                     

 

 

 

 

 

 

출처 : 청산/김세열
글쓴이 : 청산-김세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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