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328

나제 통문

인 여행 ...... 534. 전북 무주군 설천면의 라제통문 댓글 113 관광인, 실체교류 2021. 12. 18. 구천동 33경 중 제 1경, 덕유산국립공원, 두길리 신두마을,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 석견산 바위굴, 설천장날, 소천리 이남 마을, 언어 풍속 판이하게 다름, 일제강점기., 전략적 중요지점 관광인 여행 ........... 534. 전북 무주군 설천면의 라제통문(羅濟通門) 무주설천 : 라제통문(羅濟通門) 무주 설천면의 라제통문(羅濟通門)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설천면의 두길리 신두(新斗)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석견산(石絹山)에 위치한 바위굴이다. 높이 3m, 길이 10m에 이르며, 구천동 33경 중 제1경이며,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역사 이야기 2021.12.21

일본 도조 이삼평

昔暗 조헌섭 2021.11.25 07:45 신고 수정/삭제 답글 블벗님! 소설이 지나니 추워 지려나 봅니다. 일본 도자기의 원조는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40여 명 충남 공주 출신인 이삼평은 일본에서 고령토를 발견해 일본 백자를 만든 최초의 인물로, 이삼평을 기린 신사(神祀)가 일본 규슈 사가현에는 일본 도자기의 산실로 육성되었는데, 그는 1616년 아리타 동부의 이즈미산에서 자기의 원료 백자광을 찾아내고 마침내 백자를 구워내는 데 성공하여 일본 도자기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삼평은 일본의 '도조(陶祖)'로 받들어 매년 5월 4일에는 도조 축제가 열리고 도산 신사에는 이삼평을 끌고 온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이삼평을 함께 도공의 영웅으로 기린다네요. 도조 이삼평의 예술혼은 15, 1..

역사 이야기 2021.11.26

벽초 홍명희

신정일, 땅끝에 서다스크랩 괴산 근처, 증평의 도안면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을 추억하다. 햇살편지추천 0조회 3421.10.27 07:49댓글 0 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괴산 근처, 증평의 도안면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을 추억하다. 전북 시인협회와 충북 시인협회가 주관한 문학 기행 차 충북 청주와 증평을 찾았다가 조금은 이상하게 만들어진 김소월 문학관이라는 곳에서 의 저자 벽초 홍명희와 김일성이 대동강에서 배를 타는 사진을 발견했다. 그래, 세상을 살다가 보면 문득, 불쑥, 뜻밖의 것을 예기치 않게 만날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로구나. 괴산 읍내에 있는 홍명희 선생의 집을 찾았던 때는 90년대 초였고,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었다. “임꺽정을 지은 홍명희 선생이 1919년 괴산읍에서 ..

역사 이야기 2021.11.20

양산보와 소쇄원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1. 양산보의 생애 1) 출생과 혼인 양산보(梁山甫)는 아버지 양사원(梁泗源)과 어머니 신평 송씨(新平宋氏) 사이에서 5남 가운데 장남으로 1503년(연산군9)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에 할아버지 양윤신(梁允信)이 평안도 영변으로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나주 복룡동(伏龍洞)에서 외가로 추정되는 광주 동각면(東角面) 창교촌(滄橋村)으로 이사를 가 그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다시 처가와 가까운 창평(昌平) 내남면(內南面) 창암촌(蒼巖村)으로 옮겨오는 바람에 그는 드디어 창평 사람이 되었다. 자(字)가 언진(彦鎭)이고, 소쇄정을 짓고 스스로 호(號)를 소쇄라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소쇄공(瀟灑公)이나 소쇄옹(瀟灑翁)이라고 했을 뿐만..

역사 이야기 2021.11.15

아치나리 아鵝천川

자유게시판 아치나리 | 자유게시판 강나루 2017. 2. 15. 08:32 수정|삭제|공개 http://blog.daum.net/naru636/6215 HOME 영주 톺아보기 우리마을 탐방 참 아름다운 마을이름 휴천3동 ‘아치나리’우리마을탐방[82]휴천3동 아치나리 이원식 기자 승인 2015.11.10 21:45 호수 544 댓글 0 글씨키우기 글씨줄이기 메일보내기 인쇄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300년 전 의성김씨가 개척 세거한 마을 묵향을 남긴 선비, 석당 김종호의 고향 휴천3동 아치나리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남산고개를 넘어 문수방향으로 내려가다가 농협퍼머스마켓에서 우회전해 적서교를 건너면 노벨리스코리아 영주공장을 만난다. 여기서 좌회전해 서천강변로를 따라 내려가면 우측으로 한양조씨 재사..

역사 이야기 2021.10.05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선생

선(朝鮮)의 큰 선비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선생 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영남의 명문 반남박씨가에서 태어 나다. 소고(嘯皐) 박승임 선생의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이다. 박형(朴珩)의 아들로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만일(萬鎰)의 따님이다. 선생은 1517년(중종 12) 영천군(榮川郡) 두서리(杜西里, 斗西里)에서 7남중 6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이후 고려초 반남현(潘南縣)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박응주(朴應珠)를 중시조로 한다. 7대조는 고려 말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지낸 박수(朴秀)이며, 6대조는 공민왕대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여말 선초를 대표하는 유..

역사 이야기 2021.10.02

일본인이 존경하는 역사적인 인물

일본인이 존경하는 역사적인 인물 사카모토 료마 さかもと りょうま(坂本竜馬 1835-1867) 사카모토료마는 에도시대(えどじだい 江戸時代) 말기 일본통합을 이루어낸 무사 さむらい (侍) 로 그의 탁월한 협상능력으로 당시 앙숙지간이었던 사츠마번 さつまはん(薩摩藩 현재의 가고시마현) 조슈번 ちょうしゅうはん(長州藩 현재의 야마구치현) 의 동맹을 이루어낸 그는 도쿠가와막부 とくがわばくふ(徳川幕府) 가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포기하고 이를 왕실에 돌려 주어야 한다고 제안하여 메이지유신 めいじいしん(明治維新) 의 새 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터를 닦은사람으로 평가됨. 33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고향인 토사한 とさはん(土佐藩 현재의 고치현) 에서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동상은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으며, 오른쪽 손을..

역사 이야기 2021.08.25

정도전과 정몽주

조선 개국 일등 공신으로 조선 창업의 마스터 플랜을 설계한 사람이 정도전(鄭道傳, 본관은 봉화, 1342년 출생)이다. 그의 부친 정운경은 유학자로 이색의 부친인 이곡과 친구 사이이며, 고려 말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토호 세력 귀족이다. 정운경은 유학자로서 아들 삼형제의 이름을 정도전(鄭道傳), 정도존(鄭道存), 정도복(鄭道復)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도전은 도를 전하며, 도존은 도를 보존하고, 도복은 도를 회복시키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정도전은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도(道)에 대하여 배웠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는 평생 동안 이 도(道)를 실천하고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결국 이 때문에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태종)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이름 그대로 살다간 위대한 혁..

역사 이야기 2021.08.25

선죽교

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답글수정 단군가족님 글방정몽주의 선죽교 단군가족추천 1조회 10512.12.07 11:19댓글 4 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선죽교 다리 옆에 서있는 비문, 한석봉의 글씨라 한다. 참으로 사람은 가도 역사적 사실과 작품은 남는것. 만수산 드렁츩이 얽혀지듯 이리 살면 어떠고 저리 살면 어떠냐고?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가장 중요한 우리 인생의 화두이거늘. 선죽교바닥을 확대한 것 경북 영천 출신인 정 몽주는 아무래도 경상도식 우직한 의리의 표본인것 같다. 다리 가운데 정말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였다. 차라리 좀 덜 선명했더라면 반신반의 했겠으나 너무 확실하니 오히려 믿음이 덜.. 도대체 육백년이 더 지나도록 어찌 사람의 피가 이렇게 남아있을수 있겠는가. 사진으론 희미하나 실지로 보면 ..

역사 이야기 2021.08.22

양산보의 생애와 소쇄원

양산보의 생애와 소쇄원 김덕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1. 양산보의 생애 1) 출생과 혼인 양산보(梁山甫)는 아버지 양사원(梁泗源)과 어머니 신평 송씨(新平宋氏) 사이에서 5남 가운데 장남으로 1503년(연산군9)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에 할아버지 양윤신(梁允信)이 평안도 영변으로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나주 복룡동(伏龍洞)에서 외가로 추정되는 광주 동각면(東角面) 창교촌(滄橋村)으로 이사를 가 그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다시 처가와 가까운 창평(昌平) 내남면(內南面) 창암촌(蒼巖村)으로 옮겨오는 바람에 그는 드디어 창평 사람이 되었다. 자(字)가 언진(彦鎭)이고, 소쇄정을 짓고 스스로 호(號)를 소쇄라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소쇄공(瀟灑公)이나 소쇄옹(..

역사 이야기 2021.08.20